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적으로 '내곡동 사저 의혹'까지 불거진 시점이었으므로 선방(善防)했다는 이야기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 MB의 정당 후보가 '정직한 변화 누구입니까'라고, '정직'이란 단어가 적힌 현수막을 내거는 정도였으니, 선거 결과와는 상관없이 "네거티브 전략이 성공한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정부쪽에서도 수고 많이 했다. 원래 불법은 단속하게 돼있는데도 불구하고, 새삼스럽게 "SNS불법 단속 하겠다" 거듭 '협박'해댄 것도, 왜 그러는지 모른 사람 거의 없다.
특히 검찰은 무슨 기부금을 수사하겠다 했다가, 선거 끝나고 하겠다며 수상한 페인트 모션을 써 관심을 끌기도 했다. 방송통신위원회를 비롯해 검찰·경찰 다들 애썼다. 심지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그 수고 대열에 합류했다. SNS를 통한 '투표참여 독려'까지 제동을 걸어 주었다. 이 나라 민주주의 시계가 이렇게 까지 뒤돌아갔나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더러운 선거'를 위해 가장 수고한 것은 역시 언론이었다.
네거티브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들을 검증 없이 홍보하는데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이 지난 10일부터 10일간 분석한 자료를 보면, 방송 3사와 조중동이 이번 보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를 위해 얼마나 열과 성을 다 했는지 드러나 있다. 나경원 후보 쪽에서 제기한 '의혹'들은 여과 없이 그대로 내 보내고, 그 '의혹'에 대해 박원순 후보 쪽이 해명하는 내용을 방송하면서, 양쪽 후보가 공방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공방'은 공격과 방어이므로 "공방을 벌였다"는 보도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제기된 의혹은 검증절차를 거쳐야 했고 균형도 필요했다. 사후에라도 사실이 밝혀지면 "지난번 A후보가 제기한 △△의혹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고 따로 보도하는게 공정(公正)이다. 3방송은 열흘 동안 나 후보의 의혹 17건과 박 후보의 의혹 31건을 보도했다. 검증노력이나 추적보도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공정보도 훈련이 안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이게 군사독재시절에 뿌리를 둔 배냇짓이다. 누가 시킨 짓거리인지 다 아는 일이다.
조중동의 편파보도는 정도가 좀 더 심했다. 나 후보의 의혹 10건에 박 후보의 의혹은 55건이나 되었다. 특히 동아일보의 경우, 나 후보의 의혹 1건에, 박 후보의 의혹은 21건이나 써 제꼈다. 게다가 이들 신문은 박 후보에게 전가의 보도인 색깔까지 덧칠해 흠집 내는데 '사력'을 다했다. 아마도 종편 채널과 관련해서, '황금채널확보' 문제와 '직접광고영업' 문제가 미정인 상태라, 더욱 기를 썼을 것이다. 그야말로 더러운 선거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 때문에 이번 보선은 더욱 의미 있는 선거가 되었다.
이제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끝났다. 남은 건 무엇인가. 엄청난 크기의 회오리바람과 엄청나게 거센 태풍이 몰려올 것이다. 여건 야건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정치판을 삼켜 버릴지도 모른다. 그 한 복판에 안철수라는 이름이 있다. 필자가 '병 걸렸는지' 몰라도 그것은 냉엄한 현실이다. 그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정치판 근처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불과 닷새 정도의 정치활동만으로, 이 나라의 차기 대권후보로 수년간 1위의 자리를 고수해 오던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를 지지율에서 앞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안철수 현상이라는 태풍을 일으킨 건 사실 안철수 원장이 아니었다. 대다수 국민들의 갈증이었다. 더러운 선거판이 된 이번 보선을 자랑스런 선거로 이끌어 낸 것도, 그들의 갈증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소중한 것을 정치판에 깨우쳐 주었다. 더러움이나 비상식이나 지저분한 과거는 이제 버리자는 것이다. 바라는 것은 더럽지 않음이요, 새로움이요, 맑음이요, 깨끗함이다. 상식과 원칙과 건강함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이다. 이런 '타는 목마름'을 적셔줄 몇 모금의 생명수다. 그 갈증에 정치권은 대답을 해야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이번 재보선은 예사 재보선과는 성격이 판이해서, 결과를 놓고 정치권은 이해득실 계산과 활로 찾기에 고민을 거듭할 것이다. 특히 서울시장 보선에서 후보도 못낸 민주당은 고민의 깊이가 더 할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아도 선거전부터 당 안팎에서, 대통합이니, '50대50'이니, '접수-개혁'이니 하는 이야기가 줄곧 흘러나오고 있다. 구체적인 움직임도 감지된다. 그러나 분명히 할 게 있다. 지금 정치권이 가야할 길은, 공급자의 입장이나 현실적인 유불리를 따지기보다는, 수요자인 국민의 눈높이를 잣대삼고 걸어가는 게 바른 행로로 보인다.
