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과학은 잘못된 믿음과 우상을 파괴하는 역할을 해왔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다, 이런 것들이 대표적 사례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많았다. 나치의 우생학은 홀로코스트 학살의 중요한 과학적 근거가 되었고, 골상학은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합리화하는 도구였다. 이들 문제는 과학적 발견이 사회적으로 해석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기도 하고, 사회적 가치가 과학적 탐구에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과학사의 이러한 '흑역사'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도 불구하고, 크고 작은 '스캔들'은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
생물학적, 사회학적 관점을 통합하는 양질의 학술논문들이 발표되던 저명한 국제 학술지 <역학과 지역사회건강(Journal of Epidemiology & Community Health)>은 1월에 게재한 논문 때문에 된서리를 맞고 있다. 일본 동경대학의 곤도(Naoki Kondo)와 이시가와(Yoshiki Ishikawa) 교수가 저술한 "건강검진서비스를 잘 받도록 하는 정서적 자극에 의한 행동 중재와 서비스 이용자의 사회경제적 지위: 일본 파친코 시설에서의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이 그 주인공이다. (☞논문 바로 가기)
연구진은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이 건강에 유해한 행동을 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꼽았다. 하나는 건강 유지에 필요한 상품과 서비스 이용에 경제적으로 제한을 받는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빈곤으로 인한 만성 스트레스가 인지적 편향을 강화하여 근시안적 결정을 내리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이러한 사회심리적 기전에 개입하여, 긍정적 행동변화를 유발시킬 수 있는지 평가하고자 했다.
이들은 우선 건강증진 행동을 하게 만드는 의사결정에 재정적 인센티브, 긍정적 정서, 동료들의 압력, 중독적 혹은 성적 매력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선행 연구들을 검토했다. 그리고 이러한 가설을 검정하기 위해 민간 건강검진서비스 회사에서 시행했던 검진사업 자료를 분석했다.
이 회사는 파친코 방문자들을 대상으로 검진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대체로 건강검진에 관심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여 "짧은 스커트와 전형적인 간호사 캡을 쓴 에로틱한 간호사 복장을 입은 젊은 여성" 직원이 참여자를 유인하도록 했다.
논문의 저자들이 이 프로그램을 직접 설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자료를 이용하여 그들이 세운 연구가설이 타당한지 살펴보기로 했다. 긍정적 정서에 의한 건강행동 영향, 즉 "사회경제적 취약계층은 사회심리적 요인 때문에 건강증진행동이 억제되지만, 에로틱한 자극이 주어진다면 검진을 택하는 긍정적 행동 변화를 보일 것이며, 특히 남성이 더 큰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가설의 타당성을 검정하고자 했던 것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사회경제적 취약계층은 "섹시한 간호사 복장을 입은 젊은 여성" 직원이 포함되었을 때 건강검진에 더 많이 참여했다. 실업자가 고용상태인 사람보다 1.15배, 사회적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전국민건강보험 가입자가 여타 사회보험 가입자보다 1.36배 많이 참여한 것이다. 그러나 참여자의 성별을 분리해서 살펴보면, 연구진의 예상과 달리 검진을 많이 받은 것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 파친코 이용자였다.
연구진은 이 논문이 건강행동 중재연구에서 성적 자극을 행동변화의 유인 요인으로 활용한 첫 번째 연구라고 자부하면서, 취약계층의 검진서비스 이용율이 높아진 결과를 두 가지 요인으로 설명했다.
하나는 사회경제적 곤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던 사람들이 섹시한 여성의 의상에 자극을 받아 검진비용 부담에 대한 합리적 판단을 못한 채 검진서비스를 이용했을 가능성이다.
다른 하나는 행복, 안도, 기쁨 같은 긍정적 정서가 인지 능력을 강화하고 성찰적 의사결정을 촉진하는데, 간호사 복장의 여성들이 검진을 독려하는 분위기가 파친코 이용자들로 하여금 건강검진에 대해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만들었고 그 결과 검진을 더 많이 받았다는 것이다. 어느 경우에나 '성적으로 매력적인 간호사 복장을 입은 젊은 여성' 직원의 유인이 영향을 주었다고 보았다.
저자들이 이론적으로 기대고 있던 성차에 대한 행동경제학과 진화심리학의 가설 - 즉, 남성이 여성보다 성적 자극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재현되지 않았다. 연구진은 유인하는 여성 직원에 대한 자기 동일시 수준에서의 성별 차이, 유인 역할을 맡은 직원의 성별 선호 등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으며, 상세한 이유를 분석할 수 있는 변수가 부족한 점을 연구의 제한점으로 지적했다.
