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즉각 정부를 장악하고 '군사혁명위원회'를 만들어 반공을 국시로 삼는다는 '혁명 공약'을 발표했다. 쿠데타를 '혁명'으로 미화한 것이다. 아울러 1년 전의 '4월 혁명'은 '4.19의거'로 깎아내렸다.
'5.16혁명' 또는 '5.16군사혁명'이 '쿠데타' 또는 '군사정변'라는 올바른 명칭을 갖게 된 것은 한 세대가 흐른 뒤였다. 1993년 출범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펼치면서 '사월혁명'과 '5.16쿠데타'를 복원한 것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5.16군사정변'으로 표기되기 시작했다.
저항과 반동도 일어났다. 1997년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이른바 '박정희 신드롬'이 생기면서다. 1979년 죽은 박정희의 인기가 전직이든 현직이든 어느 대통령보다 훨씬 높았고, 박정희 독재 아래서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이인제 대통령 후보까지 박정희와 닮은 모습을 보이려고 애썼다.
5.16쿠데타의 주역으로 박정희의 조카사위이자 박근혜의 사촌형부인 김종필은 "5.16이 쿠데타나 혁명이냐"는 질문에 "영어로는 쿠데타고 우리말로는 혁명"이라는 명언 겸 궤변을 남겼다.
그는 1961년 미국의 중앙정보국 (CIA)을 본떠 지금의 국가정보원인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제1대 부장을 지내고, 1963년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 이름을 합친 민주공화당을 만들어 제1대 당 대표 (당의장)를 맡았으며, 1970년대 초 박정희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내고,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에서도 국무총리에 오른 특이한 인물이다.
박근혜는 2007년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아버지의 5.16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으로 치켜세웠다. 2012년 대통령선거 과정에선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했다가 부정적 여론이 일자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킨 결과를 가져왔다"며 물러서기도 했다.
이런 박근혜가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자 '쿠데타'가 사라지고 '혁명'이 되살아났다. TV 방송에서 '군사혁명'이란 말이 나왔다. 총리나 장관 후보들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열릴 때마다 야당 의원들이 '5.16이 쿠데타인지 혁명인지' 물으면, 후보들은 답변을 거부하기 일쑤였다. 교육부장관 후보들도 그랬고, 교수 출신 장관 후보들도 소신 없긴 마찬가지였다.
박근혜의 국정농단과 관련해 2017년 12월 구속 기소된 이병기 전 국가정보원장이 2014년 7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5.16을 쿠데타라고 소신껏 답변했다가 청와대로부터 질책을 받았다는 사실이 2018년 재판 과정을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2. 5.16쿠데타에 관한 미국 정부 자료와 미국의 역할에 관한 연구
5.16쿠데타에 관한 미국 정부의 외교문서는 국무부가 1996년 펴낸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1-63 제22권'
국무부가 30여 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비밀 분류에서 풀어 펴내는 외교문서집은 미국 정부의 외교정책 결정과 외교활동에 관한 "철저하고 정확하며 믿을만한" 공식적인 역사 기록이다. 역사의 진실을 밝힌다는 취지로 펴내는 것이다. 당시 기록을 공개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고칠 수는 없다. 그러나 국익을 해칠 수 있거나 관련자의 신변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문서는 부분적으로 내용을 삭제하기도 하고 통째로 빠뜨리기도 한다.
특히 중앙정보국은 매우 민감하고 보안을 지켜야 할 기록을 쉽게 공개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사월혁명과 미국의 개입'을 보여주는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8-1960 제18권'
이런 경우엔 사건 전후의 문서를 바탕으로 추정하거나 사건 관련자들의 회고록과 증언 등을 보조 자료로 삼아 조금이라도 더 역사의 진실을 밝힐 수밖에 없다. 물론 사건 관련자의 회고록이나 증언에는 잘못된 기억이나 의도적 왜곡이 곁들여질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런 탓인지 5.16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역할이나 대응 전략을 다룬 연구결과가 많이 출판되지 않은 듯하다. 먼저 정치학자 김세진이 1971년 미국에서
쿠데타의 배경을 설명하며 미국의 역할에 관해 1970년 무렵까지 널리 통용되던 두 가지 견해를 간단하게 소개한다. 첫 번째 견해는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가진 미국의 동의 없이는 군사쿠데타가 성공할 수 없기 때문에 미국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지원했으리라는 한국 지식인들의 추리다. 두 번째 견해는 미국이 주한미군사령부를 통해 5.16쿠데타를 진압하려 했지만 윤보선 대통령의 반대로 어쩔 수 없었다는 미국 정부의 주장이다.
언론인 이상우는 1984년 펴낸 <제3공화국 외교비사>에서 미국이 "한국의 정치과정을 규정하는 단순한 요인의 하나가 아니라 한국의 운명 그 자체를 결정지어 온 배경"이라며, "해방 후 역대 한국정권의 흥망기에도 결정적인 작용을 해온" 미국의 역할을 취재기자의 눈으로 살펴본다.
