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동북아 냉전의 질곡을 타개할 수 있는 빅이벤트들이 우리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남북·북미 정상회담 모두 비핵화를 핵심의제로 다룰 예정이어서 해빙에 대한 기대를 더욱 높이고 있다.
그동안의 오랜 냉전은 우리의 정서와 문화, 정치, 경제에 너무 깊은 영향을 미쳐왔다. 그래서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서구의 냉전이 와해된 것처럼 2018년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이 동북아와 한반도의 냉전 붕괴일로 기록되기를 기대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세계정치의 현실은 섣부른 낙관을 막아선다. 미국, 중국, 일본 모두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바라고, 이를 위해 국제사회가 협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 이들이 펼치는 외교안보전략을 살펴보면 자신들의 국익과 번영을 추구하고 있을 뿐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한반도 문제의 근본적 해결, 남북한의 화해와 통일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는 것이다.
먼저 미국을 보자. 미국은 지리적으로 동북아에 위치한 것은 아니지만 동북아에 너무 많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고, 사실상 동북아에서 패권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동북아국가로 간주된다.
1‧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영국을 넘어 세계 유일 초강대국이 된 미국은 1970년대 베트남 전쟁 실패 이후 이른바 '슈퍼 파워' 지위를 위협받아 왔다. 1980년대 말에는 일본이, 지금은 중국이 미국의 경제패권을 흔들고 있다. 중국은 이미 두 척의 항공모함을 가진 데 이어 지속적으로 국방비를 증액하면서 미국의 군사적 패권에 도전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은 미주에서, 그리고 동북아에서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자원과 노력을 쏟고 있다. 작년 12월 발표한 '국가안보전략'(National Security Strategy)은 중국과 러시아를 미국을 위협할 수 있는 '경쟁자들'(competitors)로 규정해 놓고 있다.
발표 당시 이를 설명하던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안보 핵심관료들은 중국과 러시아를 '현상변경세력'(revisionist powers)로 분명히 규정했다. 지금의 질서를 바꾸려고 하는 나라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위험한 잠재적국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기본 인식을 바탕으로 미국은 중국의 성장을 저지하는 전략을 펴고 있다. '역외균형전략'(off-shore balancing strategy)이다. 아시아 바깥에 있으면서 중국이 아시아의 패권국이 되는 것을 막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의 대미 수출품에 관세를 부과하기로 한 것은 중국 경제 패권 저지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국방비를 대폭 늘리고, 최첨단무기 개발을 계속하고, 항공모함을 한반도 인근에 전개하고, 북핵 해결을 위해서는 '모든 옵션'을 동원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 것은 중국의 군사적 패권을 막으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 한국, 필리핀, 싱가포르, 인도, 파키스탄 등과의 경제·안보 협력을 강화하는 것은 중국을 완전 포위해 아시아에서 경제적·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중국을 저색하려는 움직임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남중국해에서 미국의 활동 강화와 인근 필리핀, 베트남, 타이완 등과의 협력강화는 중국의 아시아 해양패권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의지를 분명하게 확인시켜 준다.
문제는 미국의 역외균형전략이 한반도의 해빙에는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군사안보전략도 중국과 러시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하겠는데, 대표적인 것이 MD(미사일 방어체계)이다. 잠재적 적국 중국·러시아를 겨냥해 MD를 지속 개발해오고 있다. 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도 그 체계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대놓고 '중국·러시아를 향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잠재적 적국이지만 우선 경제를 중심으로 한 협력은 계속해야 한다. 그래서 내세운 것이 북한과 이란이다. 북한·이란이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서는 MD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국의 MD 개발에 북한이 중요한 명분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미국입장에서는 '조금씩 문제를 일으켜주는 북한'이 필요한 상황이다.
지금까지 미국은 소련, 북베트남, 이란, 탈레반, 북한 등 많은 적들과 긴장을 지속하면서 군사안보전략을 추진해왔다. 그 속에서 많은 무기도 팔 수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군산복합체를 성장시켜 왔고, 특히 공화당은 군수산업체들로부터 많은 정치자금도 받을 수 있었다. 미국은 시기에 따라 적을 만들면서 미국 위주의 세계전략을 펼쳐온 것이다.
그런 미국이 갑자기 북한과 화해하고 평화로운 한반도와 동북아를 원하게 된 것인지, 그 속에서 더 많은 국익을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선 것인지, 분명치 않다.
중국은 어떤가? 중국은 진정 북미가 화해하고, 남북이 평화로 가는 것을 바라는 것인가? 아직은 '아니다' 쪽이 답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중국은 경제를 지속 성장시켜 미국을 넘어서려 하고 있다. 국가주석 임기 폐지로 장기집권을 추구하고 있는 시진핑(習近平)으로서는 민심을 얻기 위해 지속성장이 꼭 필요한 상황이다. 북미관계·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 그에 따른 북한사회의 동요와 탈북자 급증은 중국으로선 반가운 일이 아니다. 동북3성의 조선족과 대량 탈북자들의 연계는 소수민족의 강화를 경계하는 중국에게는 우려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은 경제력에 걸맞는 정치적 영향력도 확보하려 한다. 도광양회(韜光養晦. 빛을 감추고 힘을 기른다)는 먼 옛날 얘기가 됐고, 이제는 분발유위(奮發有爲. 떨쳐 일어나 해야 할 일을 한다)를 내세운다.
우선은 동북아에서 영향력 확보가 급선무이다. 그러려면 미국을 넘어서야 한다. 북미관계와 남북관계가 좋아지는 상황은 미국이 중국의 코앞에 창을 들이대게 되는 것과 다름없다.
