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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내가 패자 모델이 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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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내가 패자 모델이 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안희정-이광재 저서 출간…"노무현의 동업자들, 운명에서 희망으로"

"단일화에 이겨서 대통령이 되면 당연히 좋겠지만 패자가 되더라도 오히려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패자가 됐을 때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고 역사의 교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정치라는 게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그 생각의 변화를 통해 시대를 바꾸자는 건데,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내가 패자의 모델이 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2002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 후보는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결정한 후 안희정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광재가 처음 단일화가 불가피할 것 같다는 말을 했을 때는 "굉장히 역정을 냈던" 노무현이었다. 노무현 후보가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 각서를 쓰고 러브샷까지 한 날 밤 안희정은 펑펑 울었다.

"그렇게 서럽게 운 적이 평생에 또 있었을까. 평생 어렵게 모은 재산을 부잣집 도련님한테 한번에 다 뺏긴다고 생각하니 너무 허망하고 억울했다. 저 사람은 그냥 용돈 조금 떼서 배팅하는 거지만 우리는 피땀 흘려 이룩한 전 재산을 올인하는 건데, 그냥 사인만 하고 말지 왜 러브샷까지 해서 사람 속을 쓰라리게 하는지."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안희정의 "기분이 어떠시냐"는 말에 노무현은 "진짜 괜찮다"며 '패자의 모델'을 얘기한 것이다. "이기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게 아니라 지는 것의 의미까지 챙기는 대장의 모습을 보며" 안희정은 '아이고, 저러니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지'라고 생각했다.

단일화 결과 예상 밖의 승리를 이루고도 담담한 표정이었던 노무현 후보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는 순간 옆에 있는 수행비서를 와락 껴안았다고 한다. 그리고 한 말은 이랬다.

"아이, 또 선거운동 하러 가야 되네."

"99% 논픽션의 안희정, 이광재의 이야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좌우 측근이었던 안희정 충남도지사와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가 공동으로 구술해 책을 냈다. 11일 발간된 책의 제목은 <안희정과 이광재>(메디치 펴냄)다. '노무현의 동업자들, 운명에서 희망으로'라는 부제가 붙었다.

중앙일보 정치부 야당팀장인 박신홍 기자가 총 40시간에 걸쳐 안희정과 이광재를 인터뷰한 내용이 토대가 됐다. 박 기자는 두 사람의 가족과 주변 지인들 10여 명과도 40여 시간을 만나 대표적인 친노 정치인 두 사람의 이야기를 썼다.

▲ ⓒ연합뉴스

저자는 이 책이 "99% 논픽션"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말, 생각, 감정, 심지어 부사와 형용사까지도 거의 모두 그대로"라는 것이다. 저자가 두 사람을 주목한 이유는 이렇다.

"정치권에서 이처럼 인정받는 두 사람이지만 상대적으로 일반 대중에게는 그 실체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모이자 동업자, '좌희정 우광재'로 인식될 정도다.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게 됐는지 적잖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에 이어 친노 정치인들이 본격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셈이다.

노무현 "YS는 총대 거꾸로 멘 거고, DJ의 정계 은퇴 번복은 그렇게 부도덕한 일 아냐"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친노이면서도 본격적으로 자기 길을 가기 시작한 정치인이지만, 그들의 인생을 얘기하는 데 있어 노무현을 빼놓을 수는 없다. 때문에 이 책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일화들을 세상에 드러내는 역할도 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1997년 노무현 당시 전 의원이 DJ를 지지했던 이유, 정몽준과의 단일화 배경, 재임 시절 고건 총리 카드나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꺼내든 까닭 등이다. 노무현 전 의원은 "90년 3답 합당 때 YS는 총대 거꾸로 멘 거고, DJ는 정계 은퇴를 번복하긴 했지만 그게 그렇게 부도덕한 일은 아니지 않나. 잘못의 경중을 따져야지"라며 1997년 대선에서 DJ를 지원했다.

노 전 대통령은 또 2002년 대선 직후 제주도를 방문한 자리에서 고건 총리 임명과 대북송금 특검 수용을 얘기했다고 한다. 대선 직후 유인태 전 의원을 통해 이회창 후보에게 언제 어디서든 둘이 만나자고 제안했지만 이회창 후보는 이를 거부했다.

