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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장 후배의 편지를 받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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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장 후배의 편지를 받고선

이창형/칼럼니스트

▲ 이창형(칼럼니스트)
고향 경찰서장으로 부임한 후배가 지인을 통해 편지를 보내왔다.

“지난 저희 모친상 때 조문해 주신데 감사드립니다. 금년 1월 17일부터는 청탁금지법이 개정돼 공직자인 저로서는 기준을 초과해 과분하게 조의를 표해 주신 분들께는 부득이 반환을 하게 되었음을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동안 저와 길게는 수십년 간 여러 인연이 있었던 분들이라 혹여 마음 상하지 않으실까 하는 염려도 있습니다만, 저의 입장을 잘 헤아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덧붙였다.

후배는 중학교, 즉 고향 후배다.
그의 편지를 받고서는 화가 났다.
편지를 가져 온 지인에게 “우리는 맘이 너무 착해서 문제다”라고 전하라고 했다.

유난히 뜨거웠던 지난 여름 86의 아버지가 안절부절 못하신다.
40년이 넘은 파란 스레이트 지붕의 창고를 가리키며 “장마가 시작됐는데 나락이 다 썩겠구나. 보리고개 때는 보리밥 먹는 것도 힘들었는데 요샌 쌀이 남아도니 내다 팔수도 묵힐 수도…”하시며 혀를 차신다.

아버지의 걱정스런 모습이 한동안 내 맘을 아프게 했다.
“야야, 내다 팔 나락이 얼마 안 된다고 직접 가져오라는데 무슨 재주가 있어야지. 옛날 같으면 웃돈을 줘도 구할 수 없는 게 이맘 때의 쌀인데…”

아버지는 몇 포대 남지 않은 쌀을 정미소에 내다팔기 위해 궁리를 했지만 정미소에서는 돈 안되는 나락 물량이 넘쳐나니 집까지 와서 싣고 갈만한 손이 없다고 하니 속이 까맣게 탄다.

동네에 유일무이한 고방(정비소)을 찾았다.
그곳엔 대학 나온 형은 객지에 나가고 혼자서 대를 이어 정미소를 지키는 후배가 있다.
추수철도 아닌데 나락 포대가 가득 쌓여 있고 나락을 실은 경운기가 줄을 섰다.
옛 어른들은 추수철 나락을 처분하지 않고 식량이 귀한 보릿고개 즈음 팔았다.

정미소를 찾자 후배는 “형님, 일손이 달려 직접 갈 수가 없네요” 한다.
“그럼 트럭이라도 좀 내 줄래, 내가 직접 쌀을 싣고 오마”하자 “그러세요. 죄송합니다”라며 머리를 긁적인다.
40여포대를 1t 트럭에 싣느라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정미소에 넘긴 쌀 한 포대의 가격은 3만5천원, 작년에 비해 1만원이나 떨어졌다.
한 포대씩 옛날씩 저울에 달며 주판을 튕기며 후배가 보여준 총 가격은 40포대에 140여만원.
아버지께 그 영수증을 보여드리자 “우야노, 나락금이 똥금인데...”하신다.
맞다. 그 귀한 쌀값이 금값이 아니라 ‘똥금’이다.

꽁보리밥 도시락을 싸들고 학교에 가서 하얀 쌀밥에 계란프라이를 덮어 온 친구들에게 부끄러워 도시락을 차마 꺼내지 못했던 시절.
그는 너무도 가난해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경찰대학에 갔다.
그런 고향 후배가 이 같은 편지를 보내니 내 맘이 화가 난 것이다.

“너나 나나 맘이 넘 고와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 아닌가”란 나에 대한 화였다.

정사 ‘삼국지’ 등 역사자료를 통해 본 제갈량은 보통사람과 다를 바 없이 고뇌하고 번민하며 때로는 실수도 저지르는 ‘인간제갈량’이다.
제강공명의 ‘도덕성 우선의 리더십’(김재웅 저)이란 책을 통해 본 제갈량은 도덕성을 지키는 리더십, 신념을 버리지 않는 리더십, 원칙을 포기하지 않는 리더십을 보여준다.
그가 남긴 재산이라곤 뽕나무 800그루와 황무지나 다름없는 밭 15고랑 뿐이었다.
제갈량이 가진 리더십의 강점은 바로 도덕성이었다.
도덕적 해이로 인해 리더십의 위기를 맞는 우리 시대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에서는 “21세기 기업가나 정치가는 성직자에 준하는 고도의 도덕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안 되며 경영자의 도덕성이 기업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후배의 편지를 받아들고선 ‘도덕성’에 대해 생각한다.

벼슬을 단념하고 글 쓰는 일에만 전념했던 조선 선비 홍길주(1786~1841)가 무과에 급제한 상판관(尙判官)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족하께서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접하고 처음에는 몹시 놀랐습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니 오히려 경하드리고 싶어졌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몸은 괜찮은지, 안부는 묻지 않고 그만하기 다행이라며 충고를 늘어놓는다.
“힘이 센 자는 전쟁터에서 다치고 훌륭한 의원은 약을 먹어 지병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족하께서 낙마한 이유는 승마에 익숙한 탓에 교만해졌고 교만해진 탓에 소홀해졌으며 소홀한 탓에 낙마한 게지요”

홍길주의 지나치다 싶은 충고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족하께서 익숙하다고 자부하는 것이 어찌 승마뿐이겠소. 천문과 역법에서부터 산천과 도로, 농사와 나무심기까지 그 익숙한 정도가 반드시 승마보다 낮다고 할 수 없을텐데, 그때도 교만하고 소홀했다가는 다치는 정도가 의관이나 살갖, 근육과 뼈쯤으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독설같은 충고가 미안했던지 “서로 아끼는 마음이 두텁다고 믿어 예법을 어긴다는 비웃음을 무릅쓰고 이 같은 글을 바칩니다. 헤아려 주십시오”라고 했다.

익숙하기 때문에 교만해지고, 교만함에 따라 소홀할 수 있는 일들.

경찰서장 후배의 편지가 이 봄날 가슴을 후벼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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