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해적들도 탐낸 ‘한국의 엘도라도’ 소리도를 아시나요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해적들도 탐낸 ‘한국의 엘도라도’ 소리도를 아시나요

2018년 6월 섬학교는 여수 앞바다 <연도(소리도)>

*7월 섬학교는 7(토)-8(일)일, 우주기지 안의 소행성 같은 섬들인 전남 고흥의 <나로도, 애도, 사양도>입니다. 곧 기사 올리겠습니다^^

해적이나 보물선은 외국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해적섬으로 유명했던 곳은 여수의 연도(소리도)입니다. 1592년 경 장서린이란 해적 두목과 부하 수백 명이 연도에 청기와 망루까지 지어놓고 해적질을 했었다고 전합니다. 해적섬답게 연도에는 유난히 숨겨진 보물 이야기가 많습니다. 보물 동굴 중 하나에는 후백제 왕 견훤의 사위이자 고려 건국공신인 순천의 호족 박영규가 엄청난 금덩어리를 숨겨두었다는 전설이 내려옵니다.

▲소리도등대에서 보이는 소룡단 풍경이 마치 액자 같다.Ⓒ섬학교

또 소리도등대 부근 솔팽이굴도 보물 동굴로 추정됩니다. 1627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선이 일본에서 황금을 싣고 인도네시아 식민지로 가던 중 해적선에 쫓기게 되자 연도 솔팽이굴에 급하게 보물을 숨겨 놓고 도망쳤다고 전해집니다. 그야말로 한국의 엘도라도입니다.

6월의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는 제72강으로 6월 2(토)-3(일)일, 여수의 해적섬이자 보물섬인 연도(소리도)로 떠납니다. 이제 해적은 자취 없고 보물은 행방이 묘연하지만 연도의 ‘진짜 보물’은 여전합니다. 망망대해 남태평양으로 이어지는 소리도등대의 광활한 바다 풍경과 섬의 해녀가 물질해서 차려주는 밥상이 그것입니다. 초여름 보물섬 연도로 보물 찾아 함께 떠나보시죠.

이번 여정은 배 시간 때문에 6월 1일(금) 밤 12시에 출발합니다.

▲남쪽 국경의 끝, 대항해시대 유럽의 상선들이 지나가던 소리도 앞바다Ⓒ섬학교

교장선생님으로부터 2018년 6월의 걷는 섬 연도에 대한 설명을 들어봅니다.

동인도회사가 황금을 숨겨둔 보물섬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보물 이야기는 늘 흥미진진하다. 최근에는 러일전쟁 당시 울릉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던 보물선 소식이 전해져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국내의 한 업체가 1905년 금화, 금괴 1천 상자를 싣고 울릉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러시아 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호'를 인양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인양이 된다면 보물선에 실린 보물의 가치는 무려 150조원이나 될 것으로 추산된다 하니 일확천금에 눈먼 업자는 물론 평범한 사람들의 환상까지 부추기기에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여수의 섬 연도에도 숨겨진 보물 이야기가 두 가지나 전해진다. 하나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선박이 숨겨뒀다는 보물 이야기다. 연도의 옛 이름은 소리도다. 연도의 ‘소리도 등대’ 부근 솔팽이굴은 보물 동굴로 불린다. 1627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선이 일본에서 황금을 싣고 인도네시아 식민지로 가던 중 해적선에 쫓기게 되자 솔팽이굴에 급하게 황금을 숨겨놓고 도망쳤다는 것이 이야기의 골자다. 선장은 네덜란드에 돌아가서는 황금의 위치를 성경책에 표시해 두었다는데 350년의 세월이 흐른 1972년 네덜란드계 미군이 한국 근무를 하게 됐다. 어느 날 그 미군이 카추사였던 소리도 출신 손연수씨에게 지도를 꺼내놓고 황금 이야기를 전했다 한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본 손연수씨는 그 섬이 자신의 고향인 소리도라 생각하고 제대 후 동굴탐사를 해봤으나 끝내 찾지는 못했다.

또 하나는 후백제 왕 견훤의 사위가 숨겨뒀다는 보물이다. 고려 건국공신이기도 한 순천(승주)의 호족 박영규는 서남해 제해권을 장악하고 해상무역을 독점해 부를 축적한 무역상이기도 했다. 당시 소리도는 박영규의 해상근거지였다. 그 박영규가 소리도의 어떤 동굴에 엄청난 금덩어리를 숨겨두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동굴이 어느 동굴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구체적인 인물정보까지 등장하고 해상무역으로 많은 부를 축적했을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동인도회사의 보물 이야기는 착오 때문에 와전된 것일 수도 있다. 손연수씨가 네덜란드계 미군이 지녔던 보물지도에서 봤다는 섬은 영어로 소지도(SOJIDO)로 표시되어 있었다 한다. 그런데 소지는도 실재하는 통영의 섬이다. 보물 지도상의 섬이 통영의 소지도일 가능성도 있다. 물론 위치를 보면 소리도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지금 우리가 그 보물의 위치를 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보물이 숨겨진 곳은 섬이다. 이 나라 섬들은 많은 섬들이 보물섬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섬으로의 여행은 보물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소리도에서는 어느 곳이나 그대로 화보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섬학교

