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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침묵을 강요하던 '강간 문화'는 끝났다"

생존자에서 증언자로...'미투'가 혁명적인 이유

유명 배우이자 청주대학교 교수로 일한 조민기 씨의 성추행 사실이 20일 폭로됐다. 인간문화재 하용부 씨의 성폭행 폭로도 나왔다. 지난 달 29일 서지현 검사의 검찰 내 성추행 폭로로 불붙은 한국의 '미투'(# Me Too) 운동은 최영미 시인의 고은 시인 성추행 폭로를 거쳐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의 성폭행, 오태석 극단 목화 대표의 성추행 의혹까지 우후죽순처럼 불거져 나오고 있다. 영화 배우이자 기획자인 ㅈ 씨, 연출가 ㄱ 씨 등의 성추행 의혹도 풍문으로 떠돌고 있다. 문화계를 포함한 각계 원로들이 ‘다음 차례’가 될까봐 떨고 있다는 우스개(?) 소리도 들린다.


"침묵을 강요당하던 시대는 끝났다"

"피해 당사자가 자기 이름과 얼굴을 밝히고 나오는데, 한국 사회 가부장성을 감안하면 강간 피해까지 폭로가 이어지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이윤택, 하용부 등 강간 피해자들의 증언이 이어지는 것이 놀랍다.

여성들의 성규범은 정말로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로 40-50대 여성들의 여성들이 폭로를 하고 있는데, 이 세대의 여성들 사이에 분명한 각성이 있었고, 그래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이 여성들은 성적 자기 결정권을 믿고 있고, 그에 비해 과거의 성의식을 그대로 갖고 있는 남성들 사이의 엄청난 간극을 보여준다. 이 여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강간 피해 경험까지 아주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미투'는 이제 성폭력에 대한 침묵을 강요당하고, 그로 인해 묻히고 가해자가 안전하게 피해갈 수 있는 시대는 끝나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성학자 권김현영 성공회대 외래교수는 최근 '미투' 운동의 의미에 대해 설명했다.

페미니즘에서는 성폭력 피해자들을 '생존자'라고 지칭한다. 법률적 의미로서의 '피해자'가 지닌 수동적이고 약한 존재라는 고정된 이미지를 버리고 자신의 삶이 직면한 문제를 예민하게 바라보고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또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끔찍한 폭력을 극복하고 살아남았음을 축복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현재 '미투' 운동에 동참하고 있는 주로 40-50대 여성들은 '생존자'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이런 생존자들이 이제 '증언자'로 나서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증언자가 되기까지 과정은 지난한 '투쟁'에 기반한 것이다.

"너는 거기 왜 있었니? 네가 원해서 간 거 아니야?"
"왜 끝까지 저항하지 않았니?"
"너의 잘못도 있으니까 아무 말 하지 마."

성폭력 피해로부터 살아남은 순간부터 이런 의혹의 눈길을, 의구심 가득찬 질문들을 이들은 가슴에 응어리가 맺히도록 반복해서 들어왔다. 서지현 검사는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데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증언했다. 이 여성들은 '성폭력에 대해 침묵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적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답'을 찾았기 때문에 성폭력 피해까지 세세하게 증언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미투' 폭로는 즉자적이거나 일회적인 주장에 그치지 않는다.

문화예술계의 '거목'들의 추악한 얼굴들...진보/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검찰에서 촉발된 최근 '미투' 운동은 문화예술계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영향력을 가진 특정인의 눈에 드는 것이 성공과 실패를 가를 수 있는 업계의 특성상 그들이 가졌던 무소불위의 '권력' 때문에 벌어진 일로 풀이된다. 이윤택 씨의 경악할 만한 성추행, 성폭행은 연극판에서 그가 누렸던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준다.

사실상 극단 내 모든 사람이 알만할 정도로 공공연하게 있었던 마사지 등을 가장한 성추행 행태를 목격한 숱한 '방관자'들의 존재 역시 그의 권력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게 만든다. 이들 '가해자'와 '방관자'의 '침묵의 연대'는 그간 한국 사회의 '강간 문화'가 어떻게 유지되어 왔는지 보여주기도 한다.

