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가을 그녀의 나이는 18세. 결혼을 준비하던 아라리 동네 처녀 중 한명이었다. 4·3의 광풍 속에서 옥살이를 경험한 이가 88세 할머니가 돼서 정확히 70년만에 법정에 섰다.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제갈창 부장판사)는 19일 오후 2시 국방경비법 위반 등의 혐의로 옥살이를 한 4.3수형인 생존자 재심사건에 대해 첫 청구인 진술을 들었다.
현장에는 청구인 18명 중 김평국(1930년생.89.여), 현창용(86), 오희춘(1933년생.86.여), 부원휴(1929년생.90)씨 4명이 참석해 70년 전 겪은 4.3의 실상을 털어놨다.
김평국 할머니는 1949년 당시 아라리(현 아라동)에 거주했다. 경찰이 들이 닥친다는 소식에 주민들은 해안가로 대피했다. 김 할머니도 어머니와 동생 2명과 남문통으로 향했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다시 아라동 집으로 갔지만 경찰에 붙잡혀 목관아지 앞 제주경찰서로 끌려갔다. 다행히 어미니와 동생들은 풀려났지만 자신은 매질을 당했다.
열흘 후 김 할머니는 인근의 한 건물로 다시 끌려갔다. 100여명의 사람들이 포승줄에 묶여 군인들과 마주했다. 건물 내부에는 '고등군법 제77조 내란죄'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제대로 된 설명이나 재판도 없이 김 할머니는 또 유치장으로 향했다. 열흘 후 부두에서 배에 오른 김할머니는 전주형무소에 수감됐다. 당시에도 죄명과 형량을 알려주는 이는 없었다.
"형무소에 끌려 갈 때까지 재판도 없고 왜 옥살이를 하는지도 몰랐어요. 옥중에 징역 1년이라는 얘기를 들었지. 애월에서 끌려 간 어느 애 엄마는 징역 15년을 받았습니다. 참나."
재심을 청구한 18명은 1948년 12월 제주도계엄지구 고등군법회의와 1949년 7월 고등군법회의에서 내란죄 등의 누명을 쓰고 최소 1년에서 최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이들은 죽기 전 억울함을 풀겠다며 2017년 4월 재심을 청구했다. 문제는 재심 청구의 근거가 되는 기소장과 공판조서, 판결문 등 입증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군법회의 유일한 자료는 정부기록보존소가 소장한 수형인 명부다. 4.3사건 군법회의의 내용과 경과를 확인할 수 있지만 이 명부를 제외하면 재판과 관련한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형사소송법 제420조(재심이유)에는 재심 청구를 위해서 청구 취지와 재심 사유를 구체적으로 기재한 재심청구서에 원심판결의 등본, 증거자료, 증명서를 법원에 제출하도록 하고 있다.
청구인측 법률대리인은 수형인 명부가 당시 형집행의 근거가 되고 생존자 진술을 통해 당시 구속과 재판의 위법성이 인정되면 재심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재판부는 변호인의 의견을 존중해 청구인 18명에 대한 진술을 모두 듣기로 했다. 김종민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상임대표도 증인으로 채택해 신문을 진행하기로 했다.
법률대리인은 "재판을 위한 자료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가장 중요한 증거는 생존자의 진술"이라며 "70년 만에 제대로 된 재판을 받는 것이 가장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6월까지 연이어 재판을 열어 청구인 18명에 대한 진술을 모두 듣기로 했다. 이후 빠르면 7월, 늦으면 9월까지 재심사건 개시 여부를 위한 결정이 이뤄질 전망이다.
개시 결정이 이뤄지면 70년 전 재판의 정당성을 다시 판단하는 정식 재판이 이뤄진다. 개시 결정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정식재판 없이 사건은 끝이 난다.
프레시안=제주의소리 교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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