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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의 화원을 지나, 다산의 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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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동백의 화원을 지나, 다산의 섬으로

2018년 4월 섬학교는 <강진 가우도와 다산초당, 백련사 동백숲, 청자도요지>

다산 정약용 선생은 <경세유표>에서 “섬은 우리나라의 그윽한 수풀이니 진실로 경영만 잘하면 장차 이름도 없는 물건이 물이 솟아나듯, 산이 일어나듯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국가경영을 위해 섬과 바다와 갯벌의 중요한 가치를 설파했던 것이지요. 강진 유배시절 다산에게 섬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었던 섬이 바로 강진의 <가우도>입니다.

강진군의 유일한 유인도인 가우도는 출렁다리로 육지와 연결되면서 2014년에 4만 명을 시작으로 2017년에는 86만 명이 다녀갈 정도로 전국적인 명소가 됐습니다. 특별할 것 없는 이 섬이 특별한 이유는 전라남도의 ‘가고 싶은 섬 가꾸기’ 대상 섬이 되면서 관광객 증가로 인한 수익이 주민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게 됐고 모두가 일자리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 제70강은 4월 7(토)-8(일)일, 1박2일 일정으로 강진만의 섬 가우도와 ‘동백의 화원’ 백련사 동백숲과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 다산초당 등으로 떠납니다.

▲피어라! 동백Ⓒ섬학교

동백은 겨울 꽃이지만 절정으로 피어오르는 때는 봄입니다. 이때 피는 꽃이라야 열매를 맺을 수 있으니 모든 에너지를 꽃으로 발산하여 화려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동백나무 고목 1500여 그루가 모여 있는 남도 최고 동백숲, 백련사의 동백꽃들은 4월 초순이면 만개하는데 그야말로 황홀한 동백의 화원입니다. 백련사 동백숲은 <동국여지승람>에 “사계절 한결같은 절경”이라고 언급될 정도로 예부터 유명한 숲이었습니다. 백련사 동백꽃 잔치에도 물들고 고려 8국사를 배출했던 천년고찰 백련사도 탐방합니다.

또 만덕산을 넘어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처였던 다산초당까지 걸으며 조선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다산 선생의 숨결을 느끼다 옵니다. 고려청자의 산실이었던 강진의 청자 도요지도 탐방합니다. 강진에는 다산의 강진 유배 초기 깃들어 살던 주막집, <사의재>가 복원되어 있는데 이번 여정에서는 사의재와 그 일대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게 됩니다. 게다가 한정식의 고장 강진 한정식도 제대로 맛볼 수 있으니 참으로 맛과 멋이 어우러진 여정이 될 것입니다. 봄날 꽃길을 따라가는 남도 마실길에 초대합니다.

▲탐라국으로 가던 나루라 해서 탐진이다. 탐진은 강진의 옛이름이다.Ⓒ섬학교

교장선생님으로부터 2018년 4월의 걷는 섬 강진 <가우도>와 다산초당, 백련사 동백숲, 청자도요지에 대한 설명을 들어봅니다.

출렁다리 사랑

출렁다리에 대한 사랑이 뜨겁다. 우리가 늘 롤러코스트를 탄 것처럼 출렁이며 살아오다보니 도대체 출렁이지 않는 다리에는 흥미를 못 느끼는 것일까. 섬이고 산이고 바다고 강이고 간에 출렁다리만 생겼다 하면 관광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근래 출렁다리로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경험한 곳은 단연 강진의 섬 가우도(駕牛島)다. 전남 강진군 강진만에 위치한 8개 섬 가운데 유일한 유인도인 가우도는 2011년 이전까지만 해도 관광객 숫자 집계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한적한 섬이었다. 그런데 2011년과 2012년 잇달아 육지와 연결된 출렁다리 두 개가 생기면서 관광객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2014년에 4만 명이 찾아 들더니 2015년에는 43만 명, 2016년에는 73만 명, 그리고 2017년에는 86만 명이나 됐다. 그런데 더 재밌는 것은 이 다리들은 결코 출렁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름만 출렁다리다. 우리가 얼마나 이름을 쫓고 사는지 보여주는 증표이기도 하다.