"아, 이건 대화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구나. 재검표를 요구했다는 것은 대화하지 않겠다는 얘기 아닌가. 그럼 국회는 격돌하게 될 거고, 당장 총리 청문회부터 파행을 빚을 게 뻔하지 않겠나. 처음부터 이렇게 꼬이고 막히면 국정을 어떻게 이끌어갈 수 있겠는가."

안희정, 이광재가 '뜨악'했다는 고건 총리 카드를 내놓은 이유였다.

출판기념회 축하 동영상에서 노무현 펑펑 운 사연

대연정에 대해서도 노 전 대통령은 2005년 1월, 참모들을 청와대로 부른 자리에서 처음으로 "대선 끝난 다음 날부터 이렇게 싸우고 살아야 하나. 내가 다수당에 권력을 좀 내주면 안 되나. 그래서 뭔가 합의할 건 합의하면서 정국을 풀어나가면 안 되나"라고 했다고 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쓴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라는 책을 나눠주면서 꺼낸 말이었다.

대연정 구상이 세상에 알려지고 공론화된 것은 이보다 6개월 뒤인 2005년 7월이었다.

2008년 1월 초. 노무현 정부에서 감옥살이를 했던 안희정의 '홀로서기' 첫 걸음이었던 <담금질> 출판기념회에 보내온 노 대통령의 미공개 동영상도 소개됐다. 퇴임 직전의 노 대통령은 축하 동영상을 찍다 "안희정 씨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다했죠. 나는 엄청난 빚을 진 것입니다"라고 말한 뒤 책으로 얼굴을 감싸곤 카메라 앞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안희정은 당시 그 부분을 공개하지 않았다. "대통령이자 대장이 우는 장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그 밖에도 참여정부가 2004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이광재를 비밀리에 북한에 보내 동시 개최 카드를 제시했던 것도 밝혀졌다.

"톱니바퀴, 이란성 쌍둥이"인 안희정과 이광재

"톱니바퀴, 이란성 쌍둥이"인 안희정과 이광재 . ⓒ연합뉴스
노무현 없이 지금의 안희정도, 이광재도 없었을 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책은 두 사람의 이야기다. 같은 '노무현의 동업자'였지만 다소 다른 길을 걷게 했던 두 사람의 차이점도 이 책은 가감없이 드러낸다.

"물론 둘은 크게 달랐다. 이광재는 여전히 일 중심으로 모든 문제를 풀어갔다. 일을 잘 하느냐 못하느냐를 기준으로 관계를 설정해갔다. 반면 안희정은 사람을 중시하고, 사람을 중심으로 관계를 설정했다. 그 사람의 수준과 능력에 맞춰 일을 배분했다."

함께 처음으로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자는 얘기를 나눴던 1993년의 어느 밤부터 그랬다. "이광재의 관심과 고민은 이미 관념적 거대 담론에서 현실 정치의 구체적 과제로 상당 부분 넘어가" 있었던 반면, "안희정은 여전히 역사담론의 틀 안에서 형이상학적으로 많이 떠 있는 상태"였다. 이런 그들을 안희정의 후배 백원우는 "같은 모양이면 절대 맞물리지 않는 톱니바퀴"라고 표현했고, 이광재의 후배 오민수는 "이란성 쌍둥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 같으면서도 다르다. 이광재 전 지사는 지난 3월 손학규 민주당 대표에 대한 지지 선언을 했다. 반면 안희정 지사는 노무현 서거 2주기 행사에서 손학규 대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지금 이런 얘기하는 게 나한테 손해라는 걸 왜 모르겠냐. 너무 조급한 거 아니냐는 말이 왜 안 나오겠냐. 하지만 야권연대가 제대로 되려면 중간 쪽에 있는 손학규 대표가 제대로 서줘야 해. 그래야 전체적으로 판이 잘 만들어지고 경선다운 경선이 가능해 지거든. 그런데 와서 보니까 손 대표가 생각보다 많이 취약해 보이더라. 재·보선에서 지면 더 어려워질 것 같고. 그래서 이번에 나라도 손 대표를 한번 밀어주는 게 전체적으로 판이 판답게 굴러갈 수 있겠다 싶었지. 2017년쯤 되면 진보가 단독으로 집권이 가능하겠지만 내년 대선에선 중도를 놓쳐선 안 된다는 게 나의 판단이야. 그런 점에서 나는 아무래도 내년엔 악역을 맡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이 전 지사가 '손학규 지지선언'을 할 때만 해도 "갑자기 쟤가 왜 저러나. 너무 앞서가는 것 아닌가" 싶어 "마음이 불편했다"던 안 지사는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그게 바로 광재, 너다운 생각이다. 나도 네 생각과 다르지 않다"면서. 안 지사는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은 나의 생각, 내 주변 사람들의 시각을 정확히 알릴 필요가 있다고 보는 거고. 그리고 너는 지금 너 나름대로 판을 만들어가는 거고."

