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7일 판문점 회담 이전까지 분단 73년 동안 남북 정상회담은 단 두 차례밖에 없었다. 그런데 불과 한 달 사이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두 번 만났다. '이게 실화냐?'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현실이지 않을 수 없다.
5.26 정상회담은 한반도 비핵평화로 가던 수레바퀴 가운데 하나가 빠질 뻔한 상황에서, 또 하나의 수레바퀴가 진흙탕에 빠질 뻔한 상황에서 열렸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전자의 수레바퀴는 북미관계를, 후자의 수레바퀴는 남북관계를 의미한다.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한 김 위원장은 이 자리를 통해 북미 정상회담과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강한 의지를 선보이면서 문 대통령과 함께 흔들거리던 수레바퀴를 단단히 끼우고자 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이에 호응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맥스 선더, 태영호 전 공사의 언행, 탈북자 단체의 삐라 살포, 북한 여종업원들 미송환 등을 문제 삼으면서 이들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남북한이 "마주 앉기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북한은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서 남북관계를 다시 정상화하기로 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남북관계와 북미 관계라는 두 개의 수레바퀴가 잘 굴러갈 때, 비로소 희망적인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의 가장 큰 의의는 바로 이 지점에 있는 것이다.
이제 관심의 초점은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벌일 '세기의 담판'에 모아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다양한 전망이 쏟아지고 있지만, 지금은 대안이 절실한 때이다. 특히 꺼져가던 불씨를 되살리는데 기여를 한 문재인 정부의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주도적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다.
CVID 대신 CVFD를!
대안과 관련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CVID 대신 CVFD를 추구했으면 한다. CVID는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omplete, verifiable, and irreversible denuclearization)'를 의미한다. 반면 필자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CVFD에서 'F'는 '빠른(fast)'를 의미한다. 즉,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빠른 비핵화'를 한반도 핵문제 해법의 원칙으로 삼아보자는 것이다.
이런 대안을 제시한 핵심적인 이유는 CVID가 또다시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북미 간에 비핵화 자체의 정의와 목표를 둘러싸고도 이견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CVID, 특히 '돌이킬 수 없는'에 합의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하듯 북한은 최근 김계관과 최선희 외무성 부상들의 담화를 통해 CVID에 대한 거부감을 거듭 표명한 바 있다.
그렇다면 CVFD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우선 트럼프는 큰 흥미를 가질 법하다. 트럼프가 가장 원하는 것은 '빠른 비핵화'이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보면, 트럼프는 10월 노벨 평화상 수상자 결정과 11월 중간 선거 이전에 비핵화에 관련된 획기적인 합의와 조치를, 2020년 재선 도전 이전에는 비핵화 완료를 희망한다고 할 수 있다. 'F'는 바로 트럼프의 이러한 열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데에 안성맞춤이다.
북한은 어떨까? 일단 북한은 2005년 9.19 공동성명에서 '완전한'과 '돌이킬 수 없는'에는 반발해 이들 표현을 뺀 반면에 '검증가능한'에는 동의한 바 있다. 또한 판문점 선언과 5월 26일 남북 정상회담에서는 '완전한 비핵화'가 담겼다. 이에 따라 '완전하고 검증가능한'은 북한도 동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관건은 북한이 '빠른'에 동의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있다. 두 가지를 고려해보면 가능하다. 하나는 북한이 CVID 가운데 가장 문제 삼아왔던 것이 바로 '돌이킬 수 없는'이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빠른'이 '돌이킬 수 없는'을 대신한다면 북한도 충분히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패전국에게나 쓰일 법한 표현", 즉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한다는 표현이 문제 해결 방식 및 속도를 의미하는 표현으로 대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근거는 5월 25일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의 담화에 담겨 있다. "'트럼프 방식'이라고 하는 것이 쌍방의 우려를 다 같이 해소하고 우리의 요구조건에도 부합되며 문제해결의 실질적 작용을 하는 현명한 방안이 되기를 은근히 기대하기도 하였다"고 했는데, '트럼프 방식'이 바로 빠른 문제 해결을 지향하고 있다.
물론 CVFD가 현실적인 대안이 되려면, 중요한 조건이 있다. 빠른 비핵화에 조응하는 빠른 대북 안전보장과 대북 제재 완화와 해제가 바로 그것이다. 쉽게 말해 '빠른 비핵화'와 '빠른 상응조치' 사이의 대타협이 필요한 것이다.
가령 북한의 획기적인 비핵화 합의 및 조치와 한반도 기본(혹은 잠정) 평화협정 체결 및 대북 제재의 실질적인 해제를 조속히 추진하는 것이 그 방법론 가운데 하나이다. 종전 선언을 거치더라도 평화협정과 시간차를 최대한 단축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가을이 오면
'빠른 비핵화'가 '빠른 상응 조치'와 단계적·동시적으로 이뤄진다면, 김정은이 이를 마다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빠른 상응 조치'는 북한이 빠른 시일 내에 핵무기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의 안보를 확보하고 경제발전에 우호적인 대외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북한이 4월 노동당 결정서를 통해 천명한 "새로운 전략 노선"과도 잘 부합할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김 위원장은 북한 정부 수립 70주년이 되는 9월 9일 이전에 가급적 한반도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고 있다는, 특히 북미 간의 적대관계가 평화 관계로 전환되고 있다는 점을 대내외에 보여주고 싶어 한다. CVFD가 북한이 내심 원하고 있는 '명예로운 비핵화'와 잘 부합할 수 있다고 보는 까닭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빠른 비핵화는 트럼프의 핵심적인 목표이다. 더구나 이러한 방식이 '트럼프 방식'이나 '트럼프 모델'로 명명된다면, 트럼프는 더 큰 명예를 얻게 된다.
지금까지의 작명은 강압이든 설득이든 핵포기 대상국의 국명을 다는 방식이었던 반면에, 이 방식은 트럼프의 이름을 기리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트럼프 방식"에 "은근히 기대했다"고 밝힌 것은 기꺼이 이러한 작명에 동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김정은과 트럼프 모두 가을이 오기 전에 세기의 담판을 마무리 짓고 가을이 오면 그 결실을 맺고자 한다. 김정은은 9.9절을 70년간의 북미 간의 적대관계가 평화 관계로 전환되었음을 알리는 자리로 삼고 싶어 할 것이다. 아마도 그가 9.9절에 가장 초청하고 싶은 사람은 다름 아닌 트럼프일 것이다.
트럼프 역시 역대 어떤 대통령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이룸으로써 노벨 평화상 수상과 중간선거에서의 선전을 노리고 있다. '빠른' 비핵화와 평화체제가 필요하고 또한 가능하다고 보는 까닭이다.
* 이 글은 <내일신문> 5월 28일에 게재한 칼럼을 보완한 것입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