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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와 인조의 아픈 역사, 되풀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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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와 인조의 아픈 역사, 되풀이 되는가

[오홍근의 '그레샴 법칙의 나라']<41> MB 사저 논란과 촛불 트라우마

이 땅의 역대 임금 가운데 경호와 안전을 가장 염려한 왕은 조선조 제14대 선조였다. 물론 제22대 정조 임금도 그러했으나, 그는 일부 정적들로부터의 안위를 걱정한 것이지, 선조처럼 불특정 다수 백성들로부터의 위협은 신경쓰지 않았다. 선조는 남달랐다. 특히 임진왜란 때 의주로 몽진해 가던 길에 겪었던 참담한 일들은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1592년 4월 30일 선조가 도성을 버리는 순간, 분노한 백성들은 경복궁과 창경궁에 불을 질렀다. 장졸들은 대부분 도망치고, 따르는 호위병은 1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민심은 왕에게서 멀리멀리 떠나 있었다. 왕은 개성에서 백성들로부터 돌팔매질도 당했다. 평양에서는 중전이 타고 있는 말을 백성들이 때리기도 하였다.

숙천에서는 누군가 관아 담벽에 '국왕 일행이 강계로 가지 않고 의주로 간다'는 낙서를 해 놓았다. 선조 행방을 일본군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다. 함경도에서는 귀양와 있던 하급관리가 임해군과 순화군 등 두 왕자를 사로잡아 일본군에 넘기기까지 하였다. 백성들은 그렇게 화가 나 있었다. 선조는 한양이 수복되고 일본군이 남하한 뒤에도, 의주에서 돌아가려하지 않았다. '성중지변(城中之變:백성들이 일으키는 변란)'을 두려워했다고 전해진다.
▲ 민주당이 공개한 철거 전 이명박 대통령 사저 터 한정식 집 '수양' 전경 ⓒ민주당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소동에서 선조의 트라우마를 떠 올리는 것은 '과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선 MB는, 고향이나 전에 살던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 나라 최초의 대통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분명히 예삿일은 아니다. 더구나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과정이 별스러운 것이고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살집을 마련하면서, 남 몰래 아들 명의로 땅을 사 들였다가, 세상에 알려지자 "명의를 바꾸겠다"하는 것도 그렇고, 아들로부터 그 땅을 다시 사 등기를 이전하면서, 아버지가 취득세와 등록세를 또 내겠다는 것 또한 그렇다.

애당초부터 그런 절차를 거칠 심산이었는지, 상당히 옹색해 보인다. 자초지종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쪽의 설명도 땅 투기는 아니고, 순전히 '경호와 안전' 문제 때문에 그렇다고 했다. 대통령이 전에 살던 논현동 집의 대지는 300평이나 된다. 결코 작은 평수가 아니다. 그 300평에는 퇴임 대통령의 '안전'을 보장할 만한 경호시설이 들어갈 수 없다는 이야기다.

층수를 다소 조정한다든지, 약간의 가림막을 활용한다든지 하는 정도면 되지 않을까 하는게 우리 같은 민초들의 생각이지만, 자기들 내부에서는 '어리석은 소견'으로 결론이 난 모양이다. 하여간 내곡동의 MB 사저는 우리보기에도 퇴임 대통령의 안전이 특별히 강조된 주택이 될것 같다. 전체 부지 788평 가운데 MB가 살집이 차지하는 땅은 140평이고, 경호시설 부지는 648평으로 잡혔다. 경호시설 부지가 사저 부지의 4.6배나 된다. 그만큼 경호를 중시하는 집이다.

MB도 현장에 와 집터를 둘러보았다고 했다. 대지가 300평이나 되는데도 논현동 집에살것을 포기한 것이나, 내곡동 집에서 유별나게 경호쪽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3년 전의 '촛불 시위 충격' 때문일 것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석달여 동안 이 나라 국민 300만 명이 촛불을 켜들고 태풍처럼 휘몰아친 시위였다. 옛날로 치자면 그게 바로 선조가 겁을 낸 '성중지변'이다. 그 엄청난 인파가 한 목소리로 함성을 질러대며 규탄한 것은 MB 한 사람이었다.

