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메달을 딴 선수가 시상대에 서서, 국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서서히 올라가는 자기 나라 국기를 응시하며, 눈물 글썽이는 모습을 우리는 이번 올림픽에서도 여럿 보았다. 꼭 우리나라가 아닌 외국 선수들일지라도 사람들은 그때마다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끼곤 한다. 시상대에 서서 국기를 바라보면, 옷깃 여미는 경건함이 함께하더라고 했다. 평생 의지한 기둥이면서, 자식 감싸주신 어머니 앞에 선 듯한 느낌이었다고 적은 소감도 읽은 적이 있다. 국가나 국기가 주는 느낌은 그렇게 특별한 데가 있다.
특히 나라를 빼앗긴 채, 굴욕과 압제 속에서 민족정신까지 말살하려한 질곡의 순간순간을 35년이나 견디며 살아야 했던 우리로서는, 그게 더욱 남다를 수밖에 없다. 애국가도 제대로 부를 수 없었고, 태극기도 마음 놓고 흔들어 볼 수 없는 세월이었다. 바로 그래서 우리에게 3·1절은 특별한 날이다. 특별한 태극기의 날이다.
1919년 기미년 봄의 만세 운동 가운데서도, 17세의 어린 소녀 유관순이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목숨을 걸고 주도한 태극기 행진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를 전율케 한다. 4월1일(음력3월1일)이었다. 빼앗긴 나라 되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 시골에서 자그마치 3천명이나 되는 군중들이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었다. 소녀가 앞장을 섰다. 독립만세를 외쳐대며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소녀는 그 시위에서 일본 경찰의 총칼에 부모를 잃었다. 자신도 체포되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험한 옥살이를 계속했다.
2013년 주일 대사관이 찾아내고, 국가 기록원이 넘겨받아 그해 11월 19일 공개한 자료에는 유관순이 서대문 형무소 '옥중에서 타살' 되었다고 적혀있다. 1920년 9월20일 숨을 거둘 때까지 18세 소녀는 감옥에서도 울부짖으며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다고 했다.
소녀에게 태극기는 무엇이었을까. 나라였을 것이다. 요람이고 울타리였을 것이다. 자신을 존재케 하는 버팀목이고 희망이었을 것이다. 당당함 이었고 자랑이면서 성스러움이었고, 아마도 차오르는 눈물이었을 것이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필자에게도 태극기를 보면서 눈물을 흘린 경험이 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였다. 계엄군의 검열에 막혀 기사한줄 못 썼으나, 필자는 그 때 광주 항쟁을 출장 취재 중이던 기자였다. 5월 22일부터 공수부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희생자들의 시신이 당시 전남 도청 앞 상무관에 안치되고 있었다. 그 상무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사체들 냄새와 함께 유족들의 통곡소리 속에 시신들의 모습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입관을 마친 시신도 있었으나, 더러는 미처 관을 준비하지 못한 채 처참한 모습으로 눕혀져 있기도 했다.
놀라웠던 것은 입관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시신들이 하나 같이 커다란 태극기를 덮고 있는 광경이었다. 그 태극기들을 보는 순간 뜨거운 것이 필자의 목울대를 타고 올라오면서, 울컥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숨길수가 없었다. 당시 전두환 군부는 적색분자 폭도들이 광주에서 소요를 일으키는 중이라고 강변하고 있었다. 군인들의 주장대로라면 태극기를 덮고 있는 시신들은 모두 빨갱이였다. 그러나 광주시민 누구도 그들을 불순분자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기자인 필자도 그랬다.
그러나 유족들이나 시신들까지도 모두,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라고 억울함을 항변할 데가 없었다. 다만 시신들이 덮고 있는 태극기들이 그렇게 원통함을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들이라고, 우리를 빨갱이로 몰지 말라고 악쓰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 말고는 피하거나 더 갈 데도 없다고, 몰아내려 하지 말라고, 여기는 우리가 살아야 할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라고 태극기들은 절규하고 있었다.
그렇게 눈물을 찔끔 거리며 상무관 문을 나섰다. 때마침 도청 앞 광장에 많은 시민 학생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손에 태극기를 든 사람들이 많았다. 태극기가 한없이 거룩하고 숭고해 보였다. 거듭 눈물이 났다.
그런 태극기가 요근래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손에 들려서, 황당한 모습으로 거리를 떠돌아다니며 표류해 가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고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다 알다시피 태극기 부대 활동은, 최순실씨와 함께 나라를 요절내다 파면·구속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출운동'이 그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태극기만 흔들더니, 유모차가 동원되고, 트럭에 고성능 스피커를 달아 군가까지 틀어대면서, 경찰과 물리적 충돌을 빚기도 했다.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박 전 대통령이 헌재의 파면 선고를 받고 강남 삼성동 집으로 돌아갔을 때 태극기 부대원들은 맹렬했다. 그녀를 응원한다며 태극기를 온 몸에 두른 채, 집 앞 골목에서 기자들의 취재차량을 가로 막으며 길바닥에 드러눕기도 했다. 그 골목길은 인근 초등학교 학생들의 통학로였다. "엄마, 태극기 무서워!"라는 어린이들의 겁에 질린 하소연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들은 활동 영역도 넓혀갔다. 일부 대기업 오너의 사법처리 과정에도 관심을 보이며, "영장 기각하라"고 악을 썼다. 박 전 대통령의 재판이 있는 날에는 서울 지하철 2·3호선의 교대역과 서초역 주변에 태극기 노점상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급기야 평창 올림픽 개막식 때, 남북 선수단이 태극기 대신 한반도 기를 들고 입장 한다는 '평양 올림픽' 시비에 동조하더니, 일부 종교 단체와 함께 가짜 뉴스에 얹혀 개헌 문제에까지 태극기를 들고 나섰다.
본색을 드러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곤경에 처한 특정 정치세력의 돌파구를 마련하고, 정치적 이익을 확보하는 게 애당초부터 태극기 부대의 목표였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어떤 사안에 대해, 실정법의 테두리 안에서 견해를 나타내는 것은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견해를 꼭 태극기만을 표현 수단으로 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더구나 그 과정에서 태극기가 특정 진영의 이익을 노린 선전 도구나 수단이 되는 것은 납득 할 수 없는 일이다. 설사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이 있다 해도 태극기만을 수단 삼아야 할 이유는 없다. 내용 대부분이 태극기와는 상관도 없어 보이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차라리 피켓이나 플래카드를 드는 게 맞다는 지적에 수긍이 간다. 게다가 태극기 부대가 애당초 주장하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무죄'는 설득력도 별로 없는 사안이다. 전 국민의 81%가 그녀의 탄핵에 찬성한 것 모르는 사람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 나라 국기인 태극기의 당당한 펄럭임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태극기를 특정 진영의 상징물로 둔갑시키거나, 궁색한 앞가림 소모품 삼아서도 안 된다. 태극기는 제자리에 갖다놓는 게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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