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말뫼의 눈물>(극·연출 김수희)을 봤다. 조선소 노동자의 이야기다. 아니, 더 정확히는 조선소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수현이 조선소가 있는 자신의 고향에 돌아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극에는 어릴 때부터 조선소 직원이 꿈이었고 실제 그렇게 된 수현의 단짝 친구 미숙이부터, 서울에서 방송국 조연출을 하다 그만두고 아버지가 다니는 조선소의 하청업체에 취업한 진수, 조선소 하청업체 사장인 수현의 삼촌 인하까지 다양한 조선소 관련 인물군상이 등장한다. 이들을 통해 조선소 안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작가 겸 연출가 김수희 씨는 이 연극을 준비하면서 다양한 조선업 관계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연극은 매우 디테일하게 조선소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원청 노동자, 즉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와의 차별대우를 비롯해, 산업재해가 발생했을 경우, 업체는 이를 어떻게 은폐하는지, 노조를 만들 경우, 소속 하청업체가 어떻게 폐업되는지... 현실에서 일어나는 구조적 모순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또한, 공상처리(일하다 다친 노동자에게 산재 대신 회사에서 병원비 등을 지급하는 행위), 블랙리스트 등 노사관련 전문용어들도 연극에서 수월찮게 등장한다. 하지만 이 연극의 매력은 그러한 딱딱한 용어를 직접 풀어 설명하기보다는 등장인물 대사나 에피소드에 묶어 툭툭 던진다는 점이다. 이는 노사현안 문제에 문외한인 관객들의 관심을 끌도록 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철의 노동자'는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연극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하청업체에서 일하던 진수가 골리앗 크레인 위에서 고공농성을 하는 장면이다. 현장에서 노동자 추락사고가 발생하자 이를 무마하려는 회사, 그리고 사고에 무감각한 사람들을 보며 회의를 거듭하던 진수였다. 그러던 그가 급기야는 하청 노동자들이 대거 해고되자 이를 막기 위해 크레인에 올랐다.
대부분은 그렇게 농성하는 사람들을 '빨갱이' 내지는 '철의 노동자' 쯤으로 생각한다. 자신과 다른, 즉 별종으로 치부하면서 그들이 처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는 식이다. 하지만 연출가 김수희 씨는 그들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나약한 인간임을 표현한다.
하늘 끝에 매달려 있는 진수는 자신이 있는 공간에서 두려움에 떤다. 혼자 고립돼 있으면서 몰려오는 극한의 공포, 그러면서 밀려오는 환각과 환청에 고통스러워한다. 하늘에서는 혼자이지만 그 하늘 아래 땅 위에서는 자기를 압박하는 노조와 연대단체들이 존재한다. 그들이 가하는 압박감도 진수를 괴롭히는 요소다.
이렇게 설명하니 이 연극이 남성 중심의 연극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연극을 관통하는 커다란 줄기는 '여성'이다. 조선소 주변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삶이 연극의 큰 줄기다. 딱딱하고 생소한, 그리고 남성 중심의 조선소 이야기를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치환해서 연극을 이끌어가는 것이 또한 이 연극의 장점이다. 자연히 조선소 남성들은 소재가 되고, 조선소 주변의 여성이 주제가 되는 식이다. 그러면서 대중에게는 생소할 수 있는 조선소 이야기가 좀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물론, 이렇게 불편한 이야기만 나열되는 건 아니다. 춤바람 난 아내를 잡으러 온 조선소 노동자 남편이 갑자기 맞닥뜨린 아내와 함께 춤추는 장면은 박장대소를 유발한다. 또한, 철딱서니 없는 하청업체 사장 삼촌의 엉뚱한 언행, 단짝 친구 수현과 미숙 간 알콩달콩 다투는 모습 등 곳곳에 유머를 심어놓음으로써 주제의 무거움을 어느 정도 희석한다.
사람의 가치가 사라진 노동 현장
그렇다 하더라도 이 연극이 가진 가장 큰 힘은 현재 한국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짚어내는 '팩트'이다. 이 연극의 제목인 '말뫼의 눈물’은 현대중공업이 2002년 사들인 대형 크레인의 별명이다. 스웨덴 도시 '말뫼'에 있던 세계적인 조선소 코쿰스(Kockums)가 문을 닫으며 내놓은 당시 세계 최대의 크레인으로, 현대중공업은 단돈 1달러에 이 크레인을 사들여 울산에 설치했다. 이 크레인은 아직 사용되고 있다.
'말뫼의 눈물'이라는 별칭은 크레인 해체를 지켜본 말뫼 시민들이 흘렸다는 눈물에서 유래했다. 사실 '말뫼의 눈물'이 한국에 넘어온 것은 세계 조선업의 상징적 사례다. 1980년대까지 조선업의 강자였던 스웨덴이 신흥 추격자인 한국에 밀려났다는 증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도 '말뫼의 눈물'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우리 조선업이 유럽을 따라잡은 것은 '저임금', 그리고 '빠른 제작' 이 두 가지 키워드였다. 하지만 2000년대 중후반부터는 또다른 후발주자인 중국, 그리고 다시 조선업 부흥에 박차를 가하는 일본의 맹렬한 추격을 받는 상황이다. 특히 중국의 경우, 우리가 유럽 조선업을 따라잡았던 방식, 즉 저임금-단기제작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조선업이 살아남는 방법은 '하청의 마른수건짜기'다. 연극 <말뫼의 눈물>은 이러한 '마른수건 짜기'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다양한 조선소 인간군상을 통해 섬세하게 표현한다. 여기서 사용되는 소재들은 모두가 현실에서도 그대로 진행되고 있는 '팩트'이다.
이를 통해 이 연극은 '사람'의 가치가 사라진 노동 현장의 구조적 문제를 역설하며, 산업 중심으로만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묘한 여운을 남긴다. 불편한 작금의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다면 이 연극을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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