"사법 권력이 접근할 수 없는 일이었고, 자신을 포함한 계속해서 피해자들이 발생하고 있지만 가해자는 여전히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권력으로 존재한다는 자각 때문에 '미투' 폭로가 문화예술계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론 보도를 보면 이들 여성이 피해를 입었을 당시, 부모나 남편 등 주위 사람들에게 알렸다. 하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자신도 '미래'와 직결된 문제이었고 당장 맞설 수 있는 힘도 없기 때문에 침묵했다는 것이다. 현재 서지현 검사, 최영미 시인 등에 "원래 평판이 안 좋았다", "처우에 대한 불만 때문에 그런다"는 등 '2차 가해' 성격의 반발이 나오는 것을 보면 사건 발생 직후 그들의 권위와 권력에 도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여성들은 과거의 일들을 낱낱이 다 기억하고 있다가 이제는 더이상 참지 못하겠다고 폭로에 나섰다. 어느 정도 그 업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았고, 가족들도 이를 지원해줄 것이라는 자신감에 기반한 행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증언이 갖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권김현영 교수)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낡은 시각으로 '미투' 운동을 바라보고 있다. 이윤택 씨는 공개 사과를 하는 기자회견을 통해 '성추행은 했지만 성폭행은 아니었고 합의된 관계였다'고 주장했다. 성폭행 사건에서 가해자들이 취하는 전형적인 태도다. 이에 피해자 5명은 공동으로 이윤택 씨에 대한 법적 대응을 논의하고 있다고 한다. 조민기 씨도 '성추행 의혹'에 대해 부인하는 입장을 밝히자, 연극배우 송하늘 씨에 이어 청주대 졸업생까지 증언자가 나오고 있다. '미투'가 '강간 문화'를 지탱해온 '침묵의 연대'에 맞서는 것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또 다른 형태의 저항 담론은 고은 시인의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을 걱정하는 등 가해자들의 예술적 성취가 폄하될까봐 걱정하는 이들이 쏟아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고은, 이윤택 등 일부 가해자들이 지난 대선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는 등 소위 '진보 인사'였다는 점에서 이를 진영 논리로 바라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문화예술계의 미투 폭로가 서지현 검사 사건이나 다른 정치적 사건에 대한 '물타기'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페미니즘은 진보/보수의 문제가 아니고, 여성들에 대한 폭력의 문화는 어느 진영에나 다 있었다. 진보인사이든, 보수인사이든, 그들은 권력을 갖고 있었다. 자신이 가진 권력을 어떤 이는 돈을 끌어모으는데 사용했고, 어떤 이는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는데 사용했다. 이 중 어떤 것이 더 문제가 있고 덜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나. 자신들이 판단하기에 '악한 사람'이 권력을 휘두르는 방식은 나쁘고, '선한 사람'이 권력을 휘두르는 방식은 나쁘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낡은 프레임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경향신문>의 만평처럼 '미투'가 일종의 물타기라고 보는 것도 마찬가지로 낡은 프레임이다."(권김현영 교수)


▲2월 20일자 경향신문 만평

'미투'에 미온적인 정치권..."연대를 고민해야할 때다"

'미투' 운동에 대해 정치권 역시 조용하다. 다수의 국회의원들 역시 자신이 '미투' 폭로의 대상이 될 것을 걱정해야할 상황이라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지만, 정치가 해야할 역할을 고려하면 이같은 '침묵'은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정치인도 나서서 십수년을 참다가 용기 있게 자신의 피해를 폭로하고 나선 여성들을 지지하거나 지원하는 대책을 고민하고 있지 않다.

주무부처인 여성가족부는 지난 1일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세부계획' 등을 발표하는 등 관련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뜬구름 잡기'에 불과하다. 직장내 성희롱과 성폭력에 대한 전수 조사를 실시하고 교육을 강화하겠다는 것이 현재 내놓은 대책의 핵심이다. 이는 현재 당장 발생하고 있는 '미투' 폭로자들에 대한 '2차 피해'를 줄이거나 여전히 자신의 피해 사실을 증언할 수 없는 수많은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책이 아니다.

"이제는 성폭력을 폭로한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고립되지 않도록 지지, 지원하는 게 매우 중요한 과제다. 이 여성들을 포함한 피해를 폭로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목소리를 주고, 그 목소리에 권위를 주고, 체계 안으로 이 문제를 가져와 해결책을 모색하는 게 우리 사회에 던져진 과제다. 이들과 우리가 어떻게 연대할 것인지 고민해야할 때다."(권김현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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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기혜

프레시안 편집·발행인. 2001년 공채 1기로 입사한 뒤 편집국장, 워싱턴 특파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한국의 워킹푸어>, <안철수를 생각한다>, <아이들 파는 나라>, <아노크라시> 등 책을 썼습니다. 국제엠네스티 언론상(2017년), 인권보도상(2018년), 대통령표창(2018년) 등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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