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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왜 체제 실패에 대한 자기계몽이 없는가"

[시민정치시평] 개혁지각(遲刻) 한반도, 상생의 봄을 위한 이중과제①

새해를 맞아 모두 묵은 때를 씻어내고 새 마음으로 시작하려는 다짐을 굳게 한다. 그러나 송년(送年), 망년(忘年) 자리를 연거푸했건만 별 수 없이 지난 해의 자산과 부채를 모두 떠안고 가야 한다. 개인만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 자체가 그런 것 같다. 누가 말했던가.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지만 백지위에서 만드는 건 아니고 주어진 조건 위에서 만든다"고. 진작에 탈냉전의 시대가 왔지만 지난 냉전의 유산, 극단적 대결주의 시대의 유산은 탈냉전의 시대 안에 짙게 어두운 그늘을 내리고 있다. 차가운 냉전의 유산이 짓누르는 무게는 세계 어디보다 한반도에서 유별나다. 21세기 초두 우리는 냉전의 유산이 포개진 탈냉전의 계곡안에서 그 전환의 계곡을 통과하기 위해, 새 시대정신의 깃발을 세우기 위해 씨름하고 있다. 냉전과 탈냉전의 비동시적인 것이 동시적으로 중첩된 오늘의 세계 저편에는 대결주의 시대에 누적된, 두터운 업력(業力)이 버티고 서 있다. 이 편에는 그 부정의 힘을 털어내고 따뜻한 상생의 봄날을 열고자 하는 새 긍정의 힘, 희망의 원력(願力)이 일어나고 있다. 이 둘의 시소게임에서 어느 쪽이 더 셀까? 어떻게 해야 전환의 계곡을 통과하는 비용을 줄이며 상생의 봄을 조금이라도 앞당길 수 있을까. 2012년 흑룡의 해, 한반도 새 전환의 고갯길에서 우리는 이런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대결의 힘과 공생의 힘 간의 힘겨루기와 그에 따른 새 전환의 물결을 글로벌 무대에서 목도한다. 국가독점 사회주의와 승자독식 정글자본주의, 이 둘은 냉전적 극단의 시대가 낳은 쌍생아같은 존재였다. 세계 시간대로 볼 때 1989년이 동측에서 국가독점 사회주의 붕괴의 분수령이었다면, 약 20년 뒤인 2008년은 서측에서 승자독식 신자유주의가 붕괴한 대전환점이었다. 1989년 이후 국가독점 사회주의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이래 70년의 역사를 끝내고 개혁개방의 '체제전환'을 도모하였다. 그 선두에 지금 G2 반열에 올라 세계체제 축을 뒤흔들고 있는 중국이 서 있다. 한편 2008년 위기이후 승자 독식의 신자유주의가 1980년 레이건과 대처가 주도한 보수적 시장혁명이래 30년의 한 시대를 끝내고, 국가와 시장 그리고 실물과 금융이 새 균형을 잡는 이른바 '자본주의 4.0'으로 '체제개혁' 소용돌이 속에 있다. '분노하라'라는 함성이, 1%의 탐욕과 독식을 타파하기 위한 99%의 점거와 항의가 미국을 넘어 전세계를 뒤덮었다. 뿐만 아니라 작년에는 튀니지발 시민혁명이 아랍권과 북아프리카로 들불처럼 번졌다. 그리하여 리비아의 카다피가 사망하는 등, 수십년간 독재 정권의 횡포아래 신음해온 이들 지역 시민과 민중에게도 봄날이 찾아 왔다.

지구촌의 동측, 서측 그리고 남측에서 거대한 변화의 바람이, 낡은 앙시앙 레짐의 '전환'과 '개혁'의 물결이 휘몰아치는 와중에 한반도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냉정하게 말해서 구체제 개혁에 뒤쳐진 지각(遲刻)생의 처지, 그로 인한 극심한 '불통즉통'( 不通卽痛) 증에 걸려 있는 것이 우리 현주소라 고백해야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휴전선 북녘은 1989년 국가독점 사회주의 체제전환 이전의 시간대에 갇혀 있는가 하면, 그 남녘은 2008년 승자독식 정글자본주의 개혁 이전의 시간대에 갇혀 있다. 그리고 남과 북의 관계는 2000년 6.15 공동선언 이전 냉전시간대로 거꾸로 돌아가 서로 피흘리며 적대적으로 공생하는 뺄셈 게임을 불사하고 있다. 북,남 그리고 남북관계 세 수준 모두 냉전의 시간대안에 갇힌 채 기혈이 막혀 불통즉통의 병세가 중증이다.

