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9월 당시 과학기술처는 "최근 쾌적한 삶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증대됨에 따라 환경 및 원자력안전에 관한 국민적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정부는 원자력안전규제의 목표와 원칙을 정하여 원자력 안전성 확보를 위한 정부의 정책의지를 천명하고자 한다"는 '원자력안전 정책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원자력을 개발하고 이용함에 있어 안전성 확보는 기본전제이므로 원자력 관계 업무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이 안전우선 원칙을 철저히 준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 성명서를 읽다 1979년 3월 미국 쓰리마일 섬(TMI)에서의 원전사고에 이어 1986년 4월 구소련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터지면서 원자력 시설의 부지 선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문구 앞에서 원자력 안전에 대한 국민들의 부정적 인식을 해소하려는 차원에서 작성되었음을 알게 됐다. 원자력 관계자 모두가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도 했다.
정부 단위에서는 원자력안전이 최고의 목표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국제수준의 원자력 안전성 확보, 안전기술의 선진화, 그리고 안전규제제도의 국제화와 합리화를 달성하는 것을 강조했다. 이외에, 국제원자력기구가 제시한 안전문화를 조기에 정착 시키는 것을 목표로 원자력 관련한 모든 기관의 최고관리층에서부터 개인에 이르기까지 안전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인식을 주문했다.
성명서가 나오고서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었지만 원전 종사자들의 안전지수 내지 안전문화는 얼마나 개선되었는가. <한국 원전 잔혹사>(2014년 출간)는 대한민국 원자력계의 어두운 그림자를 낱낱이 고발하는 보고서다. 한마디로 '원자력에 대한 사회의 감시와 통제가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들만의 리그'로 운영되는 원전은 재앙의 불씨를 안고 있는 시한폭탄이다.
돌이켜보면 TMI와 체르노빌 사고는 설비 문제와 인적 요소가 결합되어 발생한 반면, 후쿠시마 참사는 진도 9의 초강력 지진과 설비, 그리고 인적 요소가 합해져서 발생한 복합 사고였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다행히 국내에서는 원자력 참사가 발생한 적은 없지만 원전은 의외로 자주 정지한다.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 자료에 따르면 1978년 가동을 시작한 고리원전 1호기 경우 사고 및 고장으로 130차례 멈췄다. 여기에다 2012년 2월 발생한 고리원전 1호기 정전 사고의 은폐와 원전 납품 비리 사건은 인재(人災)로 발생한 원전 정지가 원전 참사로 이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음을 알리는 경고음이었다.
쉽게 말해, 원자력발전소는 기계이다. 기계는 언젠가 고장이 나게 마련이다. 그리고 사람이 원전을 운전한다. 인간은 예외 없이 실수를 한다. 따라서 크고 작은 사고는 반드시 일어날 수 있음을 전제해야 합리적이다. 한번 사고로 모든 것이 '종료'인 상황이 올 수 있다. 방사능 노출도 마찬가지다. 원자력 진흥론자들은 '기준치'를 거론할 것이 아니라 더욱 엄격하게 방사능 안전을 이야기함이 옳다.
정부는 오래전 성명서에서 안전규제 원칙과 관련해서 원자력 시설의 안전에 관한 궁극적 책임이 사업자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 동시에 원자력의 개발 및 이용에 수반되는 방사선 위해로부터 국민과 환경을 보호하는 포괄적인 책임을 진다고 명시했다.
현행법에 따르면 원자력 안전규제는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규제행정을 실시하도록 되어있다. 그렇다면 원안위가 관련 법과 규정에 따라 안전제고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일찍이 함석헌 선생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열변을 토했다. 불과 몇 해 전 후쿠시마 재앙을 생생하게 목격하고서도 여전히 원자력의 위험을 확률 문제로만 치부하고 원자력만이 살길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교만이자 위선이자 지적 사기다. 생각이 없는 백성인 셈이다.
사회의 모든 가치를 오로지 비용과 편익으로만 생각하면서 성장과 개발만을 탐닉하고 쫓아가는 무리들에게 그 끝이 자칫 공동체의 공멸로 이어질 수 있다는 자성적 목소리가 원자력계 내부에서 나올 때가 됐다.
사족 하나. 지옥의 가장 고통스러운 장소는 위기의 순간에 중립만을 지킨 사람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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