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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강 바라보며, 임진왜란 영웅들을 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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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강 바라보며, 임진왜란 영웅들을 기리다

2018년 5월 고을학교는 <금산고을>

프로그램 마감됐습니다^^

2018년 5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55강은 충남 <금산고을>입니다. 임진왜란 때 ‘이치대첩’과 ‘금산성전투’가 있었던 금산을 찾아 순절한 영령들의 발자취와 금산 지역을 흐르는 금강의 다른 이름인 적벽강 변의 아름다운 유적들을 둘러볼 예정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금강의 또 다른 이름 적벽강. 전북 장수군 수분리 뜬봉샘에서 발원한 이 강은 전북 무주와 진안을 거쳐 충북과 충남 금산고을을 적시며 흐른다.Ⓒ금산군

고을학교 제55강은 2018년 5월 27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정시 출발합니다. 행락철 교통체증으로 일정차질이 염려되는데다 중간정류장 탑승자들의 불편도 감안하여 내린 결정이오니 양지하시고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55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추부IC-(조헌사당/수심대)-진산향교-(이치대첩지/권율장군이치대첩비)-백령성-(보석사/의병승장비-의선각)-개삼터-칠백의총-금산향교-고경명선생비-점심식사 겸 뒤풀이–청풍사-귀암사-적벽강-권충민공순절비-천내리용호석-용강서원-서울의 순입니다.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수정될 수 있습니다.

▲<금산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55강 답사지인 <금산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산이 지극히 높은" 고을

금산(錦山)은 동남쪽으로는 백두대간이, 중심부로는 금남정맥의 지류인 성치지맥이 지나가고 있어 충남의 최고봉 산지를 이루고 있는데 이를 반영이나 하듯 금산의 지형을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는 "산이 지극히 높아서 들어갈수록 점점 그윽하고 깊다"라고 표현하였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산이 지극히 높다"라고 하였습니다.

백두대간 상의 영취산에서 주맥을 버리고 서쪽으로 뻗어 나온 겹침 산줄기인 금남호남정맥이 장수의 장안산과 팔공산, 진안의 마이산을 거쳐 주화산에 이르러 남으로는 호남정맥으로, 북으로는 금남정맥으로 갈라집니다.

북으로 향한 금남정맥은 운장산에서 크게 솟았다가 장군봉과 태평봉수대를 지나 769봉에서 금산을 향해 오른쪽으로 뻗는데 이 산줄기를 성치지맥이라 하며 성봉, 성치산, 봉화산, 성덕봉, 덕기봉을 차례로 일구고 소사봉에서 금강으로 숨어듭니다.

금산의 산줄기는 동쪽으로는 천태산, 월영산, 성주산, 양각산이 충북과, 서쪽으로는 대둔산, 오대산, 선야봉이 전북·충남과, 남쪽으로는 기봉, 갈선산, 수로봉, 덕기봉, 갈미봉, 선봉이 무주·진안과, 북쪽으로는 안평산, 만인산, 지봉산이 대전·옥천과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칠백의총은 임진왜란(1592) 당시 1만 5천의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700 의승병들의 유해를 모신 호국영령의 성지이다.Ⓒ금산군

금산의 5대 고개, 5대 하천

이처럼 사방이 산줄기로 둘러싸인 분지형의 금산에서 밖으로 통하는 길목에는 크고 작은 고개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대전을 넘나들던 태봉재, 금산이 전북에 속하였을 때 중요한 길목이었던 배티재, 무주로 가는 지삼터, 용담으로 이어지는 솔티재, 진안으로 가는 구석리 고개는 금산의 5대 고개입니다.

금산의 물줄기는 옥천으로 가는 서화천, 영동으로 가는 천내강, 서대전으로 흐르는 유등천, 논산으로 통하는 벌곡천, 완주로 빠지는 장산천이 금산의 5대 하천으로 꼽히며 모두 금강으로 흘러듭니다. 이들 중에 금강 지류를 형성하고 있는 천내강은 수량이 풍부하여 금강의 젖줄이라 일컬을 정도이고, 금산 지역에 발달해 있는 분지들은 거의가 천내강이 합류하는 봉황천을 끼고 형성되었습니다.