다양하고 풍부한 취재자료를 이용해 긴박하게 펼쳐졌던 1961년 5월 16일 전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추적하고 있다. 첫째, 미국이 한국에서 어떤 형태의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보았지만 누가 언제 일으킬지는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둘째, 5월 16일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린(Marshall Green) 주한 미국 대리 대사와 매그루더(Cater B. Magruder) 주한 미군사령관이 장면 정부를 지지하며 쿠데타를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셋째, 장면 총리는 잠적해버리고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 진압을 반대하는 가운데 이한림 제1야전군사령관은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넷째, 5월 17일 아침 매그루더는 구체적인 쿠데타 진압 작전을 세우고 주한 미8군에 임전 태세를 갖추도록 했지만, 그날 밤 워싱턴으로부터 작전을 취소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한편, 워싱턴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케네디 (John F. Kennedy) 대통령을 비롯하여 국무부, 국방부, 중앙정보국 책임자들이 국가안보회의를 열어 쿠데타 주동자들의 정체와 그들의 목표를 궁금해하며, 특히 공산주의 활동에 관련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박정희와 김종필의 사상적 배경에 의혹을 품었다.
그러나 쿠데타 주동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반공 친미적"이라는 점을 파악하고, 쿠데타가 비합헌적이지만 미국 정부에 적대적 정권이 들어서지 않으리라고 판단했으며, 이미 한국의 대세가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해 쿠데타를 인정하고 말았다.
정치학자 손호철은 1991년 펴낸 <한국정치학의 새 구상>에서 "5.16쿠데타를 재조명"했다. 실바(Peer De Silva) 당시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장이 쿠데타 음모계획을 제보 받아 미국대사관과 한국정부에 알렸으나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아 쿠데타가 성공했다고 증언한 내용 등을 바탕으로 5.16쿠데타의 발발에 미국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다고 분석한다.
언론인 조갑제는 <월간 조선> 1991년 12월호에 '미국대통령 기밀문서 속의 박정희와 케네디'라는 글을 발표했다. 1980년대에 비밀 해제된 1960년대의 미국정부 기밀문서들을 바탕으로 미국이 5.16쿠데타 모의를 사전에 탐지하지는 못했지만 사후에 신속하게 대응한 사실을 보여준다.
미국이 쿠데타가 일어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장면 총리, 윤보선 대통령의 지도력에 회의를 갖고 "망해가는 정부"와 운명을 같이 하지 않겠다는 계산을 재빨리 내렸다고 주장한다.
정치학자 박명림은 1996년의 공저 <제2공화국과 한국민주주의>에서 '제2공화국 정치균열의 구조와 변화'라는 글을 통해 "미국의 소극적 방임 또는 무개입"이 5.16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었던 한 요인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국무부가 1996년 펴낸 외교문서집을 근거로 미국이 늦어도 1961년 4월 박정희와 이범석이 각각 주도하는 쿠데타 음모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박정희는 1960년 2월부터 쿠데타를 준비했고, 사월혁명 이후 수차례나 쿠데타를 기도했으며, 이러한 쿠데타 음모가 서울에서는 "널리 알려진 소문난 비밀"이었는데 미국이 이를 몰랐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박정희를 지속적으로 주시하고 추적하면서도 적극적으로 경고하거나 저지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언론인 권영기는 <월간 조선> 1996년 12월호에 '장도영, 쿠데타 음모 알고도 장면 총리에게 은폐'라는 글을 발표했다. 국무부가 1996년 펴낸 외교문서집, 실바의 1978년 회고록, 장면의 1966년 증언, 장도영의 1984년 회고록, 박정희의 1961년 증언, 김종필의 1986년 증언 등을 토대로 5월 16일 전후의 상황을 추적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 중앙정보국은 1961년 4월 장면 정부를 뒤엎으려는 2개의 쿠데타 음모가 추진되는 것을 파악했다. 하나는 박정희와 그의 추종자들이, 다른 하나는 이범석과 민족 청년단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특히 박정희의 쿠데타 음모는 한국군부와 학생 그리고 개혁가들의 지지를 받고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둘째, 장도영은 박정희의 쿠데타 모의를 훤히 알고 실바와 자주 만나 이에 대해 의논하는 한편, 장면에게는 고의로 쿠데타 정보를 은폐하고 그에 대한 수사를 방해했다. 셋째, 미국은 쿠데타가 일어난 다음날 주한미군사령관 지휘 하의 진압작전은 내정간섭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사태의 진전을 지켜보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사실상 쿠데타를 인정했다.
재야 사학자 김상구는 최근 2017년 12월 <5.16청문회>를 펴냈다. "누구나 알고 있고, 아무도 말리지 않았던 쿠데타"라는 부제가 붙은 760쪽의 방대한 저서다. 프롤로그에서 중앙정부국장을 지낸 덜레스(Allen W. Dulles)가 "내가 재임 중 중앙정보국의 해외활동에서 가장 성공한 것은 이 혁명(5.16쿠데타)"라고 말한 대목을 소개하며, "미 군부 정보기관의 지원 아래 5.16쿠데타가 진행되었고, 쿠데타 후 CIA, 미 국무성, 백악관이 승인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미군은 한국 현대사에 깊숙이 개입해왔다. 모스크바3상회의, 미소공동위원회,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 한국전쟁과 정전, 사월혁명과 민주당정권의 출범과 몰락 등은 대개 미군부의 뜻대로 진행되었다. 5.16쿠데타도 마찬가지다"라고 결론 내린다.
위에서 살펴보듯, 학자들과 언론인들이 비슷한 자료를 갖고도 조금씩 다른 주장이나 분석을 내놓았다. 대체로 학자들은 역사를 이론적 틀에 꿰어 맞추려 하기 때문에 숲을 보려는 측면이 강하고, 언론인들은 역사를 사건 중심으로 파헤치려 하기 때문에 나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크다고 할까. 필자는 국무부가 공개한 비밀 외교문서들을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5.16쿠데타와 미국을 역할'을 좀 더 깊이 파헤쳐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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