반면, 지금처럼 한반도가 긴장상태를 유지하면서 북한이 어느 정도 문제를 일으켜 주는 것은 중국의 동북아 영향력을 점증시키는 데 유리하다. 장막 속의 북한에 사람과 물자를 보내면서 무슨 얘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중국밖에 없다. 실제로 2003년 6자회담이 시작되고, 중국이 의장국을 맞으면서 동북아에서 중국의 목소리가 커졌다.
장기적으로 중국은 북한과 혈맹관계를 존속시키면서, 경제적·정치적으로 이를 활용하는데 커다란 국익을 갖고 있다. 북한의 많은 자원을 활용할 수 있고, 국제사회에서 지원세력이 아쉬운 중국으로서는 북한의 외교적 지원도 필요하다.
중국은 북한과 역사적으로, 이념적으로, 전략적으로 강한 연대도 유지해 왔다. 김일성의 항일유격대는 중국공산당군 내에서 활동하면서 무장투쟁을 했고, 지구상의 몇 안 되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라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으며, 서로 정치적으로 필요하다는 인식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중국으로서는 북한도, 동북아 질서도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현상유지(status quo)가 바람직한 것이다.
이제 일본을 보자. 아베 정권은 철저하게 현실주의를 따른다. 경제력과 군사력을 키워 동북아 주도권 경쟁에서 중국을 넘어서려 한다. 돈을 풀어 경제를 살리는 '아베노믹스'로 경제력 확장을 꾀하고 있다. 군사력을 통해 세계와 지역의 평화에 기여한다는 '적극적 평화주의' 기치 아래 군사력 강화도 도모하고 있다. 아예 평화헌법을 개정해 전쟁 가능한 보통국가로 가려 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외교안보전략은, 동북아에서 부담은 줄이면서 패권은 유지하려는 미국과 이해를 같이 한다. 그래서 미일 동맹은 강화되어 왔다. 일본은 미국의 중국포위전략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강경한 외교안보전략을 추진하고 군사력을 강화하는 일본이 우선 명분으로 삼고 있는 것이 북한이다. 북한이 계속 문제를 일으키니 일본도 강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전략은 동북아의 냉전 구조에 기반을 둔 것이다. 중국-러시아의 대륙세력과 일본-미국의 해양세력이 맞서는 냉전구조가 아베 정부 외교정책의 기저에 깔려있는 것이다. 북미관계의 개선은 이러한 구조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고 아베정부 외교 안보 전략의 바탕을 흔드는 것이다. 그러니 일본은 여기에 박수를 보내고 있을 입장이 아니다.
북미 정상회담 전 아베가 트럼프를 만나려고 하는 이유도 그래서 분명하다. '북한이 핵·미사일 개발을 위한 시간을 벌려고 하는 대화에 너무 기대를 갖지 마라'라는 얘기를 트럼프에게 전하려는 것이다. 북미 관계 개선에 되도록 찬물을 끼얹고 싶은 것이다. 과거 6자회담장에서도 핵문제 해결보다는 일본인 납치사건 해결에 더 관심을 쏟으면서 회담진행에 부담을 주었던 일본이다.
남북관계 개선도 일본 입장에서는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다. 남북이 반목하는 것보다 남북이 한 목소리로 동북아에서 지분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일본으로서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과거 식민지였던 나라가 인구 8000만 명에 육박하는 큰 나라가 돼가는 상황이 일본으로서는 달가울 리 없다. 영토문제, 역사왜곡, 신사참배 등 일본 보수파세력이 정치적 목적으로 즐겨 활용하는 소재들도 8000만 코리아의 상황에서는 함부로 이용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일본이 가지고 있는 전가의 보도가 있다. 납북자문제다. 북한과 관련해서 일본인들이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사항이기도 하다. 이 문제를 들먹이면 일본인들은 북한에 대해 곧 싸늘해진다. 보수세력은 북한을 괴이한 존재로 부각시키고 싶을 때면 납북자문제를 들먹인다.
2002년 북일 정상회담 후 납북 일본인 5명이 열흘 뒤 귀환을 조건으로 일본에 귀국했다. 당시 관방 부장관 이던 아베 주도로 일본은 약속을 깨고 이들을 귀환시키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아베는 보수층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고, 2006년 총리가 되었다. 북미관계·남북관계가 개선되어 간다면 일본은 또다시 납치자 문제를 인권문제, 인도적 문제로 크게 부각시키면서 북한을 악마화하는 데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요컨대, 미국은 중국 견제에 주력하기 위해 이른바 불량국가(rogue state) 북한이 필요하고, 중국은 동북아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긴장된 남북관계가 나쁘지 않으며, 일본 역시 북한을 명분으로 강력한 외교안보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동북아 주요삼국 가운데 열일 제쳐두고 한반도 냉전 해체에 발벗고 나서려 하는 나라는 없는 것이다.
한반도 문제 해결의 주역은 한반도일 수밖에 없다. 남북이 합의하고, 지향점을 만들어 가면서, 탐탁치 않아 하는 주변국들을 설득해가야 할 것이다.
소련도, 영국도, 프랑스도 모두 처음엔 독일통일에 반대했다. 하지만, 동서독이 신속하게 경제·사회 통합에 합의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독의 콜 총리가 고르바초프, 대처, 미테랑을 설득해 내면서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우리에게도 주변국의 입장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더욱 중차대한 건 남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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