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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인'이 개봉하고" "박대표를 피습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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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의뢰인'이 개봉하고" "박대표를 피습했다"고?

[오홍근의 '그레샴 법칙의 나라']<40>"방송, 말만이라도 어법에 맞게…"

사전에서 보면 '공갈(恐喝)'이란 〈남의 약점이나 비밀 따위를 이용하여 윽박지르고 을러서 무섭게 함〉이라 풀이되어 있다. 근래 들어 이 낱말에 '터무니없게도' 〈'거짓말'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는 새로운 풀이가 덧붙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 사이에서 거짓말한다고 할 때 "공갈!"이라거나 "공갈 마"란 말이 폭넓게 퍼져 쓰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속이 텅 비고 겉만 부푼 '공갈 빵'까지 생겨났다.

결국 무시할 수 없는 흐름이 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자장면'과 함께 '짜장면'이 복수의 표준어가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짜장면'이 '자장면'보다 훨씬 더 보편화되어 많이 쓰이고 있는데도, '자장면'만이 표준어라고 계속 고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표준어인 '자장면'은 앞으로, 새롭게 복수 표준어로 올라선 '짜장면'에 의해 밀려나, 점차 쇠락의 길을 걷다가 사그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금 기세는 그렇다.

그렇게 서로 복수의 표준어이면서, 치열하게 '죽고 살기'식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말들이 적지 않다. '봉선화'와 '봉숭아'도 그런 사례다. 제각각 든든하게 힘이 되어 주는 '배경'까지 있다. 봉선화는 홍난파의 가곡 '봉선화'때문에도 쉽게 없어질 수 없는데다, 최근 들어서는 현철이란 가수가 부른 대중가요 '봉선화 연정'도 뒷배 역할을 하고 있다. 봉숭아도 나름대로, 어린시절 백반과 함께 손톱에 싸매 물을 들이는 그리운 풍속이 남아 있는 한, 간단하게 사라질 수 없는 낱말이다.

"'봉숭아' 물 들인다"하지, "'봉선화' 물 들인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봉숭아는 최근 TV의 개그프로인 '봉숭아 학당'까지 새로운 뒷밭침이 되고 있다. 그렇다고 두 단어가 영원히 함께 살아 남을 수는 없다. 학자들은 복수의 표준어라도 기능이 같을 때, 언제까지나 공생할 수 없는게 낱말의 운명이라고 말한다. 봉선화나 봉숭아 둘 중 하나도 사람들의 사용정도에 따라,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다'고 했다.

말은 세월 따라 강물처럼 흘러간다고 했다. 흘러가면서 굽이굽이마다, 사람들의 쓰임새와 사용빈도에 따라 모습을 바꾸어 가게 되어 있다. 언어생활 자체가 사회적 약속이기 때문에, 시대가 바뀌고 사회가 달라지면, 말도 옷을 갈아입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1988년 문교부 고시로 나온 표준어 규정에 보면, 〈표준어는 '교양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 말'로 정함을 원칙으로 한다〉고 되어있다.
ⓒ연합

그 55년 전인 1933년 조선어학회가 정한 한글'마'춤법 통일안에서는, 그게 〈표준말은 대체로 '현재'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 말'로 한다〉였다. 약간일망정 어느새 내용이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 흐름에서의 구획을 인식해, '현재'를 '현대'로 바꿨다고 했다. '중류사회에서 쓰는'이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으로 바뀐 데는, '중류사회'가 그 기준이 모호하다는 의미도 있으나, '표준어를 못하면 교양 없는 사람이 된다'는 점이 강조된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말, 바로 써야 한다는 점에 역점을 두고 있음은 두 말할 나위없다. 요컨대 '교양 있는 사람들이 지금 쓰는 서울말'이 표준어다. 세월이 지나면 지금(현대)은 과거가 된다. 새로 오는 '현대'에 알맞게 말들은 새로운 얼굴을 하고 나타나게 되어있다. 말은 그렇게 바뀌어 간다. 이번에 표준어가 된 '짜장면'은 그동안 국어사전에도 올라 있지 않았다. 그러나 '처갓(妻家)집' '초가(草家)집' '모래사장(沙場)'은 사전에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실 이 말들은 '가(家)와 집'이나 '모래와 사(沙)'가 '동어(同語) 반복'이기 때문에, 어법에 맞지 않는 낱말들이었다. 그러나 그게 사람들의 사용빈도가 늘어나면서 관용화 되어, 가슴을 편채 사전에 등재되었다. 그래서 '역전(驛前)앞'도 언젠가는 사전에 이름을 올릴지 모른다. 근래 들어 국어학자들이 특히 고민을 하고 있는 말들이 있다. '피해(被害)를 입다·당하다'와 '부상(負傷)을 입다·당하다'가 그것이다. '피(被)'나 '부(負)'가 '당하다·입다'의 뜻이므로 중복해서 '당하고' '입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론 틀린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주 쓰면서 요즘에 와서는, "이게 맞느냐 틀리느냐 하는 시험에도 출제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고 학자들은 하소연 한다. 지난여름 국립국어원이 주최한 국어정책 토론회에서도, "이제는 틀리지 않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말이 바뀌어 갈 수 밖에 없다 쳐도, 표준어로 한 번 정해졌으면 그것이 당장 '내일 바뀔지라도', 오늘은 규정에 맞게 쓰는 게 옳다. 말은 그렇게 쓰여야 한다.

