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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의 20년, '강남좌파'에서 '아스팔트 우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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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의 20년, '강남좌파'에서 '아스팔트 우파'로

강남 3구·대형교회 지원에도 '낙동강 전선'서 전사…활로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24일, 스스로 만든 '망국적 복지 포퓰리즘과의 전쟁'에서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지난 2000년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나서 압도적 표차로 당선된 이후, 최고위원, 정계특위 간사, 재선 서울시장 등을 거치며 그야말로 승승장구했지만 자승자박한 것이다.

오 시장이 향후 어떤 방식으로 정치적 재기를 할 수 있을지는 예측하기 힘들지만, 이미 내년 대선 불출마와 시장직 사퇴를 선언해놓았기 때문에 상당기간 와신상담의 세월을 보낼 것으로 보인다.

환경운동하며 민변 회원이던 '오 변호사'

▲ 스스로 만든 전선에서 패배한 오 시장은 과연 재기할 수 있을까?ⓒ프레시안(자료사진)

주민투표 과정에서 보수-진보 간 낙동강 전선의 수호자로 불리며 강경보수 진영의 성원을 한 몸에 받았지만 사실 오 시장은 '강남 좌파'의 원조로 불릴만한 인물이다.

1983년에 고려대학을 졸업하고 1984년 사법고시에 합격한 오 시장은 동년배의 다른 많은 정치인들과 달리 학생운동 경력은 전혀 없다. 평범한 학생으로 대학편입-고시공부에 전념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1994년 MBC 텔레비전의 '생방송 오변호사 배변호사' 진행을 맡으며 얼굴을 알린 후 시민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96년부터 환경운동연합 법률위원장과 시사저널 편집자문위원을 지냈고 1997년부터는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 환경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게다가 SBS 시사프로 '그것이 알고싶다', 시사토론 '오늘과 내일'사회를 맡으면서 훤칠한 외모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지도와 긍정적 이미지를 쌓아갔다. '운동권'과는 거리가 있지만 '개혁적' 활동이라기에는 부족함이 없던 이력이었다.

'개혁파 의원'에서 '강금실 바람'을 잠재우기 까지

이런 까닭에 오 시장은, 여야 모두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진실공방이 벌어지고 있지만 김정길 전 정무수석과 정균환 전 새정치국민회의 원내총무는 "오 시장이 우리(민주당 쪽) 공천을 받으려고 했지만, 지역구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한나라당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폭로한 바 있다. 이는 그가 우상호, 임종석 등과 함께 당시 새정치국민회의로 갔어도 전혀 이상할 것 없었던 인물이라는 방증도 된다.

우여곡절 끝에 16대 총선 '젊은 피' 영입케이스로 한나라당 강남을 공천을 받은 오 시장은 무난히 당선됐다. 한나라당 내에서도 원희룡, 남경필, 정병국 등과 미래연대를 결성해 당내 개혁을 주창했고 정계특위 간사를 맡으면서는 이른바 '오세훈법'으로 불리는 정치자금법개정안을 밀어붙였다. "너만 살려고 하냐"는 원성에는 '쿨'하게 '17대 총선 불출마'로 화답했다.

장외에서 환경운동연합 집행위원, 청호나이스 정수기 광고 모델 등으로 세월을 낚고 있던 그는 드디어 2006년 기회를 잡았다.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이 열린우리당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면서 '보랏빛 돌풍'을 일으키자 한나라당에선 "오세훈 밖에 답이 없다"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장외에 있던 오 시장은 당으로 돌아와 당시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맹행규, 홍준표라는 두 중진들을 손쉽게 꺾었고 본선에서도 강금실 바람을 어렵잖게 잠재웠다. 그는 서울시장 선거과정에서도 굳이 강 후보와 강한 대립각을 세우려 하지 않았다.

정치 초년병인 강 전 장관인 공세를 펼쳐도 그는 "그것도 맞는 말씀이다.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고 받아넘겼다. 사람 좋은 웃음, 자전거를 타고 서울 시내를 휘젓는 '친환경 후보 이미지'가 오 시장의 큰 무기였다.