김정일의 사망으로 한반도 전체 지각(地殼)이 뒤흔들렸으니 북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 한반도 북녘 땅을 생각할 때 마다 늘 나는 자문하곤 한다. 전대미문의 문화혁명 재앙까지 겪은 이웃 중국은 개혁 개방의 체제전환을 단행해 세계체제의 격변을 일으킨 새 주역으로 떠올랐고 미국조차 그 앞에 굽신거려야 할 정도가 됐는데 북한은 왜 체제 실패에 대한 자기계몽을 통해 과감히 그런 길로 나가지 못하나 ? 동족상잔의 6.25 전쟁과 그에 이은 냉전체제가 안겨준 '피(被)포위 의식' 때문인가? 아니면 예로부터 중국 친구들이 조선을 깔볼 때면 말했던 것처럼, 소국(小國)이라 도량이 좁은 탓일까? 그러나 예컨대 중국보다 규모가 훨씬 작은 베트남도 미국과 죽기 살기로 싸웠던 '베트남 전쟁'- 한국은 이 전쟁에 '용병'으로 참전한 바 있다- 의 쓰라린 역사에도 불구하고 '도이모이'라 불리는 개혁개방을 성공적으로 단행하고 미국과도 수교해 살 길을 찾지 않았는가 ? 베트남이 하는 일을 왜 북한은 못하고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고 있나?

▲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영결식 모습.ⓒ노동신문
지금도 북한의 개혁 지각 이유에 대해 나의 의문이 썩 잘 풀린 것은 아니다. 이유는 여하튼 외교적 스탠스에서 벗어나 보통 시민의 감각으로 보자면, 인민민주공화국, 주체의 공화국이라는 문패를 단 곳에서 북한 인민은 정치적 주체, 자기결정권자가 되기는 커녕 수령 유일체제와 수령-인민 일체화 체제의 제물로 동원되고, 희생되어 왔다. 그런데 독재도 독재 나름이라서 '개발있는 독재'가 있는가 하면 '개발없는 독재'도 있다. 북한 정권은 그 중에서도 개발 또는 산업화라는 근대성의 제1관문도 통과하지 못한 채 저개발 좌익 수령독재의 길을 걸었다. 지속되는 식량난과 기아, 탈북난민의 행렬은 모든 인민들이 '흰 쌀밥과 고기국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기와집에 살게 해야 한다'고 한 김일성 유훈의 빛을 잿빛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제 3대 세습으로 확실히 '김씨 왕조' 세습독재 성격을 갖게 된 체제에서 새 김정은 권력의 안착 여부에 따라 북한의 운명이, 나아가서는 한반도 전체의 평화· 안정과 남한의 민주적 복지국가 진전이 매여 있는 모양새가 되어 있으니 이는 대역설이 아닐 수 없다. 북한 전문가들은 이를 '세습의 역설'이라 부르고 있다.

식견 있는 북한 전문가들의 견해를 나름대로 종합할 때, 북한체제 전환의 주된 역사적 의제는 북미, 남북관계를 평화롭게 개선하면서 개발실패 독재에서 개발능력을 가진 독재로 성공적으로 전환하는 일이 아닌가 한다. 그 이유는 뭔가. 우선 북한사회의 속성상 김정은 체제에 대한 대체권력을 찾기란 도무지 난망한 일이다. 그리고 북한 권력은 강고한 전제국가, 유격대적 동원국가이기는 해도, 발전을 위한 제도적, 사회적 규율을 수립하는 데 실패했다는 의미에서는 형편없는 저수준의 '연성국가'(soft state)라 볼 수 있다.그러므로 통치에서는 극도로 강압적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지극히 무능한, 개발없는 좌익독재로부터 점진적 개혁 개방을 통해 경제를 회생시키고 '먹고 사는 문제' 정도를 스스로 수습할 수 있는 독재, 그런 자기규율과 제도적 규율을 내장한 독재로 전환하는 것이 일차적 과제로 제기된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한반도 차원에서 볼때, 김정은 체제가 혼란에 빠지면 이는 다시 남한 냉전보수 기득권세력이 득세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한반도 평화와 안정의 전망마저 혼돈에 빠지게 된다. 만약 우리가 북한이 붕괴되기를 바란다거나 '아랍의 봄'과 같은 봉기사태를 기대한다면 이는 착각일 뿐더러 위험하기도 하다. 그런 사태는 남북한 전체를 파국적 혼란에 빠트릴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북한의 체제전환 그리고 그것에 구속을 받고 있는 한반도 분단체제 전환의 길에서 북한의 경제개발, 민주화와 인권, 그리고 한반도 평화의 세 가치간에는 일종의 트릴레마(trilemma)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이 세 마리 토끼간에는 상충 관계가 존재하고 한꺼번에 세 마리 모두를 잡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한반도 분단체제 전환의 트릴레마에서 우리는 북한의 개발과 한반도 평화·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우선 가치로 설정하고 북한의 민주화와 정치적 인권이라는 토끼는 후순위로 돌리는 선택을 요구받고 있는 셈이다.