금산의 모든 물줄기를 받아 안고 서해로 흐르는 금강은 전북 장수군 수분리 뜬봉샘에서 발원하여 전북 무주와 진안을 거쳐 충북과 충남을 적시며 흐릅니다. 충남 금산의 적벽을 흐르면서는 ‘적벽강’으로, 충남 부여의 부소산을 흐르면서는 ‘백마강’으로 달리 부르기도 하며, 충남 서천의 금강하구언에서 서해로 잠길 때까지 장장 402km의 길고 큰 물줄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금산은 백제시대는 진내군·진내을군, 신라 경덕왕 때는 진예군, 고려시대는 진예현으로 되었다가 1305년 금주군으로 승격되고, 부리현·청거현·무풍현·진동현의 5현을 소속시켜 지금주사(知錦州事)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태종 13) 금주군을 금산군으로 개칭하였고 1896년 13도 실시에 따라 충청남도 공주부의 금산군과 진산군을 전라북도로 편입하였습니다. 1914년 부(府) 폐합으로 진산군을 병합하여 현재의 금산군으로 하였으며 196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전라북도에서 충청남도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한산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3대 대첩의 하나였던 이치대첩의 현장. 조선의 곡창 호남을 지킨 전투다.Ⓒ금산군

읍치구역은 금산과 진산

금산 지역에는 금산과 진산에 읍치구역이 있었습니다.

백령성(栢嶺城)은 금산군의 외곽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서쪽을 제외한 동·남·북쪽은 거의 허물어졌습니다. 성내에서는 백제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 등이 발견되었고 산봉우리에는 봉수대가 있어 진락산의 봉수와 서로 교신하였습니다. 특히 견훤이 완산에 도읍을 정하고 도읍 방어를 위해 이 산성의 아래에 있는 남이면 대양리에 경양현을 설치하고 백령성을 다시 고쳐 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금산향교는 조선 초기에 창건되어 금산읍 하옥리 백학동에 있었으나 1684년(숙종 10)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짓고, 그 후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으며 현재 대성전과 동무, 서무, 명륜당과 동재, 서재 그리고 내삼문, 외삼문 등이 남아 있습니다.

진산향교도 조선 초에 창건되어 진산면 읍내리(현재의 진산중학교 자리)에 있었으나 1755년(영조 31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었으며 대성전, 명륜당, 내삼문, 외삼문, 전교실 등이 남아 있습니다.

용강서원(龍江書院)은 1716년(숙종 42년) 금강 상류인 용강 변에 창건되었습니다. 창건 당시에는 송시열, 송준길, 유계 세 분만 배향하였으나 18세기 말에 김원행, 송명흠을 추가로 배향하였습니다.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헐린 것을 1910년 지역 유림들이 헐린 목재로 용강서당을 지어 금산 지역의 유일한 서원 건물로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송명흠(宋明欽)은 자는 회가(晦可), 호는 역천(櫟泉), 본관은 은진이며 송준길의 후손으로, 천거로 충청도도사,지평, 장령, 서연관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사화를 피하여 제원면 용화리 용강서원에서 성리학을 강론하였습니다.

김원행(金元行)은 자는 백춘(伯春), 호는 미호(渼湖), 본관은 안동, 대사성 김창협의 손자입니다. 1719년(숙종 45) 진사가 되었으나 1722년 신임사화 때 종조 김창집이 4대신의 한 사람으로 사사되고 일가가 모두 유배되자 어머니의 배소(配所)를 따라 금산에 와서 용강서원에서 유생들을 교육하여 명성이 높았습니다.

▲신비의 영약 금산인삼의 시배지, 개삼터Ⓒ금산군


이치대첩과 금산성전투

금산 지역에는 임진왜란 때 ‘이치대첩’과 ‘금산성전투’라는 두 번의 큰 전투가 있었습니다.

이치대첩(梨峙大捷)은 한산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호남을 장악하고자 했던 왜적의 침략에 맞서 호남의 곡창을 지켜낸 3대 대첩의 하나입니다. 군량미의 현지보급을 꾀하고자 했던 왜군이 호남곡창을 공략하고자 전주로 진군하는 것을 권율 장군이 동복현감 황진과 함께 1,500의 관군과 의병으로 배티재[梨峙]에서 목책을 세우고 화살과 돌 등 무기를 확보하며 진을 치고 기다렸다가 2만의 왜적을 격퇴시킨 전투입니다. 이치는 순우리말 '배티재'로, 대둔산 중허리를 넘어 전북 완주군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권율장군이치대첩비는 이치대첩을 승리로 이끈 권율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1866년 금성면 상가리에 이치대첩비와 대첩사(大捷祠)를 세웠으나 1944년 6월 일제가 항일유적 말살정책으로 폭파하여 그 파편은 진산면 사무소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1963년 대첩에 참여한 후손과 지역 유지가 지금의 장소에 비석을 건립하였고 1991년부터 성역화사업으로 사당, 비각, 내삼문, 외삼문, 담장을 건립하였습니다.