서린이 큰 도둑놈 살던 청기와 망루

연도에 보물 이야기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모험영화의 단골 소재인 해적의 전설도 있다. 연도에 살던 해적은 시대와 이름까지도 알려져 있다. 1592년 경 장서린이란 해적 두목과 부하 수백 명이 연도(소리도) 필봉산 중턱에 청기와 망루를 지어놓고 해적질을 했었다고 한다. 관군에게 체포당하며 장서린의 해적생활은 끝이 났지만 아직도 소리도에서는 이곳을 “서린이 큰 도둑놈 집터‘라 부른다. 연도는 보물섬이자 해적섬이기도 했던 것이다. 섬은 그야말로 이야기 창고다. 연도 노인들은 대부분 어렸을 때 “장서린이가 큰 도둑이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자랐다. 지역의 향토사학자들이 장서린 유적을 발굴해 보기도 했지만 다른 유물은 발견하지 못하고 청기와 조각만 얻었다 한다.

여수 연도(鳶島)는 금오열도의 끝 섬이다. 현재 비렁길로 유명한 금오도의 이웃섬인데 본 이름은 소리도였다. 섬 중앙의 시루봉의 모습이 솔개가 날개를 펴고 있는 듯한 모습과 흡사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큰 날개짓으로 하늘을 제압할 듯 강력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런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연도’가 됐다. 굳이 소리도란 이쁜 이름을 연도로 바꾼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다시 한글 이름인 소리도로 환원시키는 것이 좋지 않을까.

▲저 길의 끝은 끝이 아니다. 해로의 시작이다.Ⓒ섬학교

옛날 제주도 가는 배가 들러서 쉬어갔다는 역포마을이 여객선이 드나드는 관문이다. 면적 6.81㎢, 해안선 길이 35.6㎞의 땅에 194가구 323명의 주민들이 살아가는데 주민들 다수는 큰 마을인 연도리에 거주한다. 전성기에는 400여 가구 1,800여 명까지 살았던 적도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부촌으로 이름난 섬이었다. 140여 척이나 되는 어선들이 있었지만 저인망 어업이 금지되면서 어업이 급속히 쇠퇴해 지금은 어선이 9척뿐이다.

섬의 이름이 연도로 바뀌었어도 여전히 소리도라는 이름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곳도 있다. 바로 소리도등대다. 등대는 섬의 남쪽에 최고봉인 필봉산(증봉, 231m) 자락에 있다. 어느 섬이나 등대가 위치해 있는 장소는 가장 풍광이 수려한 곳이다. 눈에 잘 띄는 곳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리도의 화려한 풍경들 또한 등대 부근에 집중되어 있다. 코끼리바위, 물개바위, 하늘담 뱀대가리 등 다양한 모양의 기암괴석들이 즐비하다. 코굴(콧구멍바위), 솔팽이굴 등 해식 동굴도 많고 동굴에 깃든 이야기들도 많다. 소리도등대도 소룡단과 대룡단 사이 절벽에 위치해 있다.

등대 마당에 서면 망망대해가 광대하게 펼쳐진다. 서쪽으로는 거문도 백도가 있지만 남쪽 바다로 쭉 가면 공해다. 그 너머는 남태평양. 등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세속의 온갖 때가 다 씻겨 나갈 것만 같다. 우리의 시야도 상상력도 무한대도 확장된다. 세계 최초의 등대는 BC 280년 지중해의 알렉산드리아항(港) 입구의 팔로스 섬에 건설된 팔로스등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높이 110m의 탑 모양이었는데 나무나 송진을 태워 불을 밝혔었다고 전해진다.

▲길 위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소리도등대 가는 길Ⓒ섬학교

용이 꿈틀대는 소리도등대

소리도등대는 1910년 10월 4일에 처음으로 불을 밝혔는데 아름다운 풍광과는 달리 등대의 시작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등대는 일제의 한반도와 대륙 침략의 앞길을 밝히는 제국의 등대로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1894-1895) 시기 일본의 참모총장과 체신대신의 주도로 1895년 6월부터 4개월에 걸쳐 조선 전 연안의 등대 건설 위치가 조사되고 러일전쟁을 앞두고 일제에 의해 등대 건설이 시작된다. 그렇게 제국주의 침략의 등대로 처음 탄생한 것이 1903년 6월 점등한 인천의 팔미도 등대 등이었다. 이후, 부도, 영도, 우도, 홍도, 소청도 거문도, 당사도, 소리도 등에 잇따라 등대가 건설된다. 1912년까지 등대 37기, 기타표지 133기 등 총 207기의 등대가 완성된다. 이 모든 것이 일본 제국주의 전함의 뱃길을 인도하기 위한 제국의 등대였다.

