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문재인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신속한 수거가 중요하다, 업체에만 맡기지 말고 정부가 가능한 모든 조치를 실행하라"고 이낙연 총리와의 5일 주례회동에서 지시했다. 문 대통령은 또 제기되는 문제는 무엇이든 확인되는 대로 투명하게 발표하라고 했다.
뒤늦기는 했지만 당연한 조치이다. 그동안 방사성 물질 라돈이 기준을 초과한 대진침대 모델을 사용해온, 그래서 회사 쪽에 신고해 리콜해가기를 학수고대했지만 한 달째 감감무소식이서 분노했던 소비자들은 대통령의 말을 전해 듣고 그나마 약간의 기대감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이날 이 총리는 이번 달 안에 라돈 침대 8만8000개를 모두 수거하기 위해 우체국 망을 이용해서 한꺼번에 수거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 방안은 약간의 문제가 있다. 라돈 침대 수거는 우편물과 수하물 등 다른 물품과는 섞이지 않은 채 별도로 수거해야 하는데 우편·수하물 배달이라는 고유의 일을 하는데도 손이 모자랄 판인 우체국 운송차량을 라돈 침대 수거 업무에 동원하는 것이 효과적일지 하는 의문이 든다.
이보다는 중앙정부가 지자체와 협력해 민간의 물류차량을 최대한 활용해 수거물량을 지금보다 몇 배 더 늘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싶다. 수거는 현재 대진침대가 하고 있는 방식을 그대로 이어받되 부산이나 광주 등에서 대진침대 본사가 있는 천안까지 막대한 물류비용과 시간을 허비하며 이송하지 않고 주요 도시별로 임시 보관 장소를 주거지와 약간 떨어진 곳에 마련해 최종폐기 처분할 때까지 안전하게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통령의 발언은 이번 라돈 방사성 침대 사태가 터진 직후 필자가 <프레시안> 칼럼과 각종 방송 대담,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의 라돈 방사성 침대 현안점검회의 등을 통해 누차 주장해온 것과 일맥상통한다. 필자뿐만 아니라 소비자단체와 환경단체, 전문가 등도 비슷한 이야기를 줄곧 해왔다.
한데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라돈 침대 사용자 등이 목 놓아 외쳤는데도 왜 한 달 가까이 되도록 원안위와 총리실 등은 그야말로 화급한 침대 수거를 이번 사태를 감당할 여건도 되지 않고 능력도 한참 모자라는 대진침대에만 전적으로 맡겨놓고 뒷짐만 지고 있었던 점이다.
생활방사선 안전관리 능력 없는 조직, 핵발전소 중대사고 때는?
현대 사회에서 위험이나 위기는 피할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크고 작은 사고나 이로 인한 위기는 어느 국가, 어느 조직에서나 일어나게 마련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문제는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일을 예방하지 못했거나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했을 때 일어난다. 이번 라돈 방사성 침대 사태가 바로 그러하다.
국민은 과거의 정부에서 잉태된 문제라 할지라도 지금의 정부가 이를 파악해 사건·사고가 터지지 않도록 하지 못했다면 분노의 화살을 지금의 정부에게 돌리게 마련이다. 이전 정부에서 라돈 방사성 침대 사건을 일찍 발견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문제는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이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자녀 안전에 아주 특별한 관심을 지녔던 어느 학부모의 우연한 발견으로 이른바 라돈 방사성 침대 사건이 터졌다.
라돈 방사성 침대 소용돌이 한복판에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서 있다. 이번 사태의 책임은 오롯이 원자력안전위원회에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라돈 방사성 침대 사태에 대한 원안위의 책임은 크고 무겁다.
하지만 사태 발발 한 달이 넘게 지나면서 라돈 침대 사용으로 인한 피폭자들과 국민, 환경·소비자단체들이 느끼는 자괴감은 매우 크다. 생활방사선 안전 문제에 소홀해오다 이번 사태가 터졌음에도 이에 대처하는 원안위 간부들과 강정민 위원장의 자세와 대응을 보고 만약 핵발전소에서 중대사고가 터졌을 때 원안위가 제대로 된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를 의심하고 있다.
원자력안전위원장은 은둔형 조직 책임자?
지난 5월 3일 SBS의 보도 이후 강정민 원자력안전위원장이 국민 앞에 얼굴을 내비친 것은 26일이 지난 뒤인 지난달 29일 천안 대진침대 본사와 대전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을 방문해 대진침대 매트리스 수거 작업과 조사 현장을 점검했을 때 딱 한 번 잠깐이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원자력안전위원회를 연 적도 없다. 위원장이 라돈 침대 피폭자 대표들을 만나거나 언론 브리핑을 한 적도 없다. 대진침대 사용자와 국민에게 사과를 한 적도 없다. 국민의 불안을 잠재우거나 국민과 소통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지도 않았다.