권충민공순절비는 권율의 사촌형인 금산군수 권종(權悰)이 순절한 곳임을 새긴 비입니다. 그는 1592년 6월 24일 영동을 거쳐 금산으로 쳐들어오는 일본군을 막기 위해 제원찰방 이극경과 함께 갯 터에 진을 치고 천내강을 건너오는 왜군과 싸우다가 아들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습니다. 이승보가 비문을 짓고 11세손 정호가 글씨를 써서 1878년(고종 15) 유허비를 세웠습니다.

임진왜란은 조선의 전국토를 황폐화시키고 수많은 의병과 승병, 관군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구국충절의 전쟁영웅들을 많이 탄생시켰습니다. 선비로 하여금 칼을 들게 했고 살생을 금하는 승려들까지 창검을 들었는데 금산성전투에서 순절한 영웅은 의병장 조헌과 고경명, 의승장 영규대사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제1차 금산성전투는 1592년(선조 25) 7월 9일부터 10일까지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의병과 곽영의 관군이 연합하여 왜군과 금산에서 싸운 전투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은 7,000의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을 위해 서울을 향하다가 여산에 이르렀을 때 왜군이 전라도로 침입해 들어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당초 계획을 바꾸어 왜군을 물리친 후 북상하기로 하고, 진산에 진을 치고 있는 전라도방어사 곽영과 왜군을 관군·의병의 연합작전으로 공격하자고 합의하였습니다.

마침내 임진년 7월 9일부터 10일까지 이틀에 걸쳐 의병장 고경명이 7,000 의병을 이끌고 전라도방어사 곽영의 관군과 합세하여 금산성을 탈환하고자 했으나 관군과 의병의 연합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고경명은 금산 눈벌[臥隱坪]에서 전사하였습니다.

고경명선생비는 임진왜란 때 고경명이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다 순절한 사실을 새긴 비입니다. 효종 때 금산 군수 여필관이 비문을 지어 순절한 건너편 산기슭에 순절비를 세웠는데, 1940년 일본 경찰의 만행으로 비가 파괴되었으나 목조비각을 세워 비석의 파편을 비각 안에 정리하였고, 1952년에는 후손들이 여필관의 비문을 다시 새겨 석조비각에 세웠습니다.

고경명은 1533년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장흥이고, 자 이순(而順), 호 제봉(霽峰), 시호 충렬입니다. 1552년(명종 7) 진사, 1552년(명종 8)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공조좌랑, 전적, 정언을 거쳐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 1591년 동래부사로 있다가 서인이 제거될 때 파직되어 낙향하였습니다. 이듬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병장으로 금산성전투에서 순절합니다. 사후 그의 공적을 기려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광주의 표충사, 금산의 성곡서원·종용사, 순창의 화산서원에 배향되었습니다.

▲영규대사가 주석하였고 그 유적이 남아 있는 보석사(寶石寺)에는 천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서 있다.Ⓒ금산군

조헌과 영규대사

제2차 금산성전투는 의병장 조헌이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병과 합세해 청주성을 탈환하지만 충청도순찰사 윤국형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 해산당하고 불과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 연곤평(延崑坪)으로 가서 영규대사의 승병 600명과 합류해 총 1,300명의 군사가 8월 18일 전라도로 진격하던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왜군과 벌인 전투로 모두 전사하였습니다.

금산에서 왜군이 퇴각한 후 조헌의 제자 박정량, 전승업 등이 모든 유골을 거두어 하나의 무덤을 만들고 이를 ‘칠백의총’이라 하였으며 1603년(선조 36)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가 세워졌고, 1634년(인조 12) 순의단이 설치되었으며 1647년(인조 25) 종용사를 세워 칠백의사의 위패를 모셨으며 1663년(현종 4) 사액되었습니다.

중봉 조헌은 이이와 성혼의 문인으로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1587년 정여립을 논박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렸고, 또한 이산해를 논박하는 소를 올려 국왕의 진노를 샀으며, 관직에서 물러나 옥천에 머물던 1589년에도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렸다가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1734년(영조 10) 영의정에 추증되었습니다. 1883년(고종 20) 문묘에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 배천의 문회서원, 김포의 우저서원, 금산의 성곡서원, 보은의 상현서원 등에도 제향되었습니다.

조헌사당은 중봉 조헌을 모신 부조사우인데, 부조사우란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영구히 모시도록 조정에서 지정한 부조묘(不祧廟)입니다.

