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남쪽으로 눈을 돌려 보자.북한이 거의 동토(凍土)의 불통 상태인데 비한다면 남한의 형편은 한결 낫다. 대한민국은 불통(극우반공의 깃발)과 숨통(민주공화국의 깃발)이 어우러지면서 열린 민주사회를 향한, 역동적 갈등을 전개해 왔다. 정부수립 시점에서 '기원의 정통성' 문제는 일단 별개로 한다면- 흔히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만 시야를 좁힌다- 남북간의 발전격차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대한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하다. 북한이 개발에 무능력한극좌 공산독재의 길에서 겨우 개발능력있는 독재로의 전환이라는 근대의 첫 관문 통과를 역사의 일정으로 하고 있음에 반해, 남한은 압축성장의 극우반공 개발독재 그리고 이어서는 정치적 민주화를 통해 근대로 가는 '후발 이중혁명'을 달성했다.그리고 민주화 이후에는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 평화의 길까지 주도했다.
남한의 극우반공 개발독재, 또는 '반동적 근대화' 체제는 매우 협소하지만 정치적 다원주의를 용인하고 국가가 주도적으로 관리하는 개방적 시장경제를 작동시키고 제도화했다는 점에서 북한의 개발없는 불통 수령독재와는 퍽 달랐다. 그러나 극과 극은 통하는 법이다. 일본 군국주의 파시즘에 기원을 두면서 53년 분단체제에 반동적 활력을 불어넣은 극우적 유신독재는 북한의 극좌 유일체제와 적대적으로 공생하는 대결주의를 통해 상대방과 닮게 되었을 뿐더러, 그 재판본으로 광주학살의 피를 바르고 그 무덤위에 선 신군부독재로 변모하였다. 이는 이후 정치적·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포함하는 민주공화국- 이것이야말로 제헌헌법이래 대한민국의 정체성이자 정통성이다-의 생환(生還)과 평화의 한반도로 가는 대한민국인의 가시밭 길에 엄청난 희생과 고통을 안겨 주었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과 폭력으로 죽고, 고통받고, 희생되었다. 얼마전 돌아간 민주주의자 김근태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참혹한 고문을 당한 것도 5공 신군부독재 때의 일이었다.
▲ 얼마전 돌아간 민주주의자 김근태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참혹한 고문을 당한 것도 5공 신군부독재 때의 일이었다.ⓒ뉴시스 |
무엇보다 고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주도한 민주정부 10년의 바톤을 이명박 정부에 넘겨준 것이 뼈아픈 대목이다. 이명박 정부는 집권초 이래 시종일관 민주정부 10년의 성취를 뒤짚는 역주행을 자기의 역사적 사명으로 가져 갔다. 민주, 민생, 그리고 한반도 평화 세 분면 모두에서 남한과 한반도의 시계는 냉전의 시간대로 거꾸로 돌아갔다. 나라 안에서는 고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의 벼랑까지 내몰고, 이명박 대통령의 주가조작 의혹을 제기한 정봉주 전열린우리당 의원을 구속 수감하는 등, 정치적 민주주의가 철저히 유린되었다.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측면에서는 재벌과 부자들의 기득권은 과보호하면서 국민대중의 삶의 터전을 뿌리뽑아 민생을 파탄으로 내모는 승자독식의 '두 국민' 분열주의가 지배했다. 박수치는 재벌주도의 수출과 치솟는 주가는 그 비용을 노동배제와 복지 억제로 전가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근로 빈곤층이 양산됨은 물론이고 정규직 조차도 재벌권력의 자의적인 정리해고 칼날위에 위태롭게 서게 됐다. 김진숙이 309일이나 되는 기록적인 장기간 크레인 농성사투를 벌리고 희망버스 연대 행렬이 이어진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세계 시간대에서 2008년 위기로 정글 자본주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1%의 탐욕에 대한 99%의 분노가 지구촌을 뒤덮고 있는 데도, 이 정부는 여전히 그 이전 시간대에 갇혔다.
대미관계에서는 한미 FTA 날치기 비준에서 보듯이 자율적으로 공공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국가주권과 민주적 자기통치권을 다 갖다 바치는 몰주체적인, '뺏속까지 친미적인' 사대매국주의를 '글로벌 스탠더드'를 준수하는 거라고 떠벌렸다. 그리고 남북관계에서는 은근히 북한의 붕괴를 기대하고 희망하는 불통 대결주의가 이 정부의 사고와 행태를 지배했다. 이전 '조문파동'때보다는 나아졌다고 하나, 포스트김정일 시대로 가는 조문국면에서 조성된 대북 소통 기회를 스스로 저버린 것은 그간의 역주행 대결주의가 자초한 자업자득이다. '꼼수정권', '먹튀정권'의 별명을 얻은 이 정부의 성적표는 정치적 민주주의, 사회경제적 민생주의, 한반도 평화와 안정, 줏대있는 한미 관계 이 모든 분면에서 역대 최악의 바닥 수준- F일지 D일지는 논란거리가 되겠지만- 을 길 공산이 아주 크다.
그러나 착각은 금물이다. MB 정부가 실패했다는 것이 곧 반 MB 세력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민주· 진보세력은 역주행 불도저 이명박 정부를 역사의 박물관에 안치하고 탈냉전 상생의 봄을 열 준비가 되어 있는가? 민주 진보세력의 어깨위에는 민주주의 유린과 민생파탄의 역주행은 물론, 남북 관계 역주행을 바로 잡음으로써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의 선순환을 앞당김과 동시에, 포스트김정일 시대 한반도 평화체제를 수립해야 할 이중의 책무가 놓여 있다. 민주진보세력은 이 이중의 과업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바로 이 대목이 궁금하고 또 걱정된다. 우리 시대 민주주의의 붉은 십자가를 짊어진 채 하늘로 돌아간 김근태가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민주당 10년의 민심이반으로 탄생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외환위기 등의 여러 이유로 신자유주의가 한국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음을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 그러한 반성과 성찰 속에 집권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비전과 대안이 명화하지 않은 채 반엠비 정서 덕분에 정권을 잡는다면 다시 정체와 좌절이 찾아올지 모른다".
