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시대의 종언으로 한반도는 큰 변화를 눈앞에 두고 있는데 복지 이야기는 왠지 뜬금 없는 것 같아 불편하다. 그러나 우리는 갈 길을 가야하고, 통일된 조국의 미래 또한 우리가 추구하는 보편적 복지국가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벌써 기억이 가물거린다. "삼성그룹 회장 같은 분들의 손자손녀야 무상급식 안 해도 되지 않겠느냐?" 각하(요즘은 "가카"라고 한다)께서 올해 방송과 신년좌담에서 한 이야기다. 아마도 상당수 복지전문가들도 "가카"의 인식에 동의할 것이다. 눈치 빠른 <조선일보>는 "가카"의 발언 후 얼마 되지 않아 설문조사를 했다. 조사대상은 저소득층에게 방과후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역아동센터의 교사들이었다. 예상대로 결과는 지역아동센터 교사들의 55.2%가 무상급식 전면실시를 반대했다고 한다. 이유는 부자와 중산층에게 쓸 돈이 있으면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저소득층에게 콩 한 쪽이라도 더 주는 것이 한국사회의 빈곤과 불평등을 완화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감성적으로, 그리고 얼핏 논리적으로도 타당해 보인다. 복지확대는 지지하지만 보편적 복지를 반대하는 많은 시민들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한나라당이 싫어서 무상급식과 보편적 복지에 동의했지만 정작 대부분의 시민들의 마음속에는 부자에게 줄 돈이 있으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하는 의구심(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지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생각은 틀렸고, 그런 의구심은 부질없는 생각이다. 먼저 상상의 나래를 펴보자. 삼성 이건희 회장의 손자녀들이 (가난한 아이들이 이용하는) 지역아동센터의 방과후 프로그램을 이용한다고 상상해보라. 재벌 집 손자녀들이 이용하는 지역아동센터의 모습은 어때야할까? 지금 지역아동센터에서 매일매일 저소득층 자녀들을 위해 제공되는 저녁식사, 방과후 프로그램, 남루한 시설에 재벌 집 사장님과 사모님들이 만족해할까? 그들이 만족하지 못한다면 왜 저소득층 부모들은 만족해하고, 고마워해야하나? 가난하니까! 중산층과 부자가 참여하지 않는 복지는 결국 지금 지역아동센터의 모습처럼 최소한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밖에 없다. 내가 이용하지 않는 복지를 위해, 내가 낸 세금으로 다른 사람이 나처럼 사는 것을 대부분의 부자와 중산층은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산층은 물론이고 재벌의 손자녀도 공적복지의 대상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복지는 최소한의 복지가 아닌 부자와 중산층도 만족할 수 있는 그런 복지를 원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세금을 내고, 모든 사람이 나누는 스웨덴과 같은 사회에서는 복지재원의 총량이 크기 때문에 결국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몫도 커진다. ⓒ뉴시스 |
두 번째는 빈곤과 불평등은 스웨덴과 같은 보편주의 복지국가가 아닌 미국과 같은 잔여주의 복지국가들에서 훨씬 높게 나타난다. OECD 30개 회원국 중 대표적인 보편주의 복지국가인 스웨덴과 덴마크는 불평등을 측정하는 지니계수가 가장 낮은 국가들이다. 반면 미국과 영국의 지니계수는 높은 편이다. 빈곤율도 유사한 경향을 보여준다. 2000년대 중반 덴마크(5.2%)와 스웨덴(5.3%)은 OECD 국가들 중 빈곤율이 가장 낮은 국가들인데 반해 미국(17.2%)은 멕시코(17.8%), 터키(18.4%)에 이어 빈곤율이 가장 높은 국가이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부자에게 걷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면 불평등이 감소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현실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이용하지 않는 복지를 위해 충분한 세금을 낼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부자들과 중산층에게 세금을 걷어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나누어주는 미국 같은 사회에서 빈곤과 불평등이 높은 이유이다. 반면 모든 사람이 세금을 내고, 모든 사람이 나누는 스웨덴과 같은 사회에서는 복지재원의 총량이 크기 때문에 결국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몫도 커지는 것이다. 어려운 말로 재분배의 역설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보편적 복지가 필요한 이유는 복지가 가난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국민 대다수가 가난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가카"의 이야기처럼 삼성그룹 회장의 가족들은 공적복지가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자료를 보면 미국인 중 75세가 될 때까지 한번 이상 빈곤(상대빈곤)을 경험하는 비율은 무려 76%에 달한다. 모르긴 몰라도 미국보다도 복지지출이 적은 한국은 더 심각할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빈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게 되는 사회위험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니 어떤 경제학자 왈, "빈곤에 처한 이후에 지원해 주면 되지 않느냐?"라고 반문한다. 빈곤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빈곤은 단순히 돈이 없는 것이 아니다. 빈곤하다는 것은 가족관계가 절단 나고, 친구관계가 절단 나며,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존감의 상실이야 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빈곤에 처한 이후의 개입은 파괴된 가족관계, 사회관계, 자존감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다는 점이다. 돈 몇 푼 준다고 상처받은 가족관계가 복원될까? 워낙 비현실적인 가정을 하니 경제학적 모델에서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복지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후적 개입보다는 예방적 개입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효과적인 예방적 개입은 바로 보편주의 복지이다. 1997년 경제위기 이후 복지확대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보편주의 복지에 대한 논란은 왜 한국사회에서 보편적 복지가 필요한지를 되풀이해서 보여주고 있다. 중산층도 빈곤층으로 추락할 수 있고, 자신과 가족에게 필요한 모든 서비스를 시장에서 구매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공적복지는 저소득층만을 위한 것이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 되어야한다. 재벌의 손자녀도, 통일된 조국에서 북한 동포들도 보편적 복지의 주체이자 대상이 되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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