수심대(水心臺)는 조헌사당 뒤에 있는 조헌이 우거하던 곳으로 암석으로 되어 있는 조그마한 봉우리에 낙낙장송이 우거져 있고 그 밑에 수심대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름은 중봉이 짓고 송시열이 써서 바위에 새겼습니다.

조헌은 임진왜란 이전에 주로 옥천군 안읍 밤티에서 생활하였지만, 자주 이 지역에 왕래하면서 후손들에게 이곳에서 살 것을 분부하였다고 합니다. 이 사우는 원래 1734년(영조 10) 곡남리 진동산에 창건되었으나 오랜 시간이 흘러 건물이 허물어지면서 유림과 후손들의 정성으로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고 합니다.

영규대사(靈圭大師)는 서산대사의 제자로, 공주 계룡면 출신입니다. 계룡산 갑사와 보석사를 왕래하면서 수도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무예를 익혔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당시 3일 동안 통곡한 후 스스로 승병장이 되었으며, 조헌과 함께 청주성의 왜적을 물리쳤고 다시 금산성전투에 참가하였다가 큰 부상을 입고 계룡면 월암리로 돌아간 후 사망하였습니다.

의병승장비는 의병승장으로 금산성전투에서 조헌과 함께 순절한 영규대사의 순절사적비로서 1840년(헌종 6) 보석사 입구에 건립되었습니다. 비문은 우의정 조인영이 짓고 금산 군수 조취영이 썼으며, 1940년 일본 경찰이 비각을 헐고 자획을 훼손하여 땅에 묻혔던 것을 광복 후에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영규대사가 주석하였고 그 유적이 남아 있는 보석사(寶石寺)는 866년(신라 헌강왕 12)에 조구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교종의 대본산이며 한국불교 31본산의 하나였습니다. 보석사라는 이름은 절 앞산 중허리의 암석에서 금을 캐내어 불상을 주조하였다는 데서 유래되었으며 경내에 대웅전, 기허당, 의선각, 산신각 등의 건물과 1,100년 수령을 자랑하는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명현과 충신의 땅

금산에는 명현과 충신을 기리는 사당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청풍사(淸風祠)는 야은 길재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우로 1761년(영조 37년) 금산 군수 민백흥이 건축하였고, 마을 이름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不事二君)는 야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불이(不二)’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사우 앞에 있는 백세청풍비(百世淸風碑)는 선생의 충절과 평생 동안에 한 일을 전해주고 있으며, 뜰에는 “충절이 황하의 급류에도 굴하지 않고 버티고 서있는 지주(砥柱)와 같다”하여 세운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가 있습니다.

야은은 1353년(공민왕 2년) 경상도 선산에서 태어났으나 부친 원진이 금주지사(錦州知事)로 부임하였을 때 함께 와서 신씨의 가문에 장가들어 이곳에 살게 되었습니다. 고려가 망한 후 이방원이 태상박사의 관직을 내렸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습니다.

귀암사(龜巖祠)는 눌재 양성지를 배향한 사우로, 평촌리 귀래봉 아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눌재는 문신으로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5대 40여 년간에 걸쳐 벼슬하며 집현전 학사,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맡았습니다.

6세손인 응해가 이곳에 정착하여 귀암사숙을 열고 후진 교육에 힘썼는데 이 사숙의 터에 귀암사를 건립하였으며 마당에는 선생의 행적과 공훈을 새긴 ‘눌재 양선생묘비’가 있고 그 옆에는 거북이 모양의 귀암이 남아있습니다.

덕산사(德山祠)는 박증영, 박훈, 박사현 세 분의 위패를 모신 사우입니다. 박증영은 예종과 성종 때의 문신으로 문물과 제도의 정비에 공로가 컸고, 아들 박훈은 중종 때 기묘사화에 화를 입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분이며, 박훈의 손자 박사현은 임진왜란 때 중봉 조헌의 청주성 탈환에 공을 세우고 전사한 충신입니다.

충렬사(忠烈祠)는 해주오씨의 삼세에 걸친 4명의 충신인 오응정과 큰 아들 욱, 둘째 아들 직, 손자 방언의 충혼을 모신 사당으로 1831년(순조 31)에 세워졌습니다.

오응정은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때 수행하여 평양탈환전에 참가하였고, 정유재란 때에는 순천을 지킨 후 남원성에서 첫째 아들 욱과 함께 전사하였습니다. 둘째 아들 직은 1619년(광해군 11) 후금(後金)을 정벌할 때 강홍립이 항복하자 백마를 타고 적진에 돌진하여 수많은 적을 죽이고 자결하였으며, 손자 방언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항복하자 강에 몸을 던졌습니다.