가우도는 10만여 평(32만㎡)의 작은 땅에 30여 명의 주민들이 살던 전형적인 어촌마을이었다. 청자도요지와 다산초당 사이에 있는 섬인데 강진군이 주요한 두 관광지를 연결하는 중간 경유지로 만들기 위해 지난 2009년부터 2012년 인도교를 만들면서 섬은 상전벽해가 됐다. 출렁다리는 강진군 대구면 저두리와 가우도 간 438m, 도암면 신기리 망호와 가우도 간 715.9m 등 두 개다. 출렁다리 개통 후 2014년에 4만 명이던 가우도 관광객 수가 1년 만에 10배나 급증했던 것은 가우도가 2015년 전라남도의 핵심시책인 ‘가고 싶은 섬’으로 선정되면서 인지도가 높아진 때문이었다. 출렁다리 이후 가우도에는 2.4㎞의 트레일과 짚트렉, 낚시체험 시설 등이 설치되어 걷기와 레저를 동시에 체험할 수 있는 섬이 됐다. 짚트렉은 섬의 정상 한가운데 세워진 25m의 청자타워에서 대구면 저두마을로 하강하는 체험시설이다. 1㎞ 거리를 불과 1분이면 도착하는 짜릿함 때문에 인기가 높다.

이제 가우도는 문체부와 한국관광공사의 ‘2017-2018 한국관광 100선’에 포함될 정도로 강진을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됐다. 하지만 섬이든 어디든 관광객이 많이 온다고 무조건 주민들에게 득이 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관광지는 이재에 밝은 몇몇 주민들이나 외부에서 유입된 자본력 있는 업자들에게만 이익이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다수 주민들은 별다른 혜택도 못 받고 오히려 소음과 교통체증, 쓰레기 등의 피해만 입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가우도는 관광객 증가에 따른 혜택이 모든 섬 주민에게 골고루 돌아간다. 마을식당 등은 주민들이 주인인 마을협동조합에서 운영한다. 가우도에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가우도의 모든 주민들은 일자리를 얻었고 소득도 증가했다. 이것이야말로 가우도 개발의 가장 중요한 의미다.

▲출렁이지 않는 가우도 출렁다리 Ⓒ섬학교

가우도의 지혜

이 나라에서 섬이나 관광지 개발의 이익이 소외된 주민 없이 모두에게 돌아간 사례가 있었던가. 아마도 가우도가 그 처음일 것이다. 짚트랙 등 기반 시설에 대한 기획은 강진군의 몫이었지만 관광 소득이 주민들에게 골고루 돌아가게 만든 것은 협동조합과 마을식당 등을 만들도록 지원한 전남도의 ‘가고 싶은 섬 가꾸기’ 사업이다. 널리 유포되어 마땅한 모범적인 사례다. 인도교 또한 공신이다. 강진군은 처음에 차량 통행이 가능한 다리를 놓을 계획이었지만 1천억 원이 넘는 막대한 공사비 마련의 어려움과 경제성이 낮다는 이유로 계획이 백지화되자 인도교로 변경했다. 천만다행이 아닌가. 만약 차량이 들어가는 다리가 건설됐다면 가우도에 그토록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들었을까! 섬에 무조건 차량이 들어가는 다리만을 고집하는 다른 지자체들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마땅하다.

가우도는 섬의 모양이 소의 멍에처럼 생겨서 가우도라 했다고 전한다. ‘가우’란 가마나 상여 또는 짐수레를 끄는 소를 말한다. 가우도에 조선 초기부터 고씨들이 살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당시에도 강진과 제주의 왕래가 활발했던 듯하다. 그 고씨가 제주 고씨다. 제주 고씨가 가우도에 정착한 것은 강진과 제주 사이의 교류 때문이다. 강진의 옛 이름은 탐진(耽津)이다. 탐라국(耽羅國)에서 신라에 온 배가 정박하던 나루(津)라 해서 얻어진 이름이 탐진이다. 탐진강도 여기서 유래된 이름이다.

<동국여지승람>이나 <동환록(東寰錄)> <강진군지> 등에는 “탐라국의 성자(星子)가 신라의 조회에 참여하거나 나라에 토산물을 바칠 때 배를 정박하던 곳이니 곧 탐진(耽津)이라 한다”고 탐진의 유래를 기록하고 있다. 탐라국은 제주도에 있던 고대왕국이다. 탐라가 신라나 고려의 번국이 된 뒤에는 탐라 왕이나 태자가 성주, 왕자 등의 직책을 하사받았는데 성자는 탐라의 왕이나 태자를 말하는 듯하다. 탐진은 탐라의 왕족들이 한반도 내륙의 왕국들과 교류할 때의 관문이었다. 가우도는 그 관문인 탐진강 하구 강진만에 위치한다. 6세기 경에는 아랍의 상인들이 뱃길을 따라 탐진의 대구면 하저리까지 다녀갔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이 또한 삼국시대부터 고려 말까지는 아랍과 한반도 간 교류가 활발했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가우도 당산의 신령한 나무들Ⓒ섬학교

