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국회의장에 오른 후 국회 분위기는 싹 달라졌다. 이명박 정부 출범 초반에 국회의장을 지낸 김형오 전 의장은 소득세, 법인세법 등을 비롯해 미디어법까지 총 4차례나 직권상정을 해 '직권상정 의장'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지만, 김 전 의장은 직권상정 직전 고민하는 흔적이라도 발견할 수 있었다.
박 의장은 그런 스타일이 아니다. 지난 22일 처리된 한미FTA 비준안에 대해 박 의장은 "그 좋은 협정을 왜"라고 역정을 내며 야당의 반발을 무시했다. 이명박 대통령 국회에 다녀간 지 1주일 만에 박 의장은 역사에 길이 남을 '날치기'를 주도했다. 국회의장이 대통령의 '오더'를 받는 모양새를 스스로 연출한 것이다. 그러면서 본인은 정의화 부의장에게 의사봉을 넘겨주고 무대에서 사라졌다. TV 자료화면에는 박희태 의장의 얼굴이 나오지 않게 됐다.
박 의장은 지난 2010년 12월 예산안 날치기 때도 같은 수법을 썼다. 야당이 방심한 틈을 타 '기습' 직권상정을 감행한 후 정의화 부의장에게 의사봉을 넘기고, 잠적했다. 예산안을 비롯해 4대강 관련 법안 및 서울대법인화법 등을 무더기로 처리했다.
취재 환경도 바뀌었다. 박 의장은 시민단체의 국회 기자회견을 원천봉쇄해 왔고, 기왕의 국회 상시 출입기자(1년 동안 별도의 등록 절차 없이 출입 가능) 인원을 줄여버렸다. 졸지에 상시 출입증을 반납하게 된 한 주간지 기자는 볼멘 소리를 했다. 대신 아직 개국도 안한 조중동 보수 종편 언론사들을 위해서는 친절하게 70평 공간을 비워 기자실을 뚝딱 만들어줬다. 한미FTA비준안 처리를 두고 여야가 협상하는 과정에서 툭 하면 "외부 기자 국회 출입 금지" 조치를 내리기도 한다. 기자들 보기 부끄러워 그런가?
▲ 박희태 의장 ⓒ연합 |
본회의장서 최루탄 터질 때, 혼자 개화파 묘소 찾아간 박희태
박 의장은 본회의에서 한미FTA비준안 상정을 앞두고 민주노동당 김선동 의원이 던진 최루가루에 정의화 국회 부의장이 코를 막고 있던 시간에 충북 보은에 내려가 조선 후기 개화파인 박규수의 묘소를 찾았다고 한다. 한미FTA비준안 날치기 처리에 총대를 맨 자신을 조선 후기 개화파에 빗댄 것이라는 평이 나온다.
박규수는 당대 최고의 정세가로, 강화도 조약을 맺기 전 일본과 수교를 통해 개방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실제로 조선은 박규수의 주장대로 일본 측과 접촉하지만, 일본은 미온적인 반응을 보인다. 일본의 속셈은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이다. 애초 '불평등 조약'을 원했던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강화도조약을 맺도록 유도했다.
미국의 '함포 외교'에 굴복한 일본이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의 물꼬를 연 후, 첫 먹잇감으로 조선을 노리며 성사시킨 1876년의 강화도 조약에는 조선이 일본에 일방적인 '무관세 혜택'을 주게 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강화도 조약은 일제 경제 침탈의 첫 단추였다. 일본의 경제인들이 조선에 들어와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할 수 없는 '치외법권' 조항도 들어있었다. 당시 조선인들은 '관세'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뒤늦게 '관세'를 이해한 조선은 부랴부랴 일종의 '관세청'을 만들지만 일본의 반발로 3개월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박규수 개인의 공과에 대한 논란은 제쳐 두자. 박희태 의장이 자신의 행보를 어떻게 포장하려는지 그 의도도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날치기 와중에 충청도로 대범하게 날아간 박 의장을 보면서 기자는 강화도조약을 떠올렸다. 박규수는 강화도조약을 맺은 이듬해에 사망했다. 이 조약이 조선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볼 수 없었다. 쉽게 얘기하면 박규수는 일본과 조약을 맺게 될 경우 30~40년 후 조선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측을 하지 못한 사람이다.
미국과 불평등 조약을 '날치기'로 맺어 준 박희태 의장도 한미FTA가 자신의 손자 뻘 세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직접 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그는 조선 말기 '개화파'를 자처하고 있다.
박희태, 7선 하고 싶은가?
예산안이든 한미FTA든 총선을 앞둔 집권 여당의 고민을 한방에 해결해온 '해결사' 박 의장이 최근 19대 총선 불출마 선언을 했다는 보도가 나온 적이 있다. 이 보도가 나간 후 박 의장이 '발끈'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불출마 선언을 하지 않은 것이냐'고 국회 관계자에 물었더니 "긍정도 부정도 안하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5선 텃밭을 버리고 양산으로 이사 간 박 의장은 여전히 지역구 다지기에 공을 들이고 있다. '노욕'이 무섭다는 말이 있다. 다음은 민주당 김재균 의원이 지난 1일 2012년도 예산 심사 과정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지식경제부가 박희태 국회의장의 지역구인 경남 양산에 전기연구원 분원과 생산기술연구원 분원을 설립하기 위해 차세대 2차전지 핵심기술 개발과 기술 지원사업 25억원과 첨단 하이브리드 가공기술 고도화 및 실용화 20억원을 2012년도 신규사업 예산으로 편성했다...확인결과 이들 예산은 당초 정부예산안에는 없었으나 지난 8월에 갑자기 편성된 것으로, 지경부는 가장 기초적인 설립수요조사와 설립계획을 수립하지 않았고, 산업기술연구회에 신청조차 되지 않은 상황인데도 예산을 편성했다...아무리 국회의장이라도 이런 식으로 국민의 세금을 함부로 쓰는 것은 국민의 세금을 개인의 쌈짓돈 정도로 보는 도덕적 해이의 전형일 뿐만 아니라, 국가적 낭비고, 규정도 어겼다. 전액 삭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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