황풍사(皇風祠)는 금산김씨의 시조 김신을 배향한 사당입니다. 김신은 고려 고종 때 문과에 급제, 사간원좌정언을 거쳐 추밀원부사로 원종 때에 원나라에 들어가서 공훈을 세워 요양행성참정(遼陽行省參政)을 제수 받고 돌아왔을 때 그의 고향인 진례현이 금주군으로 승격되었습니다. 1274년(원종 15) 원나라와 고려가 일본을 정벌할 때 정동대장군으로 출정하여 많은 적을 정벌하였으나 안타깝게 일기도(日岐島)에서 순국하였습니다.

김신을 모신 성곡서원이 1871년 철폐된 후, 청풍서원에 야은과 같이 추배하였다가 후손들이 1953년에 황풍사를 건립하고 매년 음력 10월 19일에 배향하고 있습니다. 사당 앞의 만리황풍비에는 그의 행장을 기록하고 있으며 ‘만리황풍’은 원나라 성종황제의 황은이 만리까지 뻗쳤다는 뜻으로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성종황제가 석별의 정으로 친필로 써서 준 것인데 그 필적은 병란에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홍범식군수순절비는 한일합병조약으로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한 금산 군수 홍범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비입니다. 홍범식은 나라가 일본에게 식민지로 넘어가는 것을 한탄한 나머지 자결한 민영환처럼 저승에서 사는 것이 오히려 오명이 되지 않겠다는 유서와 함께 사직을 지키지 못한 것을 용서해달라는 상소문을 조정에 보낸 후 순절하였습니다. 한일합병 때 우리나라에는 360여 명의 군수가 있었으나 자결한 군수는 금산 군수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금산인삼의 전설 전해오는 개삼터

금산에는 고려와 조선의 왕조와 관련 있는 유적도 있습니다.

용호석(龍虎石)은 용과 호랑이 모습을 2기의 돌에 새긴 것으로 천내강변에 있습니다. 용석(龍石)은 소용돌이 모양으로 된 여러 개의 돌기와 그 사이에 꿈틀거리는 용의 몸체가 조각되어 있고, 여의주를 물고 있는 입 양편에는 아가미와 수염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호석(虎石)은 호랑이가 앞발을 세우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두툼하게 튀어나온 곡선과 동그라미를 조각하여 호랑이의 털 무늬를 만들었으며 입을 크게 벌리고 있습니다.

용호석이 있는 천내리는 금강이 ‘U’자 형을 그리며 남에서 북으로 휘돌아 나가면서 만들어 낸 충적평야가 발달한 곳 낮은 언덕에 둥지를 틀고 있는 마을로, 강의 안쪽에 있다하여 ‘내안’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고려 말 ‘홍건적의 난’ 때 안동으로 내려온 공민왕이 자신의 능묘의 위치를 정하고 필요한 석물로 준비하게 하였으나, 개경으로 돌아간 후 그대로 두었다는 전설과 함께 그 사실을 미루어 짐작케 할 수 있는 용호석이 그 터를 지금도 지키고 있습니다.

태조대왕 태실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태(胎)를 안치했던 곳으로, 본래 함경도 용연에 있었으나 1393년(태조 2) 지금의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로 옮겨왔습니다. 태실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 조선총독부에서 태실을 훼손하여 태 항아리를 창덕궁으로 옮겨갔고 1993년 지역 주민들이 남은 석비와 석물을 수습하여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습니다.

금산은 인삼의 산지답게 인삼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1,500여 년 전 강씨 성을 가진 처사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모친마저 병이 들어 자리에 눕자 진악산 관음굴에서 모친의 쾌유를 빌던 어느 날, 꿈속에서 산신령이 나타나 “관앙불봉 암벽에 가면 빨간 열매 3개 달린 풀이 있을 것이니, 그 뿌리를 달여 드려라”는 계시를 받고 그 뿌리를 캐어 달여 드리니 모친의 병환이 완쾌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강처사는 그 씨앗을 지금의 남이면 성곡리 개안이 마을에 심어 재배에 성공하는데 당시 그 씨앗은 3개가 달리고 뿌리의 모습이 사람의 형태와 비슷하다하여 ‘인삼’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개삼터는 금산에서 최초로 인삼을 재배한 곳으로, 진락산이 동쪽으로 산줄기를 뻗어내려 양팔로 감싸 안는 형국의 골짜기 언저리의 산자락에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가급적 줄이기)^^

<참가 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반드시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고을학교'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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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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