가우도 당숲

가우도의 당숲은 청자타워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산정에 짚트랙이 설치되고 관광객들로 북적이면서 예전 같지는 않지만 후박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가우도 당숲은 신령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더 이상 당제를 모시는 사람들이 없어 당집은 허물어져 폐가가 되었다. 후박나무 군락지에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비는 당집, 서낭당이 있었다. 후박나무가 당 할머니였다. 정월 보름날이면 제관인 남자 두 사람을 뽑아 정성스럽게 제를 모셨다. 여자들은 당집 근처에 가지도 못했다. 당제는 한국전쟁 이후 중단됐다. 그 때는 당산목인 마을 어귀 우물가의 500년생 좀팽나무에도 제를 올리고 풍어를 빌었으나 나무가 고사한 뒤 중단됐다.

옛날 가우도 선창가 마을 입구의 광주샘은 물맛이 좋기로 명성이 높았다. 광주까지도 그 소문이 자자했다 해서 광주샘이란 이름을 얻었다 한다. 샘물을 마시고 위장병을 고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고 버려져 지금은 말라버렸다. 아쉬운 일이다. 강진에 유배 와 있던 다산 정약용 선생도 다산초당에서 가까운 가우도에 다녀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다산이 와서 이 광주샘물을 마셨다고도 한다. 다산이 마시던 샘이라니 복원이 된다면 얼마나 의미 깊은 일이겠는가. 다산은 <경세유표>에서 “섬은 우리나라의 그윽한 수풀이니 진실로 경영만 잘 하면 장차 이름도 없는 물건이 물이 솟아나듯, 산이 일어나듯 할 것”이라고 썼다. 국가경영을 위해 섬과 바다와 갯벌의 중요한 가치를 설파했었던 것이다. 다산은 아마도 만덕산에 오르거나 다산초당에서 구강포 바다의 섬들을 바라보고 또 가우도를 몸소 다녀가면서 그런 원대한 구상을 했던 것이 아닐까. 지금 가우도는 다산이 구상하던 섬 경영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결국 다산의 예언이 적중했다.

탐진댐을 막기 전까지 가우도 앞바다는 황금 어장이었다. 장흥에서 흘러온 탐진강은 강진만에서 바다와 합류된다. 가우도가 있는 강진만 하구에 구강포(九江浦)가 있다. 아홉 고을의 계곡 물이 흘러든다 해서 구강포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구십포(九十浦)라고도 했다. 어느 지역이나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기수구역은 최고의 어장이다. 내륙에서 내려오는 영양분을 섭취하려 물고기들이 몰려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 이 바다는 어선이 많아서 밤이면 어선의 불빛이 가득했다. 그 풍경을 구강어화(九江魚火)라 했고 금릉팔경의 하나로 꼽았다. 탐진강 덕에 가우도 주변 강진만 바지락의 유명세도 대단했다. 가우도 갯벌에서 나는 바지락이 전국 최고였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도 모두 이 물길 때문이었다. 하지만 탐진댐이 들어선 뒤 물길이 끊기자 강진만은 생기를 잃고 죽어갔다. 도암, 만덕, 사초리 등에 마구잡이 간척사업이 벌어지면서 물길이 끊긴 것도 이유였다.

▲해물천국, 가우도 밥상 Ⓒ섬학교

바지락의 고향

강에서 내려오는 물이 오염물을 씻어가고 영양분을 보충해주었는데 물길이 끊기니 바지락들이 살기 어려워진 것이다. 간척지가 없고 댐을 막기 전에는 바지락을 하루에 두세 자루씩 캐곤 했었다. 연간 50-60톤의 바지락이 쏟아져 나왔었다. 뻘밭에 손을 집어넣으면 다 바지락이었다. 캘 필요가 없었다. 그냥 주어 담으면 됐다. 여름철 큰물이 내려오고 모래가 흘러들어 와야 바지락 종패가 형성되는데 댐을 막고 간척지를 만들어 생태계가 변하니 이제 더 이상 종패도 생기지 않는다. 1970년까지만 해도 강진만 바다는 강진군 공동 종패장이었다. 7-8월 종패를 캘 때가 되면 적을 때는 6만, 많을 때는 10만 명까지 강진만으로 몰려들었다. 대단한 장관이었다. 생각만으로도 그 축제 분위기의 바다가 눈에 선하다. 이 바다에서 언제 다시 그 광경을 볼 수 있을까. 이제는 강진만 바지락의 씨가 마를 지경이다. 내륙에서 생긴 생태계 변화가 결국 바다 생태계를 파괴해 어민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말았다. 하지만 보상은 어디에서도 없었다. 섬과 어민들의 힘이 약한 탓이다.