특히 방송은 그걸 지켜야 한다. 물론 신문이나 다른 매체는 소홀히 해도 괜찮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들과의 접촉빈도를 생각할 때 방송의 '바른말 사용' 이야말로 절대적이다. "영어를 제대로 배우려면 BBC(British broadcasting Corporation : 영국국영방송)를 들으라"는 말이 있다. 지금 이 나라에서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려면 한국의 방송을 들으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천만의 말씀이다. 특히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 그리고 외국인들이 이 나라 방송을 듣고 그렇게 배울까봐 조마조마 했던 기억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지켜야 할 건 지켜야한다. 표준어 제대로 써야한다.

'피해를 입고… 부상을 당한다'도, 비록 사람들의 사용빈도가 늘어 보편화됐다 하여 허용될 분위기라 하더라도, 적어도 방송만은 지금처럼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써 재껴서는 안 된다. 분명히 하면서 가야한다. 오히려 바로 잡아 줄 책무가 방송에게는 있다고 본다. 그런 판국에 얼토당토않고 터무니없는 말까지 써서는 더더욱 안 된다. 방송을 시청하노라면 '주술(主述 : 주어와 술어)관계'가 맞지 않는 문장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튀어 나온다. "(연평도) 풍랑주의보가 해제하자…"한다. "구제역이 확산하고 있습니다"했다.

물론 다는 아니지만 적지 않은 기자와 아나운서들이 '하다'와 '되다'를 구별 못한다. 그래서 "'마당을 나온 암탉'이 중국에서 개봉합니다"하고 "하정우의 '의뢰인'이 개봉합니다"한다. 무슨 전시회가, 무슨 무슨 대회가 "개막합니다"다. 수량을 표현하는 데도 안타까운 모습은 이어진다. (이집트 시위자들이) "'어림잡아 수만명'이 될 것 같습니다"했다. 저축은행 부실규모가 '수천억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고, 추락을 앞둔 인공위성이 '수천개가 넘는다'고 했다.

심지어 "'오십여덟명'은 해경이 구조했고…"하는 기막힌 리포트도 전파를 타고 전국에 퍼져 나갔다. 물론 누구나 오탈자를 내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러나 지금 예시한 사례들은 맞춤법 한 두 대목 틀리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것들이다. 방송은 다르다. 달라야 한다. 피습(被襲)은 〈습격을 당함〉이란 뜻이다. 따라서 "박대표를 피습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런 기자 리포트도 있었다. TV사극에서도 "조정 중신들을 피습했고…"하는 대사가 나왔다.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그렇게 듣고 익혀간다면 앞으로 우리말은 어찌되는 것일까. 끔찍한 이야기다.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라'는 속담이 있다. 대부분의 방송들이 MB정권 들어 입 비뚤어진 소리 많이 해온 것 우리가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다 해도 말만이라도 어법에 맞게 바로 써야 한다.

어떻게 지켜온 말과 글인가. 틀린 것 바로 잡아 가면서 흠집 없이 후손들에게 넘겨줘야 할 책무가 작지 않음을 거듭 깨달아야 한다. 그 책무가 방송의 몫이다. 한글날을 맞으면서 간절히 느끼는 소회의 한 자락이다. 말은 바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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