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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58년 전 4.19 도화선된 3.8의거 정신 계승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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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58년 전 4.19 도화선된 3.8의거 정신 계승할 터”

김용재 대전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공동의장, "지역민주화운동의 효시였다"

58년 전 자유당 독재정권의 부정과 부패, 인권유린에 정면으로 맞선 학생들의 4.19혁명을 기억한다. 학생들의 의거는 전 국민과의 연대로 이어져 결국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키는 승리로 막을 내렸다.


4.19 혁명이 있기 전 전국 각지에서 전개된 부패 정권을 향한 저항 운동은 폭발직전 도화선 같은 역할을 했고, 대표적으로 대구의 2.28, 대전의 3.8, 마산의 3.15의거 등이 손꼽힌다.

특히, 3.8민주의거는 대전지역 고등학생 1500여명이 순수한 열정으로 불의에 항거한 충청권 최초의 학생운동이며 지역민주화운동의 효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급기야 3.8민주의거는 지난 2013년 4월29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 일부 개정 법률안’이 국회본회의를 통과하고, 같은 해 5월22일 공포됨으로써 민주화에 기여한 업적을 인정받았다.

1960년 당시 대전고등학교 2학년으로서 4.19혁명을 겪은 김용재(75)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공동의장을 만나 3.8의거 당시 생생한 현장 상황과 의미를 들었다.

-3.8민주의거 전 상황은 어떠했나.
“당시 야당유세가 2월28일 대구부터 시작됐고, 대전에서 3월8일 오후에 야당 부통령 후보 장면 박사의 선거유세가 준비돼 있었다. 박순천 야당대표 등 야당 거물급 인사들이 참여할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날을 민주의거 날로 정했다.”

-처음 3.8민주의거를 준비한 주체는 누구인가.
“3.1절 행사 이후 다음날로 기억된다. 대전지역 몇몇 고등학교 학생 대표들이 하숙집에 모여서 연합시위를 벌이기로 합의했다. 참가했던 학교는 대전공업고, 보문고, 대전상고, 대전고, 대전여고, 호수돈여고, 대전사법학교 등이다.”

-의거 전에 방해가 있었다던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거사를 합의한 사람 중 한 명이 집에 돌아가 경찰인 친형에게 사실을 말했다고 들었다. 이 때문에 보문고와 대전공업고에서 갑작스럽게 학기말 시험을 치르는 일이 생겼다. 학생들을 학교에 잡아두려는 계책이었던 같다. 당연히 경찰들이 학교에 대한 감시를 더욱 강화했다.”

-3월8일 당일 대전고에서의 의거는 어떻게 시작됐나.
“3월8일 학도호국단 대표 25명이 교문 밖 교장 관사로 호출돼 훈시를 들었다. 집단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곳을 제일 먼저 빠져나온 사람이 있었는데, 대전고 학도호국단 규율부장 최정일이었다. 그는 학교에 남아 있던 대표들에게 연락을 했고, 각 학년에 간부들을 배치해 운동장에 집결, 학도호국단 대대부관 홍석곤이 작성한 결의문을 낭독했다. 낭독 후 학생들은 결의문 문구를 외치며 길을 따라 대전공설운동장까지 행진했다.”

-결의문 내용은.
“학원의 정치 도구화를 단호히 배격한다는 내용과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고, 학생 동태 감시를 즉각 중단하라는 내용을 담았다. 또 신성한 학원에서의 선거 운동과 여하한 사회적 세력의 침투를 용납할 수 없다는 내용 등을 강조했다.”

-목적지에서 경찰의 강제 진압이 있었다는데.
“경찰이 바리게이트를 치고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때렸다. 총 개머리판이나, 휴대하고 있던 방망이로 인정사정없이 내리쳤다. 경찰 백차와 기마부대도 동원됐고, 소방차로 물을 뿌리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머리와 팔, 다리 등에 부상을 입어 피를 흘렸고, 한 학생은 방망이로 귀를 맞아 고막이 파열된 이후 회복이 되지 않아 지금도 고생하고 있다. 학생들을 염려해 따라온 교사 중 두 분이 수갑에 채워져 연행되는 수모도 겪었다. 두 분 역시 곤봉 세례를 받았다.”

-경찰에 연행된 학생도 있었나.
“경찰 트럭에 마구잡이로 떠밀려 100여명이 경찰에 붙잡혀 갔다. 이때 교복, 모자, 신발 등 소지품을 잃고 아수라장이었다. 나머지 학생들은 경찰을 피해 논과 밭으로 달아나다 거름을 만들려고 인분을 채워놓은 구덩이에 빠지기도 했다. 시민들은 학생들을 숨겨주기도 하고, 음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나 역시 방망이에 맞고 쫓아오는 경찰을 피해 달아나다 구덩이에 빠져 민가에서 씻느라 애를 먹었다.”

-이후 연행된 학생들은 어떻게 됐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경찰서에서 ‘원산폭격’이라는 얼차려를 받고 그날 저녁 대부분 훈방조치 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학생 대표들은 조사를 받고 새벽녘에 귀가했다. 교장선생님이 사정해서 훈방조치 됐다고 들었다.

-4.19 이후 대전 의거양상은 어떠했나.
“그때는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본격 나섰고, 4월26일 대전에서 실제적인 시위가 전개됐다. 대전고 등 대전지역 고등학생들도 시위에 참가해 힘을 보탰다.”

-세월이 흘렀다. 3.8민주의거 정신은 계승되나.
“이제 민주화 운동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게 된 기념사업회는 대전의 역사를 조명하는 대표적인 기념사업을 전개함으로써 3.8민주의거 정신을 이어나갈 것이다. 매년 기념식을 가져왔고, 지난 14일에는 올해 처음으로 ‘민주시민 걷기대회’도 성황리에 개최했다.”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으로서 시낭송회를 준비했다고 들었는데.
“4.19혁명 기념일인 내일 오후 4시에 대전 중구문화원 뿌리홀에서 3.8과 4.19를 기념해 시낭송회를 갖는다.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와 대전·충남4.19혁명동지회가 함께 준비했다. 앞서 오전 11시 30분에는 대전역 방향 목척교 오른쪽 끝에 세워진 4.19혁명 진원지 표지석에 헌화하는 시간을 갖는다. 많은 분이 오셔서 그날의 함성을 되새겼으면 한다.”

▲김용재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 공동의장이 58년 전 상황을 이야기 하고 있다.ⓒ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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