날선 목소리와 어휘, 매서운 눈매로 야당과 교육감을 공격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던 것.

"뉴타운 못 늘린다"고 버티던 시절도 있었는데

사실 오 시장은 첫 임기 때도 그리 논쟁적 행보를 펼치진 않았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의회와 자치구의 90% 가량을 한나라당이 석권한 탓에 발목이 잡힐 일도 없었다.

오히려 오 시장은 때론 한나라당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2008년 18대 총선에 나선 한나라당 후보들이 너도나도 "오 시장과 약속했다"면서 뉴타운, 특목고 공약을 남발했지만 오 시장은 총선 이후 "섣불리 뉴타운을 확대할 수 없다"며 지구지정을 추가하지 않았다.

속이 탄 한나라당 '뉴타운돌이'들이 "실력행사를 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오 시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잔디' 별명 붙더니 급기야 '5세 훈이'로

그런데 첫 임기 후반으로 가면서 오 시장은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청계천과 버스 중앙차로·환승제 등 대중교통 체제 정리라는 치적을 가진 전임 이명박 시장과 차별화를 원한 것인지 모르겠다.

"서울을 뉴욕, 파리와 같은 명품 도시로 만들겠다"는 일성과 더불어 부쩍 '분칠'이 늘어갔다. 서울시가 뜬금없이 영국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광고 스폰서가 되는 등 광고 홍보 예산이 급증했다.

디자인 올림픽, 한강르네상스 사업 등 '민생'과는 거리가 있는 사업이 줄줄이 벌어지는가 했더니 광화문 광장 한 복판에서 스노보드 대회가 열리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멀쩡한 광화문을 뜯어 잔디를 깔면서 '오잔디'라는 별명이 붙었고 비토론도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서울시 부채는 점점 늘어났고 급기야 용산참사도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손쉽게 당내 경선에서 이겨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재선에 도전했다. 선거 기간엔 각종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한명숙 후보를 멀찍이 따돌려 여유있는 모습을 보였다.

'용궁' 다녀와서 더 엇나가기 시작해 결국 여기까지

하지만, 선거 당일 뚜껑을 열어보니? 오 시장은 한 후보를 겨우 0.6% 차이로 따돌리며 신승, 용궁에 다녀 온 거북이 꼴이 됐다. 서울시의회와 자치구는 민주당이 80%이상을 장악했다. 서울시 교육감은 공정택에서 곽노현으로 바뀌었다. 그는 고립된 섬이 됐다.

이후 오 시장은 야당과 대화와 타협 보다는 대립을 선택했다. 시의회와는 노상 싸웠고 그의 어휘는 점점 뾰족해졌다. 노련한 정치력으로 야당 일색 도의회나 교육감과 대립각을 낮춰간 김문수 경기지사와도 다른 모습이었다. 이로 인해 차차기대선주자군으로 주목받기도 했지만, 강경보수진영의 성원 덕이었다. 야당의 공세에 토라지는 듯한 모습에 누리꾼들은 '5세 훈이'라는 이름을 달아줬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던 주민투표를 발제했고, 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기 시장직을 걸었다. 그리고 패배했다.

오세훈에게 다시 한 번 2006년의 기회가 주어질 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강경 보수 진영의 성원이 언제까지 이어질 지, "박근혜와는 가장 강력하게 차별화를 한 것 아니냐"는 한나라당 당직자의 말이 맞아떨어질 지 짐작키 어렵다. 확실한 것은, 그는 자기가 만든 싸움에서 패배했고 자기 자신 뿐 아니라 한나라당을 위기에 빠뜨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10년 만에 '강남좌파의 아이콘'에서 '아스팔트 우파의 구심'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아스팔트 우파와 대형교회, 강남 3구라는 자산만 남은 그의 다음 행보에 관심을 둬야할지 여부에 대해 의구심이 드는 2011년 8월 24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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