만약 한나 아렌트가 살아 있다면 통탄할 일이겠지만, 한반도 현대사의 현단계에서 우리는 북한의 개발, 민주화와 인권 그리고 한반도 평화 가치간의 트릴레마를 감수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이 글 서두에서 말한 바,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지만 주어진 조건 위에서 만든다"는 말을 다시금 곱씹게 된다. 한반도 평화 및 남북 화해 협력 그리고 이에 힘입은 북한 경제회생을 통해 북한 정권이 개발능력을 가진 독재체제로 발전적으로 진화할 때 비로소 북한의 민주화도 언젠가는 역사의 일정에-언제가 될지는 잘 알 수 없다-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트릴레마를 아주 경직된 단계론으로 받아 들여서는 안될 것이다. 3대 세습을 맞이한 북한의 수령제가 '선군'(先軍)일변도의 개발없는 독재로부터 민생을 중심에 놓는 개발능력있는 독재로 전환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개발독재가 개발에 봉사하는 독재가 아니라 권력축적을 자기목적으로 하는 독재로 영속화되지 않게 하려면, 대북 정책은 포용과 함께 일정한 감시 규율을 필요로 한다. 우리들은 중국에서 개발독재로의 전환과정에서 보았던 천안문 광장의 비극을 잊지 말아야 한다. 멀리 갈 것 없이 남한의 박정희 개발 독재와 신군부독재가 빚어낸 야만적 비극을 생각해 보라. 따라서 기본적으로 북한의 '국가성'을 인정하면서 서로 평화와 교류, 협력을 지향하는 남한의 대북 포용정치는 북한에 대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이끌어 나갈 책임과 더불어, 북한 주민의 인간 및 시민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를 존중해야 할 책임에 대해서도 서로 대화하고, 설득하고, 요청하는 평화지향적이면서 인권친화적인 포용정치로 진화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는 남한 내부의 인권개선 노력과 동시에 추구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평화지향적일뿐만 아니라 인권친화적인 포용정치는 국가수준의 정치,정당정치 수준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며 바람직한 것인지도 확실치 않다. 그런 복합적 포용정치는 시민사회 수준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나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북한의 체제 전환과 분단체제 극복의 정치를 국가 정치·정당정치로만 좁게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남한 내부 정치만이 아니라 대북 포용정치도 국가 ·정당정치와 시민참여 정치의 두 바퀴( two-track)를 필요로 하며 그런 방향으로 진화해야 한다. 남한의 진보적 시민운동은 국가적 포용정치와는 구분되는 자신의 독자적 책무를 자각하고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한국의 시민 사회운동은 민간교류를 통해 당국간 교류의 가교역할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더욱이 한반도 분단 현대사에서 정부는 물론 시민사회 자신이 치열한 갈등과 이념대결의 당사자로 작용해왔다.그 때문에, 시민사회 역시 인권에 대한 감시라는 책무와 갈등완화 맟 평화정착에 노력할 책무간의 균형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의 이런 생각은 전통적인 통일민족주의와는 다른 지점을 갖는다. 통일민족주의는 통일을 중심으로 대동단결해야 다른 모순들도 풀어 낼 수 있다는 사고를 보이는데 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사실 평화와 통일간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으며 그것이 추구하는 가치도 다른 지점이 있다. 통일을 최상의 가치로 내세우고 이를 위해 대동단결하자는 주장은 여타 모순들에 대한 해법을 내기는 커녕 오히려 그 모순들이 담지하는 가치를 밀어내고 심지어 억압할 수도 있다. 남한의 선진적인 민주 복지국가로의 이행 그리고 북한의 기본적 인권 문제도 통일 가치에 종속시켜서는 안될 일이다.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적 부국강병 논리를 척결하지 못하면, 부지불식간에 현단계 한반도 수준에서는 최고가치인 평화체제 정착과 '평화국가' 만들기 과업조차 뒤로 밀려날 우려가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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