공급자들끼리는 이런 저런 논의와 흥정이 있을 수 있겠으나, 지금 대다수 국민들의 기대는 분명하다. 낡은 틀의 기성 정치권에 대한 혐오감과 새로운 정치세력 의 출현에 대한 기대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 갈증을 해소해 주는 것이야말로 정치권의 책무다. 많은 사람들이 우선, 적어도 MB정권의 '잃어버린 5년'은 확실히 정리돼야 한다고 소원한다. 이런 이상스런 정권은, 더 이상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정치판을 새로 짜고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점점 더 힘을 얻어가는 것도 그 때문인 듯하다. 특히 무기력한 야권에 대한 안타까움도 간단치 않아 보인다. 새로 짜는 정치판은 지금껏 정치적 계기가 있을 때마다 그래 왔듯이, 지분을 정해 나눠먹기를 하고, 이합집산을 하는 모습이어서는 안 될 일이다. 잿밥에만 관심 있는 사람들 얼기설기 엮어놓고, 포장만 그럴듯하게 해서 내놓는 판이어서는 곤란하다. 저토록 갈망하는 국민들의 갈증을 해소해 줄 수도 없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리모델링 수준을 벗어 날 수 없을 것이다.
리모델링으로는 안 된다. 한번 바람에 날아 가버릴 수도 있다. 지금은 신축(新築)이 필요 한 때다. 다세대 주택이 아닌, 대다수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는 번듯한 새집이 나와야한다. 적지 않은 아픔도 있고 현실적으로 고통도 예상되지만, 그런 산고(産苦)를 겪고서라도, 이 나라 정치판 바뀌지 않으면 미래는 기대할 수 없다. 그만큼 잘못되어 있다.
보수·진보라는, 이른바 색깔에 대한 논란도 분명히 하고 갈 필요가 있다. 대통령부터 정체불명의 해괴한 보수의 의자에 앉아, 자기가 정통보수라고 큰 소리치고 있는 게 이 나라 자칭 보수 우파들이다. 그 사이비 보수에 맞서있는 이른바 진보 진영도, 진정한 의미의 진보모습은 아니다. 보수와 별로 차별화돼있지도 않으면서, 진보라고 울타리 치고 있는 모양새도 보인다. 어쭙지않은 보수·진보 논리에 매몰되지 말고, 옳고 그름, 상식과 비상식이라도 분명히 가려내는 건강한 정치세력을 기대해본다. 편 갈라 배타적이익이나 추구하는 정치꾼들 집합소가 되지 말라는 소리다.
새로운 정치판을 이야기할 때마다, 입으로만 개혁이니 혁신이니 하면서, 본질을 비껴가는 행태가 되풀이되지 말았으면 하는 희망도 있다. 특히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개혁세력을 자처하던, 이른바 386들의 상당수가 '단물'을 찾아 '기생'해가며, 이 나라 야당에 끼친 폐해를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지난 3일 야권의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분명한 두 갈래의 흐름이 보였다. 40대까지는 박원순 후보를 지지 했고, 50대 이상은 박영선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젊은 층이 지지한 박원순 후보는, 고령층이 지지한 박영선 후보보다 나이가 네 살이나 많다. 나이가 많다 해서 덜 개혁적이라는 공식은 허구에 불과하다. '386=개혁세력'이란 잘못된 도식은 이젠 버려야 한다. 번듯한 새집을 짓되, '단물'만을 찾아다니는 사이비 개혁·혁신세력을 경계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치르고도 건강을 되찾지 못한다면 이 나라는 희망 없는 나라가 될지도 모른다. 절대다수 국민들이 정치권을 주목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정치 쪽에서 맑은 물이 솟아 윗물이 되고, 그 윗물이 아래로 흘러 세상 더러운 것들 시나브로 씻어내려 보내는, 그런 꿈을 꿔본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