지금은 너무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까닭에 섬도 몸살을 앓고 있지만 강진만 갯벌과 바다에서 나는 재료로 만든 가우도의 음식 맛은 최고의 남도음식이라 이를 만했다. 몇 해 전 가우도 마을회관에서 맛보았던 가우도 해산물 음식들의 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감성돔 회와 키조개 관자, 굴숙회, 굴전, 갑오징어 회와 무침, 개불, 도미껍질 데침, 취나물, 엄나무 잎나물 등 모두가 주민들이 손수 채취해 만든 토속 음식이었다.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특히 갑오징어 먹물찜은 그 감칠맛이 새록새록 하다. 찰진 갑오징어의 다른 내장은 제거하고 먹물만을 넣고 쪄낸 요리는 무엇과도 비교 불가한 최고의 감칠맛이다.

▲달고 시원한 가우도 바지락국Ⓒ섬학교

<목민심서>의 산실

강진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이 강진 유배 18년 중 10년간 적거생활을 하며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600여 권의 방대한 저작을 저술한 연구공간이자 주거지다. 다산은 정조대왕 아래서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지만 정조 사후 1801년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사옥으로 형인 약전(若銓)·약종(若鍾)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포항 장기(長鬐)로 유배되었고 그해 11월 전라남도 강진으로 이배됐다. 다산의 세례명은 요한이었다. 강진 유배 초기에는 강진읍 동문 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냈다.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10여 년 동안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기르고 저술에 몰두했다. 다산의 가장 중요한 업적들이 모두 다산초당에서 이루어졌다. 1818년 9월 이태순(李泰淳)의 상소로 유배에서 풀려났다. 다산초당은 노후화되어 붕괴되었던 것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1957년 복원했다. 그후 다산의 주거지였던 동암과 제자들이 기거하던 서암도 복원됐다. 다산초당에는 선생이 직접 「丁石」이라는 글자를 새긴 정석바위와 다산이 수맥을 찾아 만든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연못 가운데 만든 석가산 등 다산의 유적이 있는데 이를 다산사경이라 한다.

▲다산 저작의 산실 다산초당Ⓒ섬학교

백련사 동백숲

백련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다. 만덕산에 위치해 만덕사(萬德寺)라고도 불렸었다. 839년(문성왕1) 무염(無染)이 창건하였으며 1211년(희종 7) 요세(了世)가 크게 중창했다. 요세는 천태종계(天台宗系)의 승려인데 보조국사 지눌(知訥)과 함께 송광사에 머물다가, 1208년에 천태종의 묘의(妙義)를 얻었다고 전한다. 만덕산에 백련사에 자리 잡은 뒤 제자 원영(元營)으로 하여금 가람 80칸을 짓게 하며 중창했다. 중창이 끝나자 요세는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개설하고 실천 중심의 수행인들을 모아 결사(結社)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백련사결사(白蓮社結社)다.

그후 백련사에서 120년 동안 고려의 8국사(國師)를 배출하였다. 고려 말에는 세 차례의 왜구침입 때 폐허가 됐다가 조선 세종 때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원으로 주지 행호(行乎)가 가람을 복원하였다. 효종 때 3차 중수를 하였으며, 그때 탑과 사적비(事蹟碑)를 세워졌다. 백련사는 <동국여지승람>에 “남쪽바다에 임해 있고 골짜기 가득히 송백이 울창하여 동백 또한 곁들여서 수목이 싱싱하게 푸른 모습이 사계절을 통해 한결같은 절경”이라 기록됐을 정도로 예부터 명승이었다. 백련사 동백 숲에는 동백나무 고목 1500그루가 모여 있는데 3월 말부터 4월 초순에 만개한다. 동백 숲 사이사이에는 참나무, 비자나무, 후박나무, 푸조나무 고목들도 자라고 있다.

▲백련사 대웅전Ⓒ섬학교

2018년 4월 7(토)-8(일)일, 섬학교 제70강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4월 7일(토요일)>
08:00 서울 출발(07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70강 여는 모임
-강진 도착
-점심식사(강진읍내 남도백반)
-가우도 걷기
-청자도요지 탐방
-저녁식사 겸 뒤풀이(강진읍내, 한정식)
-자유시간 및 취침(사의재 등. 다인실)

<4월 8일(일요일)>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강진읍내, 아욱국백반)
-백련사→다산초당 탐방
-김영랑 시인 생가 탐방
-점심식사(강진읍내 한정식)
-서울 향발. 제70강 마무리모임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으로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4월의 섬학교 걷기 지도Ⓒ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섬학교'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이며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3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故)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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