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개국, 한 해에 외국인만 100만명 이상이 꾸준히 찾는 세계적 관광지가 된 남이섬. 남이섬의 옛모습은 어땠을까.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과 같은 청정자연을 간직한 생태문화관광지로 발돋움 할 수 있었을까. 모두가 먹고 살기 바빴던 1965년, 대한민국에도 관광이라는 용어가 낯설었던 시절이 있었다. 북한강 상류에 모래톱처럼 방치된 섬은 강물만 차오르면 한해에도 몇 번씩 고립돼 무성한 수초에 쌓여있던 황무지였다. 수재 민병도 선생이 남이섬에 처음 나무를 심고 가꾸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과 같이 세계적 관광지가 되기까지 이야기를 21일 남이섬을 찾은 이진형 옹(1967~1982년 남이섬 초대 관리소장 역임)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남이섬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나.
“섬에 왜 이렇게 나무가 많은지 아세요? 섬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건 1965년 3월이었을거야. 정부의 외압에 맞서 한국은행 총재직을 사퇴한 민병도 선생이 관광회사를 설립하고자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왜 황무지를 사느냐며 만류했다고 하더라고. 그래도 민 선생은 “국민들의 문화쉼터가 필요한 날이 올 것이오”라며 그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불모의 땅에 주민들과 합심하여 나무를 심기 시작했지. 퍽퍽한 수십만 평의 땅을 몇 십명의 직원들 노력으로 숲 가꾸기가 어디 쉽겠어? 좀 더 체계적인 개발을 위해 1966년 12월 ‘경춘관광개발’이라는 회사가 설립됐지. 그때 나도 회사의 일원으로서, 함께 숲을 조성했어.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땀흘려 일했었지. 1960년대 변변한 관광휴양지가 없던 때, 남이섬은 주한 외국인 공관원을 위한 9홀 골프장과 휴양시설을 갖춘 전용 리조트로 조성됐었어. 그들이 휴가철에 일본, 동남아로 출국하여 돈을 쓰고 오는 것을 방지하여 외화의 국외유출을 줄이고, 건전한 국민관광지를 육성해 달라는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권유에 따라 주식회사 형태로 남이섬이 운영된 것이지“
-숲 길에 나무들의 일정한 간격을 보면 계획적인 개발이 이뤄졌던 것 같다. 어떻게 시작됐나.
“남이섬 최초의 사업계획은 당시 한국은행 고문으로 계시던 민병갈(칼 페리스 밀러·천리포수목원 설립자) 선생을 통해 미국 대외 원조처 USOM(The 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에서 설계를 맡아 사업을 개시했다. 남이섬은 1968년 4월 1일 사업자등록을 발부 받고 개장했는데, 아까 얘기했듯이 그 당시 정부가 일반 국민들에게도 개방하자는 제안을 했었지. 또 개장 초기에는 지금의 남이섬의 상징이 된 메타세쿼이아길이 없었고, 이태리 포플러 나무가 식재 되어 있었어. 이후에 메타세쿼이아, 잣나무, 전나무 등으로 현재 심어져 있는 나무로 교체했지. 나무를 심을 땐 유명한 산림학자인 김이만 박사가 조언해줬고, 1974~75년 경 홍릉의 임업시험장에서 4~5년 짜리 묘목(120~150cm)을 가져와 식재했어. 또한 호텔정관루 건물은 광화문 앞 옛 우정국 건물을 해체하여 정부가 매각한 것을 매입하여 들여왔다"
-개발 당시 남이섬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나.
“한겨울 섬을 둘러싼 강물은 장작을 가득 실은 트럭이 지나다닐 정도로 꽁꽁 얼어붙었었어. 혹한의 시베리아와 비교할 정도로 추웠었지. 남이섬에서 간혹가다가 잠이라도 자려고하면 얼음이 얼어 팽창해 균열이 가면서 산등성이 마다 긴 굉음이 울려 퍼지곤 했지. 간혹 여름에 홍수가 날 때면 북한강 물이 황토색으로 변하고 남이섬을 집어 삼킬 듯 상류에서 하류로 세차게 흘러갈 때 돼지고, 황소고 다 떠내려갔었어. 가뭄이 심할 때는 뒷강에 수위가 낮아져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 건너갈 때도 있었지. 지금 남이섬에서는 상상도 못할 모습이지”
-기억나는 옛 남이섬 모습이 어떤가.
“지금 다니는 배가 10척이라고 했나? 세월이란 참… 주마간산(走馬看山)과 같아. 아무래도 그 당시에 남이섬이 지리적 특성상 섬이다보니 조성초기에는 배를 건조하는게 급선무였지. 첫 선박은 인천조선에서 건조한 둔패호와 제1경춘호(現 남이1호)였어. 혹시 그거 아나. 남이섬은 한국 최초의 맥주 마시기 대회(크라운맥주), 밤줍기 대회를 개최한 곳이야. 그 당시에는 엄청난 화제였지. 또 1975년엔 강원도 국민관광지 등록 3호로 등록되어 경사 난적도 있었어. 지금 남이섬 호텔정관루 강가별장은 예전에는 알파벳으로 별장 이름이 붙여졌는데, E(에델바이스)별장은 배우 신성일 씨가 1년간 장기 계약 사용을, F(후리지아)별장은 가수 조영남씨가 아주 오랫동안 사용했었어. 호텔정관루 공심원 쪽이었나, 그 부근에 박혀있는 보도블록은 엄청 오래된 거야. 70년대 초 여의도 비행장을 폐쇄하면서 나온 보도블록을 공수받아 남이섬에 심었지. 지금은 비행장이 아니라 공원이지 아마? 그때는 그만큼 보도블록 하나도 귀했던 시절이었어. 잘 알겠지만, 남이섬이란 이름은 아주 오래전부터 불려온 이름이야. 지금은 많이 알려졌지만, 남이섬이라는 이름은 남이장군의 묘가 있다는 구전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야. 무덤을 둘러싼 돌무더기(호박돌)는 남이장군묘 봉분화에 쓰였어. 노산 이은상 선생이 추모의 글을 썼고, 일중 김충현 선생이 글씨를 썼지. 자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잘 알지? 그의 저서 천우기행(穿牛紀行) 및 산수심원기(汕水尋源記)에 따르면 민간전승 내용과 함께 아주 오래전부터 남이섬을 남이섬(南怡苫) 및 남이서(南怡嶼)로 부른 기록을 찾아볼 수 있을거야. 어쩌면 남이섬은 애초에 완전한 섬이 될 운명이었을 지도 모르지.(웃음)”
-마지막으로 남이섬에 바라는 점이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남이섬은 내 마음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야. 남이섬의 진정한 뿌리는 처음 나무를 심고 가꿔온 우리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올곧은 민병도 선생의 공이 가장 컸지. 지금도 비지땀 흘려 가꾸고 있는 직원들의 공이 없었다면 지금의 섬도 없었겠지.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남이섬만큼은 지금 이대로 오랫동안 자연을 가꾸고 나무를 사랑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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