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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쿠바는 우리의 미래?

[햇빛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 ⑨

숲을 파괴하고 사라진 문명들

전 세계에 걸쳐 산업 사회 이전까지 인류의 1차 에너지는 나무였다. 광합성을 통해 생명을 꽃피우는 식물이야말로 햇빛에너지를 이 지구상에 다른 형태로 잡아두는 놀라운 지구 생명 창조자이자 에너지 창조자였다.

지금은 사막이지만, 최초의 도시국가가 발생한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그 당시에는 울창한 삼림 지대였다. 이런 삼나무 숲을 에너지원으로 수메르 문명이 탄생했다.

어떤 문명이든지 인류 문명의 중심에는 에너지와 식량의 생산 소비 체계가 자리 잡고 있다. 에너지와 식량이 없으면 사람은 단 하루도 살 수가 없다. 도시도 만들 수 없다.

수메르를 포함해서 역사상 수많은 문명의 몰락 또한 그 핵심 요인은 결국은 에너지와 식량이다.

수메르 도시국가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건축자재도 나무였고, 도자기를 굽는데 필요한 연료도 나무였고, 배를 만드는 데도 나무가 들어갔다. 청동기나 철기를 만드는 데도 나무가 들어갔고, 농사를 짓기 위해서도 나무가 베어졌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인간이 어떻게 숲을 파괴했는지 생생하게 증언하는 기록 문학이기도 하다.

"길가메시는 (…) 손에 도끼를 들고 허리에서 칼을 빼 훔바바의 목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 그러자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숲의 수호자가 쓰러졌기 때문이다. (…) 수호자가 쓰러지자 2리그 안에 있던 향나무들은 모두 떨었다. 산들이 요동하고 언덕들이 진동했다. (…) 그들은 향나무를 베어 나갔다. (…) 길가메시가 숲의 나무들을 베는 동안 엔키두는 그들의 길을 유프라테스 강둑처럼 시원하게 닦아 놓았다."

도시에 필요한 나무가 고갈되고 인근에 나무가 사라지자 수메르 사람들은 나무를 구하기 위해 원정을 나가거나 먼 곳에서 나무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윽고 그도 불가능하게 되면서 너무도 당연하게 수메르는 사막의 모래더미에 파묻히고 말았다. 숲을 파괴하고 만든 농토도 곧바로 염분이 많은 땅으로 변해버려 더 이상 곡물 생산을 지속할 수 없었다.

메소포타미아의 다른 지역에서 일어선 우르, 라가시 등 도시국가 또한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고는 수메르처럼 그렇게 몰락해 버리고 말았다.로마의 멸망도 밑바닥에는 에너지원인 나무가 있었다. 로마 말년에는 로마 해군을 지탱하던 군선의 재목이 없어 머나먼 아프리카에서까지 수입해야만 했고, 결국은 유럽의 풍부한 숲속에서 성장한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한다.

앙코르와트도 마야도 농사를 짓기 위해 숲을 없애고 에너지로 나무를 고갈시키면서 그렇게 붕괴되고 말았다.

석유 문명의 몰락

오늘날 우리는 석유 문명의 절정과 풍요를 마음껏 누리고 있다. 적어도 소비생활만큼은 역대 어느 왕이나 황제보다도 훨씬 더 호화롭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세종대왕이 에어컨 나오는 가마를 타고 출퇴근할 수는 없었다. 네로 황제도 칠레산 포도주를 값싸기 마실 수는 없었다.

사실 멸종돼 가던 고래를 구한 것도 석유였다. 19세기 유럽의 밤을 밝힌 가로등과 등불의 원료는 고래 기름이었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비롯해서 '포경선(捕鯨船) 문학'이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로 19세기 고래잡이는 고래 씨를 말릴 정도로 극성이었다. 그런데 석유 등잔이 등장하면서 고래는 간신히 살아났다.

이런 석유 문명 또한 화석연료의 고갈과 함께 몰락을 피할 수 없다. 그런 몰락의 예를 우리는 최근에 아주 가까이에서 목격하고도 이를 잘 모르고 있다. 바로 북한이다.

