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악몽'이 재현되는 순간이었다. 지난해 6월 지방선거에서 유시민 당시 경기도지사 후보는 김진표 민주당 후보(현 민주당 원내대표)와의 단일화 경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이겨 단일후보가 되고도 본선에서는 졌다. 한명숙 서울시장 후보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격차로 김문수 경기도지사에게 무릎을 꿇었다.
공교롭게도 두 패배의 순간에는 모두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가 있었다. 정치권에서 비민주당 후보가 단일후보가 되고도 본선에서 패배하는 일을 일컬어 '유시민의 저주'라는 말이 나돌기 시작한 것도 지난 4.27 재보궐 선거 후였다.
'네거티브 무대응'에도 불구하고 하향세 그리는 지지율, 왜?
▲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연합뉴스 |
이에 대해 박원순 캠프의 공식 입장은 "어차피 빠지는 것은 예상했고 그 폭이 오히려 생각보다 적다"는 것이다. 아직은 승리를 자신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속내는 다른 듯 보인다.
민주당의 한 인사는 "거센 네거티브에 비하면 지지율이 적게 떨어진 편이긴 하나, (하향세를 그리고 있는) 추세가 걱정"이라고 말했다. "주말쯤 이런 분위기를 반전시킬 카드가 필요하다"는 말이 뒤를 이었다.
한나라당의 네거티브 공세의 정당성, 정치인으로의 도리와 정도를 따지기 전에, 그 효과를 인정하고 있는 것. 민주당의 한 의원도 "한나라당이 저렇게까지 '미친듯이' 네거티브 공세를 하는데는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 9일부터 시작된 '병역 기피 공세'가 어느 정도 소강 상태로 접어들자, 이번에는 '학력 위조'로 융단폭격을 퍼붓고 있다. 서울대 법대가 아니라 사회계열 입학임에도 '법대'로 불리는 것을 바로잡지 않았다는 비판에 이어, 14일에는 "하버드 법대 객원연구원" 경력에 대한 의혹까지 나왔다. 박 후보 측은 "거짓"이라고 부정했으며, 이를 제기한 강용석 무소속 의원과 나경원 선대위의 안형환 대변인을 고발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계속되는 공세에 대한 박 후보 측의 현재 전략은 '무시와 법적조치'다. 박원순 선대위 우상호 대변인은 "네거티브 정치는 국민들에게 '다 똑같은 사람들이구나'라는 불신을 안겨줘 결국 공격을 하는 주체마저 죽이는 정치"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우 대변인의 이런 말은 역설적으로 한나라당의 네거티브 공세가 '박원순도 깨끗한 줄 알았더니 기존 정치인이나 똑같구나'라는 인식을 안겨주고 있음을 드러낸다.
"'박원순은 민주당의 후보'라고 아무리 외쳐도 당원들 허전함은 여전"
이처럼 여당의 총공세에 밀리는 이유 중 하나가 제1야당인 민주당 조직이 좀체 움직이지 않다는 것이다. 민주당의 기층 분위기도 박 후보에게 전폭적으로 호의적이지 않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박원순 후보가 우리 모두의 후보라고 달래고 있지만 당원들의 허전함이 아직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민주당 당원들이 느끼는 허전함의 시작점으로 민주당 사람들이 공통점으로 꼽는 장면이 있다. 바로 지난 3일 야권 단일후보 경선날의 한 풍경이다. 경선 발표를 앞둔 오후 8시, 체육관에 들어서는 손학규 대표를 보며 민주당원들은 '손학규'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반대편의 박원순 지지자들이 맞대응하며 외친 이름은 '박원순'이 아닌 '김어준(<딴지일보> 총수)'이었다. 하루 종일 김어준, 조국 서울대 교수, 소설가 공지영 씨 등 '박원순 지지자'들만 주목 받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민주당원들은 자존심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 역시 유시민 참여당 대표에 대한 민주당의 '박탈감'과도 일치한다. 현역 의원 한 명도 가지지 못한 당의 대표가 '우리 당' 대표보다 지지율이 높게 나오는 상황에 대한 박탈감이 이봉수 김해을 후보에 대한 적극적 지원을 가로막았던 이유이기도 하다는 것.
손 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지도부가 권역별로 전담해 선거운동을 벌이기로 한 것도 이런 사정 탓이다. 전당대회를 준비하며 전국을 돌던 박지원 전 원내대표도 13일부터는 서울에 집중하고 있다. 이들이 당원들을 만나 얘기하는 것은 "박원순 후보가 지면 우리도 내년 총선, 대선에서 진다"는 것이다.
'무소속 박원순'의 태생적 한계
"민주당 기층 조직이 움직이지 않는게 아니라 안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라는 반론도 있다. '무소속 후보'가 가지는 어쩔 수 없는 한계에서 비롯된 착시 현상일 뿐이라는 얘기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민주당 후보라면 구의원, 시의원, 구청장에 보좌진들까지 '박원순' 이름이 적힌 어깨띠를 맬 수 있지만 무소속 후보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선거법 때문이다.
선거법상 무소속인 박원순 후보가 동원할 수 있는 선거사무원은 500명에 불과하다. 다만 박 후보가 정당 소속이었을 경우 그 정당의 국회의원, 시의원, 구의원, 유급당직자는 선거사무원으로 등록하지 않더라도 박 후보의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 박 후보가 민주당 소속이 아님으로 인해 얻는 '마이너스'가 상당한 것이다.
반면 나경원 후보는 같은 규정 때문에 168명의 국회의원에 보좌진, 당직자를 포함해 어깨띠 두를 수 있는 선거운동원이 무려 1500명에 달한다. 민주당 관계자는 "의원이 박원순 후보 선거운동을 하려고 해도 어깨띠 조차 두를 수 없으니 누구 선거운동을 하는지 유권자들에게 알리기가 너무 어렵다"고 말했다.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할지라도, 민주당이 밑바닥부터 적극적으로 선거를 도울 수 없는 '현실적 제약'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새로운 서울, 박원순이 하면 다르다"고? 무엇이? 어떻게?
▲ 나란히 걸린 나경원, 박원순 후보 현수막. ⓒ연합뉴스 |
한 캠프 주변 인사는 "나경원 후보의 공세는 구체적인데 반해, 박원순 후보의 메시지는 지나치게 철학적이어서 문제"라고 토로했다. 박원순 후보 측이 내건 '캐치 프레이즈'는 "새로운 서울, 박원순이 하면 다릅니다"였지만 '무엇이, 어떻게'를 효과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정치'라는 박 후보의 주요 메시지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어차피 박원순이든 누구든 당선되는 순간, 박 후보 역시 유권자들이 욕했던 '구린내 나는 정치판'의 또 한 명이 된다"며 "민주당을 '구시대 정치'로 몰아붙이고 자신은 '새시대 정치'를 열겠다고 했지만 그 프레임이 결국 그에게도 족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 탓에 박원순 후보 측의 시선은 외려 밖으로만 향하는 분위기다.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의 1등 지원자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비록 나 의원이 '친이계' 대표주자임을 감안하면 다소 결은 다르나 어쨌든 당내 인사다. 반면 박원순 후보가 기대하는 1순위 지원자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다. 박 후보는 여러 차례 "안 교수에게 지원 요청까지 드릴 생각은 없다"고 밝혔지만, 안 교수의 지원 여부는 서울시장 선거판을 뒤흔들 수 있는 주요 관심사다.
박 후보는 이 모든 난관을 뚫고 '유시민의 저주'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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