▲이 동굴에도 혹시 보물이 숨겨진 것이 아닐까?Ⓒ섬학교

소리도등대 또한 제국의 등대였으나 지금은 여수, 광양 인근으로 출입하는 선박이나 서해안에서 부산 쪽으로 운항하는 선박들의 앞길을 밝혀주는 생명의 등대가 되었다. 등대 건물은 백6각형의 콘크리트 구조인데 등대 내부에는 나선형의 철재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등탑은 9.2m에 불과할 정도로 낮다. 하지만 등대가 해수면 82m 절벽 위에 있어서 먼 바다에서도 잘 보인다. 지금도 밤이면 12초 간격으로 불빛을 발사하는데 불빛은 무려 42㎞ 거리까지 도달한다.

소리도 남단 필봉산 아래는 용의 형상이라고 믿어졌다. 섬에 용이 깃들어 있는 셈이다. 그래서 등대 인근의 지명들에는 용이 들어 있다. 대룡단은 용의 머리이고 소룡단은 용의 꼬리, 등대 자리가 용의 몸통에 해당된다고 한다. 하지만 암만 봐도 용의 모습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소룡단은 오히려 말머리 같이 느껴진다. 마을 서쪽에는 70여 m의 절벽이 있는데 여기에도 용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오랜 옛날 용 한 쌍이 살았다. 하지만 비가 오는 날 승천을 하다가 벼락을 맞고 말았다. 용이 떨어지면서 바위에 부딪혔는데 이때 바위가 갈라지면서 깎아지른 절벽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덕포마을에서 소리도등대로 가는 동백 숲길 또한 등대 풍경 못지않게 아름답다. 특히 겨울이면 붉게 피어오른 동백꽃들로 숲길은 등을 밝힌 듯 환하고 따스하다.

현대사에서 연도 주민들에게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두 개 있다. 한국 전쟁 중에 안도와 연도 사이 수로인 신강수로에서 있었던, 한국경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인 보도연맹사건이 그 하나다. 당시 무고한 여수 주민들 100여 명이 이 바다에서 죽임을 당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결과보고서에 따르면 여수의 민간인 학살은 당시 여수경찰서 소속 경찰과 여수지구CIC, 제15연대 헌병대 등이었다. 연도 바다는 뼈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또 하나는 씨프린스호 기름유출 사고다. 이 사고는 1995년 7월 23일 오후 4시쯤 소리도등대 서쪽 1.5km 해상에서 발생했는데 키프로스 국적 14만 4천t급 유조선 씨프린스호가 당시 호남정유(현 GS-Caltex)에 원유 130만 배럴을 공급하던 중 태풍 ‘페이’ 때문에 좌초되어 기관실이 폭발되고 다량의 벙커C유가 유출되어 연도 해역은 물론 남해안 바다를 오염시킨 대형사고였다. 이 사고는 초기 방제 미숙에 기상악화가 더해져 남해바다에 대형 재앙을 불러왔다. 이 사고로 유출된 기름은 전남 고흥과 경남 통영, 거제는 물론 부산 해운대 앞바다까지 오염시켰고, 이 사고 해역의 어민들은 헤아릴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이 사고로 황금어장이던 안도 해역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2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온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연도 바다는 여수 바다 어느 곳보다 해산물이 풍부한 편이다. 연도에는 현재 5명의 해녀가 있는데 연도 해녀가 차려내는 해녀밥상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해산물 요리만으로도 충분히 보물섬이다.

▲황홀한 소리도 해녀밥상Ⓒ섬학교

2018년 6월 2(토)-3(일)일, 섬학교 제72강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6월 2일(토)>
00:00 서울 출발(배 시간에 맞추기 위기 위해 6월 1일(금) 밤 12시, 즉 6월 2일(토) 새벽 0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6월 1일(금) 밤 11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교통체증과 중간탑승자 불편을 고려하여 출발시각 엄수하니 꼭 지켜주세요^^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72강 여는 모임
-여수 도착
-아침식사(여수항)
-여수 출항
-연도(소리도) 도착
-역포항∼연도리 걷기
-숙소 도착(다인실), 휴식
-연도 당숲 산책
-점심식사(섬밥상)
-소리도 걷기(6km)
연도리-덕포-소리도 등대-소룡단-등대-덕포-연도
-자유시간
-저녁식사 겸 뒤풀이(해녀밥상 : 생선회와 소라, 전복 등 해녀가 물질해서 차린 보물 같은 해산물 밥상)
-휴식 및 취침

<6월 3일(일)>
06: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어촌밥상)
-연도(소리도) 출항
-여수 도착
-오동도 탐방
-점심식사(여수항 장어탕)
-장보기(중앙선어시장)
14:00 서울 향발. 제72강 마무리모임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으로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6월의 섬학교 걷기 지도Ⓒ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풀숲에선 필히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가급적 줄이기)^^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섬학교'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이며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3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故)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