이광재 "2017 대선 같이 나가자" 안희정 "그래, 같이 해 보자"

그들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들의 단점은 무엇일까? 안희정의 말이다.

"하나는 심리적으로 평화를 잘 유지하기가 힘들어. 많은 비난과 반대, 사람들이 아파하는 것. 그랬을 때 내가 심리적으로 굉장히 불안정해지고 힘들어. 또 하나는 방향은 맞는 것 같은데 길을 잘 못 찾아. 이게 나로서는 굉장한 핸디캡이야. 지금껏 살아오며서 내 방향은 틀리지 않았던 것 같아. 그런데 길을 못 찾아. 내가 부지런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내가 아둔해서 그런가 보다 싶기도 하고. 잘 못 찾겠어. 어떤 상황이 오면 딱 이 길로 가야 되는데, 그 길로 가는 방법을 못 찾겟어. 그럴 때를 많이 느껴."

이광재의 말이다.

"나의 단점은 이거야. 사람을 볼 줄 모르지. 노 대통령을 모시는 동안 내가 한때 오류에 빠졌던 것은 무엇보다 상황이 너무 절박했고, 의리 있는 사람만 가지고 이 난국을 돌파해낼 수 있을까 회의도 많이 들었고. 그런데 그렇게 일 중심으로 사람을 엮어서 성공한 경우도 많았지만 실패한 경우도 적잖았어. 이번 강원도지사 보궐선거 때가 대표적이지. 결국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할 사람이었는데…. 또 하나 단점은, 너도 말했듯이 내가 잔정이 별로 없어."

'30대는 정도전처럼 살았다. 대통령을 세웠고, 8개월에 불과했지만 청와대에 있는 동안 국가 정책의 틀도 잡았다. 이제 40대는 이성계처럼 살아가리라'고 생각했다던 이광재는 2017년 대선 도전을 구체적으로 얘기했다. 조직도, 연구소도 없이 아이디어로 승부하겠다는 것이다. 2018년 동계올림픽 폐막식과 19대 대통령 취임식이 함께 있을 2월 25일 이광재는 "고향에서 열리는 폐막식에서 '우리는 이제 통일 대한민국으로 간다. 동계올림픽을 디딤돌로 만주와 연해주를 아우르는 1억 명 통일공동체로 가겠다'고 전 세계에 선포하는 꿈을 꾼다"고 했다.

안희정은 "김대중과 노무현의 역사를 이어가는 민주당의 맏아들이고 싶다"고 했다. "대선을 치를 때마다 명멸하는 정당이 아니라 DJ와 노무현의 역사, 분단 이후 평화민주세력의 흐름을 확고히 지켜가는 정당의 시조가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함께 2017년 대선 후보 경선에 나가자는 이광재의 집요한 설득에 그는 끝내 말했다. "그래, 같이 한번 해보자. 우리 또 한번 해보자. 2017년이라고 시기를 특정하진 않더라도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함께 뛰어보자고."

2012년을 넘어 2017년과 그 이후로 이미 향해 있는 두 사람의 시선을 보며 저자는 말했다. "열매 잘 맺는 이광재는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하는 과제를, 뿌리 깊은 안희정은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셈"이라고. 그들은 그 숙제를 잘 풀어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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