그런데 이 소중한 유언적 통찰에서 김근태는 '정권을 잡는다면'이라고 말했는데, 2012년 민주 진보세력은 과연 정권을 잡을 수 있겠나? 돌이켜 보면, 민주화시대 한국의 민주주의는 여러 모로 반쪽의 모양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이유는 한 둘이 아니다. 물론 두터운 구체제 유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민주 진보세력 내부 탓도 매우 크다. 군부독재세력과 타협을 통해 민주화 이행을 이룬 것에 더하여, 김대중 김영삼이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것, 김영삼이 삼당 합당을 도모하고 이어 97년 IMF위기사태를 몰고 온 것, 김대중 정부가 97년 IMF 위기와 함께 집권하여 한국 사회에 '신자유주의가 뿌리내리게 된 것', 노무현 정부가 말기에 빅뱅식 한미 FTA를 추진한 것 등을 상기해야 한다. 또 진보 세력의 경우, 한국현대사에 대한 성찰이 결여된 채 한국 현실에 뿌리 내리기 힘든 근본주의적 대안에 치우치는 경향을 보인 지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진보세력이 명시적으로 사회민주적 복지국가 기획에 동참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꼼수, 먹튀, 불통으로 뒤범벅된 역주행 정권 이후다. 이명박이후를 준비하고 있는 신보수와의 대결에서 민주진보는 얼마나 새로움을 보여주고 있나?
박근혜 한나라당 비대위원장의 등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안철수 바람이 꺾이지 않는 현상은 주목할만하다. 그러나 '안풍'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 정치적 실체와 실력이 아직 불분명한 개인에 매달리는 대안의 정치는 불안하며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다이나믹한 건 좋은 일이지만 너무 쏠림 현상이 심한 한국정치의 불안정, 불투명이 마음에 걸린다. 통합을 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기득권에 안주하면서 쇄신에는 소극적인 민주통합당도, 여전히 자기 틀을 박차고 나오지 못하고 대중성을 회복하지 못한 진보통합당도 썩 미덥지는 못하다. 안타깝게도 민주·진보 정당과 2040 세대의 욕구간의 간극은 여전히 크다. 이들의 귀에는 '바보야, 문제는 쇄신이야'라는 큰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시민후보를 탄생시킨 서울시장 선거의 교훈을 금새 잊었나. 그에 반해 헌법 119의 대명사격인 인물과 하버드출신 청년사업가 등을 비대위원으로 끌어들이고 쇄신의 기세를 높히고 있는 박근혜의 솜씨가 내 눈에는 더 돋보인다. 심지어 한나라당의 정강정책에서 '보수'라는 말을 삭제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는 소식이다. 다른 한편 한 여론조사에서는 박근혜가 '남북관계를 평화적이고 안정적으로 가장 잘 이끌 것같은 인물' 1위로 꼽혔다고 한다. 김정일과 직접 대면 대화를 한 당사자이면서도 조문 국면에서 여전히 냉전적 시간 의식을 보여준 바로 그 사람을 말이다. 일찍이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반사회주의, 국가민족주의에 복지국가를 뒤섞은, 엿과 채찍의 신보수 정치를 구사한 바 있는데, 내가 박근혜에게서 성장,복지,안보가 혼합된 모종의 한국판 비스마르크적 길을 읽는다면 너무 과장된 것일까.
북한 김정일위원장의 죽음으로 2012년 대한민국 정치의 새판짜기에서 복지와 함께 평화가 핵심 이슈로 떠올랐다. 노무현정부 말기 북한 '퍼주기'라는 냉전보수의 담론공세에 밀렸던 민주진보 세력은 이제 다시 탈냉전 평화의 깃발을 탈환하여 낡은 냉전 안보의 깃발을 꺾어야 할 과제를 갖게 됐다. 무엇보다 2008년 촛불시위에서부터 시민후보를 서울시장에 당선시키기까지 든든한 저력을 과시한 민주공화국의 새로운 시민적 주체, 그중에서도 특히 '2040세대'가 복지국가의 길과 함께 한반도 평화의 길까지 열어야 할 이중 과제를 떠안게 됐다. 남과 북 모두, 그리하여 한반도가 통째로 새 전환의 계곡에서 그간의 개혁 지체를 압축 만회해야 할 시험대에 올라 섰다. 전환의 계곡안은 어둡고 칙칙하다. 통과후 얻게 될 큰 편익보다는 통과과정에서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훨씬 더 커 보인다. 그래서 달콤한 단기주의의 유혹에 빠지기 십상이다. 어떻게 해야 계곡안에 갇혀 눈앞의 이익만 보는 단기주의를 넘어 계곡밖 저편에서 기다리는 상생의 봄을 볼 수 있을까. 이제 대한민국의 민주 진보는 한꺼번에 성장,복지,그리고 평화의 세 마리 토끼 모두를 잡아야 한다.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 그리고 한반도 평화의 새 봄을 염원하는 공화국의 새로운 시민적 주체 그리고 시민정치는 새 고갯 마루를 넘어야 한다. 만약 우리의 동시대인이며 영원한 민주주의자 김근태가 그의 유언을 완성할 수 있었다면 아마 다음과 같이 쓰지 않았을까.
"민주주의를 점령하라". "복지국가를 점령하라". "한반도 평화를 점령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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