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비굴할 정도로 미국에 의존적이거나 종속적이었다. 나라 안팎에서 '미국의 51번째 주 (the 51st state of the United States)'라고 조롱당할 정도였다. 이러한 과거를 되돌아보면 앞으로 미국과의 대등한 관계를 지향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1945년 8월 한반도 해방과 분단부터 미국이 어떻게 개입하고 무슨 역할을 했는지 주로 미국 정부의 외교문서를 바탕으로 들여다보려고 한다. 미국 국무부는 외국과의 중요한 관계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를 대략 30~40년 뒤 당시 비밀에 부쳤던 외교문서를 풀어 공개한다. 2018년 4월 현재 1970년대 한국과의 관계까지 비밀 해제한 상태다.
반세기가 훨씬 지난 오래 전부터의 역사이기에 연대순으로 소개하기보다 기념일에 맞춰 연재를 이어갈 계획이다. 4월엔 "4월 혁명과 미국의 개입"을, 5월엔 "5.16쿠데타와 미국의 역할"을, 6월엔 '6.3사태'를 떠올리며 "한일협정과 미국의 압력"을 다룬다.
이어 7월엔 '7.27 휴전협정'을 맞아 최근 논의되고 있는 남북미 정상회담과 종전협정을 염두에 두고 "미국이 주도한 한국전쟁과 정전협정"을, 8월엔 '8.15광복절'을 기념하며 "한반도 해방 및 분단과 미국"을 연재할 예정이다. 많은 조언과 비판을 기대한다.
1. '4월 혁명'이란 명칭에 관해
나는 '4월혁명'과 '4.19혁명'이라는 명칭 사이에서 '4월 혁명'을 선호한다. 1960년 3월 15일의 정‧부통령 부정선거에 따른 시위가 4월 19일 하루에만 일어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날 시작되거나 끝난 것도 아니다.
1960년 2~4월 전개된 상황을 간단히 소개한다. 2월 28일,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자유당의 부정선거 운동과 관련해 최초로 데모를 일으켰다. 투표일인 3월 15일, 마산에서 대규모 군중시위가 일어났다. 4월 11일, 3월 15일의 시위에 참여했던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신으로 마산 앞마다에서 발견되자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총궐기선언문을 발표하고 서울 시내를 행진하고 돌아오다 대한반공청년단 소속 폭력배들에게 습격을 받았다. 4월 19일, 서울의 대학생들과 중고등학생들이 대규모로 데모를 벌이며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까지 몰려갔다. 경찰은 총과 포를 쏘고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4월 23일, 이기붕이 부통령 당선자 사퇴를 고려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4월 25일, 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서도 서울에서 대학교수들이 시국선언과 시위행진을 했다. 이는 대규모의 군중 데모로 이어졌다.
4월 26일, 아침부터 최소 5만 명의 시위대가 서울의 중심부를 행진했다.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조건부'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4월 27일, 이승만이 사직서를 국회에 제출하고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이러한 상황 전개를 '4.19혁명'이라고 부르는 게 적절할까?
이와 관련해 당시엔 가장 많은 발행 부수와 영향력을 자랑하던 <동아일보> 1960년 7월 28일자 기사를 그대로 소개한다.
"문교부에서는 4.19혁명의 용어를 각양각색으로 호칭하고 있어 아동 교육에 적지 않은 혼동을 가져오고 있는데 비추어 이러한 폐단을 일소하기 위하여 그간 동부 (同部)에서는 언론계인사와 대학교수 110여명으로부터 통일 방안을 설문하였던 바 그 다대수가 '4월혁명'이라는 데 찬동하였으므로 이를 채택하여 (중략) 전국 각급학교에 그 취지를 통고하여 통용화할 것 (중략) 신년도 교과서에도 전기와 같이 통일 호칭으로 편찬할 것"
그 후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이를 '5.16혁명'으로 미화하면서 4월 혁명을 '4.19의거'로 깎아내렸다. 1993년 김영삼이 이른바 '문민정부'를 세우고 '4.19의거'를 '4.19혁명'으로 고쳐 불렀다.
