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이승만 정부 (1948-1960) 시기 문학예술 속의 일그러진 미국
5. 음악 속의 미국
1948-49년 제주 항쟁이 진압될 때 피로 물든 그 섬에서 많은 여인들이 즐겨 부른 민요가 있었다.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을 빈정대는 내용이었다. 미국인들은 아무 쓸모도 없고, 이승만 정권은 매국노들에 의해 세워진 괴뢰 정권이라고 풍자한 것이다. 나아가 자본주의자들은 곧 사라지고 남한 정부는 무너지리라는 희망도 담았다. 미 군정의 식민정책과 이승만 정부의 독재정치가 불러온 민족 갈등과 계급 갈등을 제주의 여인들이 이 노래를 통해 드러낸 것이다. 제주의 빨치산들을 비롯해 남자들은 <적기가>(붉은 기의 노래)와 <해방가> 그리고 <제주도 빨치산의 노래> 등 전투가를 즐겨 불렀다.
한국전쟁으로 분단이 굳어지자 민족 분단에 따른 좌절감이나 북쪽의 고향에 대한 향수를 실은 유행가들이 등장했다. 한정무가 부른 <꿈에 본 내 고향>(1951),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1951), 고태원의 <판문점의 달밤>(1954), 최갑석의 <삼팔선의 봄>(1958), 손인호의 <한 많은 대동강>(1959) 등을 들 수 있다.
이 노래들은 반미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한반도를 분단시킨 외세들에 대한 원한과 분노를 어느 정도 담고 있다. 당시 많은 한인들의 심장엔 깊은 향수나 뜨거운 귀소 본능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얘기했듯,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반공 친미적 이승만 정권 아래서 특히 한국전쟁을 거치며 거의 표출될 수 없었다.
1953년 휴전협정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자 이승만 정부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들까지 동원해 휴전 반대 데모를 벌이도록 했는데, 이에 일단의 음악인들이 휴전을 반대하는 내용의 노래를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휴전협정을 적극 추진하는 미국의 정책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극렬한 휴전 반대 및 북진통일 주장은 미국의 '이승만 감금 및 제거 계획'을 불러왔다. 1953년 4월 극비리에 세워진 '에버 레디 계획'(Ever Ready Plan)으로, 미군이 이승만을 감금하고 새로운 군사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참고로, 이승만은 1948년 미국에 의해 한국의 지도자로 선택되었지만, 1950년대 초 부산 정치 파동, 휴전 반대, 반공 포로 석방 등으로 미국에 의해 두 번이나 감금 또는 제거되려다, 결국 1960년 4월혁명 과정에서 미국의 버림을 받게 되었다.
휴전협정 이후엔 대부분의 기지촌 소설이 그랬듯, 민족주의를 고취시키기 위해 양공주를 등장시킨 유행가도 나왔다. 예를 들어, 안다성은 1959년 <에레나가 된 순이>에서 '순이'라는 이름의 순박한 소녀가 '에레나'라는 이름의 양공주가 된 것을 신파적으로 들려준다. 미국식으로 "이름조차 에레나로 달라진" 여인으로 변하고 "말소리도 이상하게 달라진"여인으로 바뀌어 파티에서 춤추는 모습을 애절하게 그리고 있다. 이 노래는 1980년대 반미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때 가사가 조금 바뀌어 부활하기도 했다. 이른바 '노가바'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의 대상 음악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6. 연극과 미국
이승만 정부 아래서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표출한 연극이 공연된 기록은 찾기 어렵다. 미군정 시대 반미감정을 담아 농민이나 노동자 연극을 무대에 올렸던 다수의 좌익 연극인들은 이승만 정부가 세워진 뒤 특히 한국전쟁 중에 38선 이북으로 넘어가거나 우익으로 전향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승만 정부 초기에 정치성이 있는 연예 활동은 다양한 제재와 지속적 억압을 받았기 때문에, 대중적 연극만 공연될 수 있었다. 이런 가운데 <검둥이는 서러워>라는 제목의 연극이 상영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인기를 끌지도 못했고 자세한 내용도 알 수 없기에, 제목을 통해, 미국의 인종차별을 묘사함으로써 어느 정도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담지 않았겠느냐는 추측만 제기할 수 있을 뿐이다.
7. 영화와 미국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자 많은 한국 영화는 반공을 강화하기 위해 남북한 사이의 이념적 갈등을 소재로 삼았다. 1949년 제작된 모든 영화 가운데 4분의 1이 반공 영화였다. 예를 들어, 한영모 감독의 1949년 작품 <성벽을 뚫고>는 1948년 10월 여수-순천 지역의 반란을 묘사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부가 제작비를 제공한 이 반공 영화는 해방 이후 3대 명화 가운데 하나로 뽑혔다.
이와 비슷하게 이강천의 <피아골>(1955)은 1940년대 말부터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지리산 주위에서 전개된 빨치산 활동을 극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 '반공' 영화는 부분적으로 '친공' 빨치산들을 묘사함으로써 고초를 겪었다. 이와 관련해, 소설 <남부군>의 저자이자 빨치산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지냈던 이태(필명, 본명 이우태)는 1940~50년대 빨치산 활동이 '반미 민족해방 투쟁'이었다고 분명히 증언했다. 이승만 정부에서는 지난날의 반미 투쟁까지 반공을 강화하는 영화의 소재로 삼으려 했던 것이랄까.
8. 요약 : 이승만 정부 문학예술에 비추어진 미국
1940년대 말 한국의 문인과 예술인들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표출했다. 미국과 남한의 극우 세력이 한반도 분단을 영구화하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문학예술 분야에 나타난 반미감정의 배경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군 점령이 공식적으로 끝나긴 했지만, 미 군정에 대한 비판은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둘째, 한반도 분단의 고착에 따른 좌절과 비탄이 그치지 않았다. 셋째, 한국에 대한 미국의 문화적 영향, 특히 청소년들의 비행이나 성적 도덕성의 타락 등 폭력이 만연되는 것에 대한 거부와 분노의 표출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엔 문학과 예술 작품에서 반미감정이 거의 표출될 수 없었다. 크게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미군 점령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많은 좌익 작가와 예술가들이 6.25전쟁이 실질적으로 끝날 때까지 월북하거나 우익으로 전향해버렸다. 둘째, 이승만 정부가 지속적으로 반공과 동시에 친미주의를 강화했다. 심지어 미국에 대한 언급 없이 한반도 분단에 대한 슬픔이나 원망을 표현하는 것조차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는 사회에서는 처벌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셋째, 미국이 6.25전쟁에 참여하고 휴전 이후엔 남한의 재건을 지원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호의적 인상을 심어주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미군들이 한국인들을 경멸하고 강간과 살인 등 범죄를 빈번하게 저지름에 따라 미국인들에 대한 인식이 다시 바뀌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의 이러한 오만함과 범죄 행위는 한국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고, 손상된 민족적 자존심은 반미감정으로 변해 기지촌 소설 등을 통해 표출되었다.
한편, 미군과 주로 매춘부들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들은 많은 한국인들로부터 경멸과 조롱을 받았다. 이는 반미감정을 드러낸 것이라기보다 한국인들의 자기 민족 중심주의를 바탕으로 한 국제결혼에 대한 반감의 표출로 해석하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특히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나 외국인 혐오증을 나타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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