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5일 정오께 SNS를 통해 직접 개헌 관련 메시지를 냈다. 전날 김의겸 대변인을 통해 대통령 발의 개헌안이 국회에서 사실상 부결된 데 대해 "유감"을 표명한 지 하루 만이다.
문 대통령은 글의 첫머리에서 "촛불 민심을 헌법에 담기 위한 개헌이 끝내 무산됐다"고 못박았다. 문 대통령은 또 "이번 국회에서 개헌이 가능하리라고 믿었던 기대를 내려놓는다"며 "언젠가 국민들께서 개헌의 동력을 다시 모아 주시기를 바란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매우 송구스럽고 안타깝다"면서 "국회는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의 가부를 헌법이 정한 기간 안에 의결하지 않고 투표 불성립으로 무산시켰다. 국회는 헌법을 위반했고, 국민은 찬반을 선택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게 됐다. 국회가 개헌안을 따로 발의하지도 않았다"고 국회를 맹비난했다.
자신이 발의한 개헌안이 '투표 불성립'으로 무산된 데 대한 통상적인 아쉬움과 유감의 표명일 수도 있지만, 문 대통령의 글 곳곳에서는 '이제 개헌은 끝났다'는 단정이 묻어난다. "끝내 무산됐다", "언젠가 다시" 등의 표현은 특히 주목된다.
전날 김의겸 대변인이 발표한 개헌안 투표 불성립 관련 청와대 입장에서도 비슷한 시각이 읽혔다. 김 대변인은 "개헌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며 "앞으로 새로운 개헌의 동력을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김 대변인은 "결과적으로 (개헌이라는)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며 "정부는 그래도 대통령 발의 개헌안의 '취지'가 국정 운영에 반영되도록 힘쓰고, 법·제도·예산으로 개헌의 '정신'을 살려나가겠다"고 했었다.
전날 국회는 사실상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대통령 발의 개헌안 표결을 강행, 114명의 의원만이 투표에 참여함으로써 의결 정족수(재적 288명의 2/3인 193명 이상)를 채우지 못했고 정세균 국회의장은 "투표 불성립"을 선언했다. (☞관련 기사 : 개헌 '패전처리조'? 민주당은 왜 개헌투표 강행했나?)
본회의 표결이 무산된 후 정 의장이 한 발언 가운데도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었다. 정 의장은 "개헌 추진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국회발 개헌은 아직 진행 중"이라면서도 "한 달 후면 헌정특위 활동 시한이 종료된다. 6월 안에 최대한 지혜를 모아 국회 단일안을 발의할 수 있기 바란다. 더 이상 미룰 명분도 시간도 없다"고 했다. 국회 개헌안 마련 시점이나 헌정특위 활동 기간에 시한을 설정했다는 해석이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대통령 발의 개헌안 투표 불성립 전후로 여당 지도부에서도 비슷한 메시지가 나왔다.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1987년 이후 국민이 바라는 개헌을 관철해야 할 시대적 사명과 역사적 책무를 저버린 야당들을 국민이 반드시 기억하고 응징할 것"이라고 야당을 비난했다.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라디오 인터뷰에서 국회 주도 개헌안 마련에 대해 "국민 다수와 국회가 권력 형태 등 개헌 내용에 있어서 너무나 괴리가 크다"며 "국민들 80%가 요구하고 있는 헌법개정안이 있는데, 이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국회에서 몇 개 당이 모여 논의해서 결정하는 것은…(안 된다). 헌법도 국민들 요구를 최대한 반영시켜야 하고 국회에서만 논의해선 안 된다"고 부정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날 문 대통령 발언으로 완결된, 청와대·여당에서 나온 일련의 반응은 두 가지 지점에서 우려를 일으킨다. 첫째, 문 대통령이 SNS에 개헌 관련 메시지를 올린 25일 정오는 6.12 북미 정상회담이 무산 위기를 맞으면서 한반도 안보 환경에 대한 불안감이 한껏 높아지고 있는 시점이었다.
정치인들 누구나 '안보에는 여야가 없다'고 말하듯, 지금은 여야 간이나 입법부와 행정부 간 이견은 줄이고 협력 가능성을 높이는 거국적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대통령은 국회를 비판하고 여당은 야당을 비난하는 것이, 한밤중 나온 미국발 뉴스에 가슴을 졸인 유권자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돌아봐야 한다.
둘째, 청와대·여당이 정말로 "촛불 민심을 헌법에 담기 위한 개헌(문재인)"을 "1987년 이후 국민이 바라"(추미애)왔다고 절실히 느낀다면, 대통령 발의 개헌안 무산 이후라도 국회에서 개헌 동력을 새롭게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우선해야 가능하다. 하지만 청와대와 여당에서 나오는 메시지들은 '대통령 발의 개헌안' 무산을 개헌 무산과 등치하는 듯한 뉘앙스가 역력하다.
헌법애 규정된 개헌 절차는 "국회 재적 의원 과반수 또는 대통령의 발의"(128조)이다. 대통령 발의라는 하나의 길은 막혔지만, 국회에서의 개헌 가능성은 남아 있고 이는 정세균 의장도 본회의 마무리 발언에서 언급한 바다.
대통령 발의 개헌안 표결 하루 전인 지난 23일, 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 등 야3당은 당 대표 및 원내대표, 국회 헌정특위 간사단 공동 명의로 기자회견을 열고 "가장 첨예한 쟁점이었던 권력구조 문제에서도 이견을 좁혀 왔고, 합리적 대안을 도출하기 직전 단계에 있다. 이제 조금만 더 노력하면 초당적 합의를 이뤄낼 수 있다"며 "조금만 더 노력하면 초당적 개헌안이라는 옥동자를 탄생시킬 수 있다.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 (☞관련 기사 : 야3당 "대통령 개헌안 철회"…靑 "자진 철회 없다")
야3당은 "우리는 개헌을 향한 대통령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 진심을 믿기 때문에, 진정한 개헌의 결실을 거두기 위해 대통령께 개헌안 철회를 정중히 요청드리는 것"이라며 "대통령 개헌안이 표결 불성립 또는 부결된다면 단지 대통령의 개헌안 좌초가 아니라, 개헌 논의 자체가 좌초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들의 '우려'가 현실이 될 가능성은 점점 짙어지는 듯 보인다.
역대 정부를 돌아보면, 1990년대 이후 거의 모든 대통령들은 대선후보 시절 개헌에 긍정적 입장을 보였다가 집권 후에는 입장을 번복해 왔다. 4년 중임제 개헌을 공약해 놓고 정작 당선되자 "개헌을 블랙홀"이라며 논의 자체를 틀어막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표적이고, 3당 합당 때 '집권 후 내각제 개헌'에 합의해 놓고 임기 중에는 "어떤 형태의 개헌도 단호히 반대"라고 한 YS의 사례도 있다. '촛불 민심'으로 수립된, 그리고 그 민심의 요구 중 하나가 바로 개헌이라고 스스로 주장해온 문재인 정부가 1년 만에 개헌 의지를 꺾은 듯한 대목이 그래서 아쉽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