강정민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은 지난 3월 22일 서울 종로구 원자력안전위원회 대회의실에서 방사선 건강영향평가 언론 브리핑을 한 차례 한 적이 있다. 당시 그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하지만 이번 라돈 침대 사태로 결과적으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 방사선 건강영향평가 설명보다 라돈 침대 사태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기자회견을 직접 하지 않는 걸까.
강 위원장은 홈페이지에서 취임 인사말을 통해 "원자력은 한 번의 사고가 미치는 영향이 매우 광범위하므로 안전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요구가 높은 분야입니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이러한 국민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도록 원자력 안전 수호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와 함께 국민 여러분의 눈높이에서 소통하고 현장에서 뛰는 우리 위원회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라돈 침대 사태가 터진 뒤 그가 보여준 모습은 인사말과는 전혀 다르다. "국민 여러분의 눈높이에서 소통하고 현장에서 뛰겠다"는 그의 다짐에 고개를 끄덕일 국민은 지금 많지 않을 것 같다. 특히 라돈 침대 사용자, 즉 피폭자들은 수긍은커녕 분노와 화만 더욱 증폭되고 있다. 원안위와 강위원장을 성원을 할 국민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규제전문기관으로서의 원안위 위상 밑동부터 흔들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최고 수준의 원자력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임무를 지니고 탄생한 안전규제전문기관이다. 하지만 지금은 라돈 방사성 침대 사태로 규제전문기관으로서의 위상이 밑동부터 흔들리고 있다.
원안위는 또 위원회 운영원칙으로 △국민봉사 최우선 △신뢰를 바탕으로 한 상호 존중 △효율경영으로 업무성과 제고 △국격에 걸맞은 국제공조 △적극적인 정보 공개와 대 국민 소통의 5대 핵심가치를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이번 라돈방사성 침대 사태로 헛말이 되어버렸다.
라돈 침대 피폭자들은 건강 피해를 호소하며 원안위에 전화를 수없이 걸었지만 실제 통화를 한 사람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결같이 분노했다. 대국민 소통과 국민봉사 최우선은 그냥 말이나 구호에 불과하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지금의 원자력안전위원회는 9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출신이다. 생활방사선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위원은 환경운동연합 활동을 오랫동안 해온 김혜정 위원(비상임) 정도 밖에 없다.
강정민 위원장 위기관리 낙제점 받아
강 위원장은 서울대 원자핵공학과를 나온 시스템양자공학 전문가로서 한국원자력연구원과 미국 천연자원보호위원회 선임연구위원 등 주로 연구 활동을 해왔으며 이른바 원자력마피아와는 거리가 있는 조용한 성품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방사성 침대라는 희대의 사건이 터졌음에도 두문불출에 가까운 은둔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에 대해 일각에서는 조용한 성격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생활방사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사태의 중요성에 대한 무감각 탓을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다. 그 어떤 이유가 됐든 그의 위기관리 능력은 이번에 낙제점이라는 것이 드러난 셈이다.
위험(위기) 소통의 원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가운데 하나가 조직이나 조직의 최고책임자는 실수나 잘못이 있으면 그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다고 약속한 뒤 그 약속을 잘 지키라는 것이다. 생활방사선 안전은 국민의 일상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것이라 원전 못지않게 관심을 쏟아야할 문제이다.
하지만 원안위는 지금까지 그러지를 못했다. 하지만 더는 아니다. 신속한 침대수거는 원안위 등 정부가 해야 할 일 가운데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역학조사, 피해추적관리, 피해보상 등 그보다 해결하기 몇 배, 몇십 배 더 어려운 난제들이 라돈 방사성 침대 사태 앞에 놓여 있다. 우리는 그 험한 길을 가기 위한 첫걸음을 이제 막 떼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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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주 박사는 <한겨레> 보건복지 전문기자를 지냈으며,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안종주의 위험 사회' '안종주의 건강 사회' '안종주의 위험과 소통' 연재 칼럼을 써왔다. 석면, 가습기 살균제, 메르스 등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보건 및 환경 보건 위험에 관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민들과 소통하며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석면, 침묵의 살인자> <위험 증폭 사회> 등 다수가 있으며, 최근 코로나19 사태를 맞이해 <코로나 전쟁, 인간과 인간의 싸움> <코로나19와 감염병 보도 비평>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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