지난 2011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인기리에 방영됐던 드라마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의 1화는 이런 내레이션으로 시작했다. 정치와는 전혀 무관한 대중적 시트콤 드라마에서, 정치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이름이 호명되고 얼굴까지 2초나마 등장할 정도였던 인물이 있었다. 그의 이름을 딴 사회적 현상까지 과거에는 있었다.
그러나 이번 2018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그가 받아든 성적표는 무려 '3위'였다. 전 무소속 대선후보, 전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공동대표, 전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 전 국민의당 대선후보에 이어 당 대표를 지낸 안철수 서울시장 후보 얘기다.
자신이 '아름다운 양보'를 했던 박원순 시장에게 패배한 것이 문제가 아니다. 119 신고센터에 전화로 막말을 했다며 조리돌림을 당했던, 현직 대통령을 "김일성 사상을 존경하는 분"이라고 주장하고 청와대 비서실장을 "주사파"라며 색깔론을 펴 손가락질을 받았던, "동성애가 인정될 경우 과연 에이즈는 어떻게 감당하느냐"거나 "퀴어축제는 음란축제"라는 막말로 동성애자들의 가슴에 못을 박았던, 그래서 '극우'라는 비난을 들었던 자유한국당 김문수 후보에게조차 뒤진 것이 진짜 문제다.
어차피 지는 것인데 2등이나 3등이나 마찬가지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올해 서울시장 선거는 처음부터 2등 싸움이라는 전망이 있을 정도였다. 재선 임기를 마치고 3선에 도전하는 박원순 시장의 관록, 4.27 남북정상회담과 5.26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6.12 북미정상회담으로 이어진 한반도 평화 정세, 문재인 정부의 높은 지지율 등의 요인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지방선거의 꽃'이라 불리는 수도 서울의 광역단체장 선거를 포기할 수도 없었던 야당은, 결국 대중적 인지도를 갖춘 인물들을 출마시켜 수도권 선거전의 '깃발'로 활용함과 동시에 그 인물을 앞세워 지방선거 이후 정계 개편 국면에서 주도권을 쥐려 했다.
3월 말까지 출마를 고사하던 안철수 후보가 등판을 결심한 것도 그래서였다. 출마 선언에서부터, 이런 복잡한 정치적 맥락이 그대로 담겼다. "정치에 견제와 균형이 절실하다"고 했다. 스스로 "야권의 대표선수"를 자처하기도 했다. "다당제를 뿌리내리고자 피땀 흘려 만든 정당이 송두리째 사라질 것 같은 위기감에 당 대표로 다시 나섰고, 실로 힘든 통합과정을 넘어 바른미래당을 만들었다"고도 했다. 모두 그의 서울시장 출마 선언문에 담긴 말이었다.
당선 자체보다도 '민주당이 1위, 2위는 바른미래당(안철수)'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한국당을 밀어내고 야권의 좌장 자리를 넘보겠다는 의미가 짙었다. 5월 25일 <뉴시스> 인터뷰에서도 그는 "정부·여당이 지방선거 압승을 거두면 실패한 경제 기조를 고집하게 되고, 그럼 우리나라는 다음 총선 때까지 2년 동안 경제적으로 엄청난 어려움에 빠질 것"이라며 "그것을 막는 게 내 역할"이라고 했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안철수와 바른미래당이 가졌던 모든 종류의 기대를 산산이 부수는 것이었다. 4월까지 인물론으로 김문수 후보에 비해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가 했던 안 후보는 선거 막판 보수 표심이 한국당으로 결집되는 양상을 보이자 여론조사에서 2위와 3위를 오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국당이 단일화 공세를 걸어왔을 때, 그는 피하지 않겠다는 인상을 주려는 듯 묘한 여운을 남기는 답으로 일관했다. 진화론의 자연선택설을 연상시키는 '유권자 선택에 의한 단일화' 주장만을 되풀이하던 그는, 지난달 하순부터 "박 시장이 당선되면 안 된다는 것은 (김 후보와 제가) 생각이 같은 것 같다", "김 후보는 단순히 2등이 목표가 아니신 것 같다"(5월 20일) 등의 발언을 내놨다. 그의 선대위원장을 맡은 손학규 전 대표도 "안철수가 단일화의 중심이 돼야 한다"라는 말을 하루 간격으로(5월 21일) 언론에 내놨다.
단일화는 그러나 결국 무산됐고, 이는 상대적으로 보수 성향의 단일한 지지층만을 가진 김 후보보다 중도·보수, 수도권·호남 등 비교적 다양한 지지층 구성을 가진 안 후보에게 결과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했다. 특히 호남 출신인 박주선 바른미래당 공동대표, 김동철 원내대표 등이 김 후보와의 단일화를 비판하는 공개 성명까지 낸 장면은 상징적이었다.
3등이라는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들고, 안 후보는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는 이날 출구조사 결과 발표 후 바른미래당 당사에 예고도 없이 나타나 사실상 패배 인정 선언을 했다. 그는 "서울시민의 준엄한 선택을 존중하며 겸허하게 받들겠다"며 "부족한 제게 보내준 과분한 성원에 진심으로 머리숙여 감사드린다. 그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다"고 했다. 안 후보는 이어 "무엇이 부족했고, 무엇을 채워야 하는지, 이 시대에 제게 주어진 소임이 무엇인지 깊게 고민하겠다"며 "(고민 결과를) 따로 말씀드릴 기회를 갖겠다"고 말하고 기자회견을 마쳤다.
그의 곤궁한 처지를 드러낸 것은, 회견을 마친 후 나가던 그에게 한 기자가 던진 질문이었다. '3등을 하면 정치생명이 끝난다는 분석이 있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안 후보는 "말씀드렸듯이, 깊게 고민하고 따로 말씀드릴 기회를 갖겠다"고만 답했다. 안 후보는 지방선거 다음날인 14일 캠프 해단식을 가질 예정이지만, 해단식이 '깊은 고민'의 결과를 밝힐 계기가 될지는 불투명한 상태다.
정치인 안철수의 앞날에는 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지난해 대선을 거치며 그는 '안철수 현상'의 주역이었던 청년층의 지지를 잃었고, 대선에 이어 국민의당 분당과 바른미래당 통합 과정에서는 정치적 기반이었던 호남과 결별했다. 올해 지방선거에서는 안철수 현상의 시발점이 됐던 2011년 서울시장 선거의 '아름다운 양보'마저 그저 과거에 있었을 뿐인 일이 됐다. 안 후보는 지난 4월 출마선언에서 "7년 전 가을, 저 안철수에게서 희망을 찾고 싶어하셨던 그 서울시민의 열망에 답하지 못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죄송스러운 마음까지 되새기고, 사과드린다"고 했었다. 지금으로서는 "남은 생을 정치인으로 살겠다"(2012.9.19)고 했던 그의 과거 다짐까지 위태로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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