2. 4월 혁명에 관한 정부 자료와 왜곡된 사실
1960년 4월 혁명에 관해 한국과 미국 정부가 외교문서를 공개한 현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케네디 대통령 기념도서관 (JFKL)이 1980년대부터 장면 정부에 관한 문서를 부분적으로 공개하기 시작했다. 둘째, 국무부가 4월 혁명 전후의 한국 상황을 다룬 외교문서를 1994년에 비밀 해제하여 책으로 출판했다. (책 제목은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8-1960, Volume XVIII'
위의 자료를 바탕으로 우선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왜곡된 사실이나 해석 몇 대목을 지적한 뒤 자세한 내용을 밝힌다.
1) 이승만의 하야 성명에 관해
이승만이 1960년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러나 "국민이 원한다면" 이라는 단서를 단 '조건부 하야' 또는 '하야 고려' 성명이었다.
매카노기 (Walter Patrick McConaughy) 주한미국대사가 매그루더 (Carter Bowie Magruder) 주한미군 사령관과 함께 경무대를 방문해 이승만에게 "국민이 원한다면"이라는 단서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국민의 뜻을 어떻게 결정하겠느냐며 그 성명이 유보적이고 단서 조항이 분명하지 못하다고 지적한 것이다.
이승만이 계속 미적거리자 매카노기는 "한국민의 정당한 요구"뿐만 아니라 "미국의 근본적 이익"까지 위험에 처해 있다고 우려했다. 그리고 이승만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연로한 대통령을 죠지 워싱턴 (George Washington)에 비유하며 회유하기도 하고 압력을 넣기도 하며 은퇴하도록 이끌었다. 이에 이승만은 다음날 4월 27일 대통령 사직서를 국회에 제출하고 마침내 사임 성명을 발표했다.
2) 이승만의 하야 배경에 관해
언론인 이상우는 1988년 펴낸 <군부와 광주와 반미>에서 다양한 자료를 제시하며 이승만이 미국의 압력에 의해 물러난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의 글을 그대로 옮긴다.
"26일 아침 매카나기 대사의 세 번째 경무대 방문은 이승만의 부름에 따른 것이었다(중략) 매카나기 대사의 마지막 경무대 방문이 시간적으로 하야 성명과 비슷하게 중복되었기 때문에, 국민들 가운데는 이승만의 하야 결단이 매카나기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러한 오해는 그 후로도 꽤 오래 계속되었다 (중략) 어느 미국인도 이승만을 상대로 직접 하야를 권유한 적은 없었다 (중략) 미국이 아무리 한국의 후견국이었다고는 할망정, 그리고 4.19 당시의 사태가 미국의 극동정책과 관련하여 몹시 급박한 상황이었다고 할지언정, 현지 대사가 대통령을 맞대놓고 그만두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한우 <월간조선> 기자 역시 1995년 4월호에 실은 '4.19시위대 대표 유일라씨의 시간대별 증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승만이 미국의 압력에 의해 물러난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1960년 4월 26일 아침 경무대에서 이승만을 면담했다는 유일라 당시 학생대표를 인터뷰한 뒤 그가 대통령의 하야를 건의한 후 이승만이 성명을 발표했다는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압력이 아니라 국민의 뜻에 따라 하야를 결심했다는 결정적 증거"라고 단언한 것이다.
여기서 이상우와 이한우는 매카노기 대사와 실바 (Peer de Silva) 미국 중앙정보국 (CIA) 한국지부장이 4월 25일부터 전화로 이승만에게 압력을 넣은 사실을 몰랐거나 빠뜨렸다. 이승만이 26일 학생대표단을 만난 것이나 미국 대사를 부른 것은 매카노기와 실바의 전화를 통한 압력이 가해진 이후였다.