무서웠을 것이다. 대통령은 두 번이나 "잘못했다"며 무릎을 꿇었다. 선조와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MB에게 촛불 시위는 분명 작지 않은 트라우마가 되어 뇌리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내곡동 MB사저는 그래서 '경호 최우선주의'의 주택이 될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내곡동 사저는 정문쪽만 길에 면해 있고, 나머지 주변은 모두 산이다. 전부가 군사보호 구역이라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5분만 가면 성남 비행장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다소 이론도 있으나 선조는 조선왕조 임금들 가운데 가장 무능한 왕으로 꼽힌다. 고종도 그렇다고 하나, 그 시대적 배경을 참작해야 한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선조의 무능은 콤플렉스에서 비롯된다. 그는 조선왕조에서, 서자 출신으로 보위에 오른 첫 번째 왕이었다. 그게 콤플렉스였다. 자신의 정통성이 문제돼, 언제 왕위에서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줄곧 시달렸다. 재위기간 내내 자신의 왕권에 도전할 요인들을 차단하고 제거했다. 왜란 중에도 장수와 의병장들이 전투에서 이기는 것을 경계하고 두려워한 왕이었다.

전투에서 계속 이겨 백성들의 신망이 높아지자, 이순신을 파직하고 죄를 뒤집어 씌워, 고문까지한 임금이었다. 의병장 김덕령에게 역적 누명을 안겨 죽인 것도 그런 콤플렉스에서 빚어진 일이었다. 이런 콤플렉스는 해괴한 조치들과 함께 국정 난맥으로 이어졌다. 정세 판단 능력도 없었다. 임진왜란 2년전,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 실정을 알아오라했다. 일행 4명중 3명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경고했으나, 왕이 총애하는 동인 김성일만은 "풍신수길은 절대 쳐들어오지 못한다"고 보고했다. 그 말 믿었다가 참화를 당했다.

성현(成俔)이 피난길의 임금에게 평양에서 작심하고 쓴소리를 한다. 국정 수행상의 잘못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사치스러운 토목공사 ▲왕실측근의 침탈행위 ▲외교실패 ▲공평치 못한 상과 벌 ▲막혀버린 언로(言路) ▲가혹한 세금 등이 문제라고 조목조목 지적했다. 절묘하게도 오늘의 MB 정권 폐해를 그대로 옮겨놓은것 같다. 선조는 고치지 않았다. 그때 뿐이었다.

실정(失政)과 내란으로 권위를 잃은 선조는 전란극복의 공을 모두 명(明)나라에 돌렸다. '재조지은(再造之恩)'이란 말을 차용해 왔다. '망해가던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워준 명나라의 은혜'라는 뜻이었다. 자신이 의주까지 몽진해 간 것은 '명나라의 군대를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이었고, 또 자신은 '명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나라를 구한 구국의 임금'이라는 논리를 펴고자 했다. 그렇게라도 해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려 했다. 틈만 나면 명나라 군대 막사에 찾아가 조선군을 폄훼하면서, 일개 하사관 정도의 명군에게도, 격에 맞지 않고 비굴하게 보일 정도로 극진한 예의를 표했다. 열심히 '재조지은'을 외쳐댔다.

MB에게도 선조처럼 콤플렉스가 따라다니는 것으로 보인다. '촛불 트라우마'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대선에서 500만 표나 되는 큰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총 정원 299명 중 170여 명이나 되는 국회의원들을 거느린 자랑스러움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TV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전국민에게 두 번이나 사과했다. 그러면서 그는 대통령으로서의 권위가 사정없이 꺾였다고 느꼈을 것이다. '권위를 상실한 대통령'이란 콤플렉스가 그를 휘감았을것이다. 상습 위장 전입이라는 범법행위와 병역 미필을 포함한 도덕적인 흠결도 작지 않은 콤플렉스로 자리잡았을 것이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는, 묻지도 않은 터무니없는 말을 해댄 것도 다 콤플렉스에서 연유했을 것이다. 그는 '촛불 트라우마'와 '권위상실 대통령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촛불 시위자들이 반성하지 않는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촛불 시위=유죄'를 만들어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했다. 특별히 신영철 대법관이 서울 중앙지방법원장이었을 때, 촛불 시위자들을 '죄인'만들기 위해 눈물겨운 노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은 우리가 다 아는바다. 그는 그 공로로 대법관이 되었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그러나 집시법의 야간 옥외집회금지 조항과 전기통신 기본법의 표현의 자유 제한 조항이 헌법재판소에서 잇따라 헌법 불합치와 위헌 결정을 받는다. 촛불 시위는 아무 죄 없는 당당한 의사표시 행위였음이 밝혀진 것이었다. 그러나 촛불시위의 도화선이 되었던 광우병 보도관련 MBC PD들에게는 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대법원에서는 무죄가 확정되었는데도, 오히려 MBC 회사 내에서 사소한 트집을 잡아, 어처구니없게도 온 신문에 대문짝만 사과광고를 내고, 관련 PD들에게 감봉·정직의 중징계 처분을 내렸다.