이 논문은 2017년 9월에 접수되어 12월에 게재가 확정되었다. 저명 학술지의 통상적 심사절차인 동료심사와 편집자 검토가 오간 석 달이었다. 그러나 1월에 이 논문이 발표된 후 독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일본 여성이자 간호사로서 매우 무례하고 경멸적으로 느낀다",
"간호사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부적절하게 성애화한 논문을 발표한 저자와 심사위원, 편집자들에게 매우 실망스럽다",
"윤리적으로 부적절한 방법을 건강검진 방법으로 사용하고, 저널을 통해 효과성을 지지하는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이런 중대한 방법론적 결함이 있는 연구가 윤리심의를 통과하고 학술지에 발표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저자들은 논문을 철회하길 바란다" 등.
비판과 철회 요구가 거세지면서, 편집자는 두 번에 걸쳐 해명문을 실었다. 우리 학술지는 이 논문의 주장에 대해 분명히 반대하며, 이런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온라인 논문 심사와 편집과정의 문제를 면밀히 검토하고, 아울러 도쿄대학 기관생명윤리위원회에 독자들의 비판을 전달하겠다는 것이 요지였다.
모든 학술 연구들이 크고 작은 한계점들을 가지고 있지만, 특히 이 연구는 과학의 이름으로 차별을 재현하고 정당화했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첫째 성차별 문제다. 독자들이 비판했듯, 논문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간호직과 여성에 대한 왜곡된 성적 스테레오타입을 건강행동 중재 방법으로 사용했다. 이러한 성차별적 재현은 과학적 근거라는 명분으로 현실의 성적 편견을 더욱 강화할 수 있다.
오랑우탄과 인간이 분기한지 1600만 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현재의 인간 행동을 불변의 생물학적 본성과 연관시키고 이를 근거로 남녀의 성적 행동 차이를 설명하는 방식은 대중매체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전문 학술영역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이 연구에서도 연구진의 가설과 달리 여성의 검진서비스 이용이 더 많았던 것은 오히려 성별 차이를 생물학적으로만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둘째 가난에 대한 차별적 시선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적으로 취약한 사람일수록 '진화로부터 나오는 본성' 즉, 성적으로 매력적인 여성의 유인에 더 영향을 받는다는 가설은 가난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을 사람들 사이에 생물학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전제한다. 이는 과학적으로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이다. 게다가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외적 자극에 대해 비이성적으로 반응하거나, 혹은 '분위기에 따라' 이성적으로 반응할 수도 있다고 해석한 것은 이들의 주체성을 간단히 대상화해버린 것이다.
셋째 지식에 대한 차별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성별과 가난에 대한 차별이 전개된 곳은 바로 저명한 학술지였다. 이 연구의 가설이 전제하는 "인간의 진화로부터 나오는 본성을 고려하면"이라는 기술은 인간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을 당연한 법칙처럼 주장하는 일부 진화심리학자들의 흔한 표현이다. 이 연구를 수행한 연구자들과 심사위원, 편집자들은 성과 계층에 대한 차별적 편견을 전제하고 있는 연구에 과학의 이름으로 타당성을 입증하고 진리의 자격을 부여했다. 검진 참여자의 서면동의서, 푸아송 회귀분석, 윌콕슨 테스트, 95% 신뢰구간 같은 통계 기법, 도쿄대 의과대학 기관생명윤리위원회 같은 공식절차들이 이를 뒷받침했다. 이러한 문제적 논문이 심사나 편집과정에서 바로잡히지 않았다는 것은 차별적 인식이 몇몇 연구자에게 국한되지 않고 국제학술공동체 내에 만연해 있음을 시사한다.
과학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만큼, 사회 또한 과학하는 사람들의 세계관과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 독특한 코스튬 플레이 문화나 한국 못지않게 성차별이 만연한 일본 문화 속에서 아마도 연구자들은 이것이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본인들이 직접 설계한 연구가 아니라 이미 수집된 자료를 활용한 것이었으니 더욱 책임질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과학의 이름으로 기존의 편견과 차별을 재생산하는 경우 '근거 없는' 일방적 주장보다 더 큰 해악을 초래할 수 있다. '철학 있음'의 반대말은 '철학 없음'이 아니라 '나쁜 철학'이라는 말이 있다. 학문의 자유를 옹호하면서도, 동시에 학술연구의 사회적 맥락과 연구 전제에 담긴 철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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