3) 미국의 개입 강도에 관해
이승만이 4월 27일 대통령직을 사임하자 워싱턴 정가에 한국에 대한 미국의 내정간섭이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이에 아이젠하워 (Dwight D. Eisenhower) 대통령이 4월 27일 기자회견을 갖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부정선거에 관한 우려를 "우호적인 태도로" 표명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는 1960년 4월 28일 아이젠하워가 "미국은 어떠한 종류의 간섭도 절대 한 적이 없다 (no interference of any kind was ever undertaken by the United States)"고 단호하게 부인했다고 보도했다.
이와 달리 미국 외교문서는 4월 혁명 과정에서 미국이 지나친 간섭과 도를 넘는 압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한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앞에서 밝혔듯, 주한미국대사와 주한미군사령관 그리고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장 등이 깊이 개입했다.
나아가 이승만이 물러난 뒤 들어선 허정 과도정부는 미국의 더 적극적 간섭을 요구하며 장관 임명에 대해서까지 주한미국대사의 동의를 구할 정도였다.
4) 미국의 개입 의도에 관해
많은 한국인들은 독재정권 전복이라는 목표 때문에 미국의 내정간섭에 의혹이나 불만 또는 분노를 터뜨리기는커녕 열렬하게 환영했다. 4월 26일 아침 매카노기가 경무대를 향할 때 시위군중은 박수를 치며 환영했고, 그가 나올 때는 "미국 만세"와 "매카나기 만세"를 부르며 그의 차를 따라 미국대사관까지 행진했다.
<뉴욕타임스> 1960년 4월 27일 자에 따르면, 그 날 저녁 학생들이 이기붕의 집에 들어가 가재도구를 꺼내 불태울 때 대형 성조기를 발견하고는 취재 중이던 미국인 기자에게 건네주기도 했다. 당시의 한국인들에게는 미국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켜준 '세계 평화와 자유의 수호자'로만 보였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1983년 출판된 <4월혁명론>에 실은 '4.19의 역사적 의의와 현재성'이란 논문에서 주한미국대사가 경무대를 방문해 각서를 전달하고 항의한 것은 미국이 "안보와 미국의 국가이익"보다 "(한국인들의) 인권"을 중시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잘못된 해석이다. 미국은 예나 지금이나 안보를 비롯한 미국의 이익을 앞세우지 않은 대외정책을 펼친 적이 전혀 없다. 미국은 1961년 5월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와 1980년 5월 전두환의 광주학살까지 용인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기 나라의 안보와 이익보다 다른 나라의 인권을 더 중시하는 대외정책을 펼치는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참고로, 1950년대 진보당 서울시당 간부로 일했던 정태영 박사는 <역사비평> 1990년 겨울호에 실은 '조봉암 사형, 미국은 왜 침묵을 지켰나'라는 글에서 조봉암 진보당 당수 처형에 대한 미국의 불간섭 의혹과 불만을 드러냈다.
정 박사는 "제3세계의 친미독재 체제가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정치 인사에 대해 정치적인 살인을 가했을 때 '의례적인 항의'를 표시하던 미국이 유독 진보당 사건에 대해서만은 왜 한 마디의 논평조차 하지 않았을까"라며, 조봉암이 이미 미국에게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 것이다.
아니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했지만 실패했다. 물론 조봉암을 비롯한 한국인의 인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안보와 이익을 위해서 개입했다. 1958년 다울링 (Walter C. Dowling) 주한미국대사가 이기붕 국회의장에게 조봉암 사형을 막아달라고 두어 번 요구하면서 경고하기도 했던 것이다.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한국 정부가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을 반역죄로 규정할 경우 미국이 유엔에 상정한 한반도 통일방안에 대한 지지조차도 범죄시 될 수 있었고,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에 관한 미국의 영향력을 손상시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조봉암에 대한 사형 집행이 1950년대부터 일어난 비동맹운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할까봐 우려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한국을 '자유 세계의 진열장'으로 삼아 비동맹국가들에게 이념 공세를 취하고자 했는데, 조봉암 사형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훌륭한 선전거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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