<다소의 수사적(修辭的) 과장이 있더라도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아 보도내용이 진실에 합치된다면 그 보도의 진실성은 인정된다>는 대법원의 '일관된 생각'은 무시되었다. 사실은 그게 어떻게 해서든지 '촛불시위는 잘못된 것'이라고 못박고, '권위를 상실한 대통령'이라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보려는 MB와 그 추종자들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코미디였다. 다 안다. 최고 통치자의 콤플렉스는 터무니없는 외고집을 부르고, 이는 국가와 국민을 불행하게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를 파탄내면서 추악한 형태로 언론을 장악했다. MB 스스로도 잘 알 것이다. 서민경제도 남북관계도 모두 파탄냈다. 전임자와는 무조건 반대의 길로 가고자하는 엇나간 외고집도 발원지(發源地)는 콤플렉스라고 보는 의견들이 지배적이다. 콤플렉스와 외고집은 그래서 심각한 국면을 유발할 수 있다. 특히 균형감각을 상실한 MB의 편향외교는 선조·인조의 외곬 외교와 너무 많이 닮았다. 선조가 시작한 '재조지은' 이데올로기는, 광해군의 균형외교와는 다른 길은 가고자 하는 인조에 의해, 기어이 일대 살육과 치욕으로 이어졌다.

후금(後金)에 이은 청(淸)나라는 말하자면 '떠오르는 해'였다. 그런데도 선조처럼 인조는 '지는 해'인 명나라만을 죽어라고 섬겼다. '괘씸죄'에서 비롯된 두 차례의 호란(胡亂) 참극이 일어났다. 이 나라 백성 수십만명이 살해되거나 청나라로 끌려갔다. 영화 '최종병기 활'은 바로 그 무렵의 이야기다. 필경 삼전도(三田渡)에서 인조는 청의 태종에게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세번 무릎을 꿇되, 한번 꿇을 때마다 두손을 땅에 대고 세 번씩 머리가 땅에 닿게하는 항복의식)의 예를 올렸다.

지금 미국이 명나라에 해당하고 중국은 청나라로 보아야한다고 단정해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복잡한 국제정세를 헤쳐가며 국익을 확보하려면, 어떤 한 나라만을 편향되게, 그것도 '지는 해'를, 밑지면서까지 열심히 추종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전 세계로 번지고 있는 '반(反) 월가 시위'가 시작된 바로 그 미국에서, 폼내며 의회 연설 한번하는 대신, 우리가 한미 FTA에서 적지않은 손해를 보게되었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실제로 MB가 삼전도에서 무릎 꿇고 절하는 일은 없겠지만, 못지않은 피해를 자초하고 있는것 같아 안타깝다. 안보에서도 그렇고 경제에서도 그렇다.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교역 규모와 지정학적 측면을 보더라도 지금은 중국을 좀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소는 미국산 사료를 먹기 때문에, 한국 쇠고기는 진짜 한국산이 아니라거나, 대통령은 뼈 속 깊이 친미이고 친일이라는 철없는 소리도 그렇게 분별없이 해대서는 안된다.

형태는 다를지라도, 다시 또 선조와 인조의 아픈 역사가 되풀이 되는건 아닌지 걱정이다. 뒤 늦었을망정 MB가 '올바름'을 잣대 삼고, 트라우마와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를 소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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