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여울 일기 1
부산 영도 서남쪽 절영길을 따라가면 흰여울문화마을이 있습니다.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보이는 곳이 근대 제 1호 해수욕장으로 지정된 부산 송도입니다. 이 곳의 이름은 묘박지입니다. '묘'라 하여 선뜻 무덤이 연상되기도, 얼핏 고양이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굽이진 골목마다 햇볕을 쬐는 고양이들을 여럿 만날 수 있습니다.)
묘박지(錨泊地). 사전으로 찾아본 묘박지는 해양과학용어입니다. "선박이 계류, 정박하는 장소로 선박의 정박에 적합하도록 항내에 지정한 넓은 수면"입니다. 영어로는 anchoring basin. 묘(錨)는 닻입니다.
묘박지에 정박해서조차 배들은 파도에 기우뚱거리고 조류를 따라 좌로 우로 돌아갑니다. 닻을 내려서조차 끊임없이 부유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묘박지에 떠있는 수많은 배들이 연출하는 초현실적인 장면은 흰여울마을의 풍화된 풍경에 더해져 더욱 묘한 기분에 젖게 합니다. 여느 바다의 느낌과는 전혀 다릅니다.
매화가 한창인 흰여울 마을의 봄은 아직 바람이 차고 매섭습니다. 비가 내린 며칠 전에는 온종일 스산한 기운이 마을을 휘감고 있었습니다. 그 스산함은 자연으로부터 오는 찬바람만이 아닙니다. 먼 해양을 돌아 지치고 녹슨 배들처럼 흰여울에 닻을 내린 모든 이의 삶이 찬바람과 함께 흩어져 날리는 풍광 때문입니다.
먼 길을 돌아온 저와 아내도 여기서 다시 시작합니다. 카뮈의 말처럼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의 여정입니다. 이제 막 닻을 내린 배와 같이 파도와 조류를 이겨내는 유연함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따뜻한 바람이 부는 봄이 성큼 다가왔으면 좋겠습니다.
모두들 건강하시길 빕니다.
손문상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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