1990년대 초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소연방이 해체되자, 구(舊) 소련의 북한에 대한 석유 공급이 한순간에 중단되고 말았다.

사실 북한은 거의 공짜에 가까운 소련의 석유 덕택에 수십 년 동안 풍요를 구가해 올 수 있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북한은 남한보다 훨씬 잘 살았던 사회주의 모범 국가였다.

북한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전후(戰後) 복구 3개년 계획을 수립, 금세 식량의 자급자족 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 1950년대 북한은 남한에는 단 한 대도 없었던 트랙터를 2000대나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남한이 태풍 피해로 식량이 부족할 때 지금과는 정반대로 북한은 식량 원조를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석유 공급이 끊어지자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이 모든 풍요가 멈춰버렸다. 버스도 멈추었고 기차도 멈추었다. 거의 모든 공장도 가동을 멈추었다. 탱크도 비행기도 움직일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식량생산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현대 농업은 석유 농업이다. 논밭을 가는 데서부터 종자 생산, 비료, 농약, 수확, 포장, 운송, 보관 등 식량 생산의 전 과정에 석유 에너지가 투입된다.

우리가 먹는 한 끼 식사의 90%가 석유를 비롯한 화석연료다. 1945년 대략 23억 명으로 추산하던 세계 인구가 현재 70억 명으로 증가할 수 있었던 것도 전 세계 농지에 화석 에너지가 대량으로 뿌려져 세계 곡물 생산량이 세 배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북한은 식량 부족을 해결하지 못한 채 수십만 인민들이 끔찍하게도 아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금도 북한은 여전히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고 있다.

햇빛 세상의 재생, '햇빛 발전'과 '햇빛 농업'은 하나다

그런데 석유 없는 세상을 맞이했던 또 하나의 나라가 있다. 다름 아닌 쿠바다.

쿠바 또한 구소련의 석유 지원으로 남미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에 속했다. 심지어 쿠바는 소련 몰래 원조를 받은 석유를 되팔기까지 했다.

그리고 1990년대 초반 갑자기 구소련의 석유 공급이 끊겼다. 쿠바도 북한과 마찬가지로 하루아침에 원시시대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나 쿠바는 북한과는 전혀 다른 대응으로 위기를 극복해 나갔다. 쿠바는 지속가능한 유기농으로 전환, 1990년 43%에 지나지 않던 식량자급률을 1994년 97%로 높여 혁명 이후 처음으로 식량의 자급자족 체제를 갖춤으로써 석유 문명에서 탈석유의 생태 순환 농업사회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도대체 무엇이 이 같은 차이를 낳았을까.

북한과 쿠바의 차이는 다름 아닌, 국가로부터 자율성을 갖고 있는 소농과 자치공동체의 존재 유무였다. 쿠바의 인민들은 국가가 비상사태를 맞아 어떤 지원도 해줄 수 없게 되자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바리오(barrio) 지역공동체를 중심으로 스스로 자립 자치의 탈석유 유기농업과 도시농업을 선택하였고 적어도 굶어 죽는 주민들은 발생하지 않았다. 쿠바 정부도 국방비를 절반으로 줄이며 인민들의 유기농업을 지원했다.

그러나 북한에는 소농과 인민들 스스로의 지역 자치공동체가 사라지고 없었다. 북한 전체주의 왕조체제에는 인민·대중들이 주체사상의 자주성과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립 자치의 공동체가 없었다. 최악의 식량 부족 사태에 직면해서 오직 수령과 당의 지시·명령을 기다리다 굶어 죽는 사태는 이렇게 해서 발생했던 것이다.

햇빛 발전과 탈석유 생태순환 햇빛 농업은 한 뿌리다. 수많은 청년들이 새로운 자립·자치의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일자리의 보고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인류는 석유를 거의 절반 정도 불태웠다. 석유는 조만간 고갈되고 만다. 석유 고갈 이후의 가까운 미래를 북한과 쿠바는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산업 자체가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오늘 날, 기후 재앙과 타이타닉 침몰 5분 전 에너지-식량 위기를 대비해서 한국의 청년들과 노동자들이 과연 무엇을 선택해야만 하는지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쿠바 아바나 ⓒ프레시안(박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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