딘 애치슨, 폴 니츠 등 미국의 전면적 재무장을 원하는 세력에게 북한의 남침은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었다. NSC-68이 주장한 소련 군사력에 의한 세계 공산화 음모가 현실화 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소련의 음모가 드러난 이상 미국은 대응에 나서야 했다.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전면적 재무장이 그것이다.
사실 북한의 남침은 미국 지도자들의 '자유 세계' 수호 의지를 시험하는 시금석이었다. 미국이 단호하게 대응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안보 공약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중립주의를 부추기게 될 터였다. 서유럽과 일본은 소련, 중국과의 화해를 추구할 것이다. 반면 전면적 재무장과 함께 북한을 격퇴한다면 서유럽과 일본을 미국의 세력권 안에 확실히 묶어둘 수 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트루먼 대통령은 측근에게 한반도는 "극동의 그리스다. 우리가 단호하게 대처한다면, 3년 전 그리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저들에 맞서 싸운다면, 저들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을 통해 그리스 좌파 세력의 민족해방 투쟁을 저지한 것을 말한다.
트루먼은 "남한의 공산화를 방치한다면 소련은 아시아 각국을 차례차례 먹어치울 것...나아가 아시아의 적화를 방치한다면 중동지역이 무너질 것이며 그 다음은 유럽이 될 것이라는 점은 명약관화"하다고 말했다.
트루먼과 애치슨에게 한반도는 중요했다. 남한의 공산화는 미국의 세계전략에 중대한 위협이었다. 핵 개발과 중국 공산화로 고무된 소련이 그 힘을 팽창하려 하고 있으며 남한이 그 출발점이었다. 소련의 팽창은 주변부에서부터 막아야 했다. 남한이 무너지면 동남아가 무너지고, 주변부가 붕괴되면 서유럽, 일본 등 핵심 산업 지역도 미국 세력권에서 벗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트루먼 등이 보기에 북한의 남침은 김일성 주도가 아니라 소련의 지령에 따른 것이었다. 스탈린이 미국의 관심을 한반도로 돌리게 해놓고 보다 중요한 지역, 예컨대 이란 등 중동지역 또는 서독이나 서유럽을 공격할 것으로 의심했다.
트루먼은 전쟁 발발 직후 7함대를 대만해협에 파견했고 인도차이나와 필리핀에 대한 군사원조를 증액했다. 일본과의 평화협정을 서둘렀고 서독의 재무장을 결정했다. 서유럽에 미 4개 사단을 주둔시키고 미국의 동맹국들은 경제 재건보다 군사력 증강을 우선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소련의 또다른 공격에 대한 대비였다. 소련으로 하여금 서유럽에 대해 한반도에서와 같은 군사적 모험을 감행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북한의 남침은 김일성 주도였다. 스탈린의 승인은 치명적 오판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스탈린은 미국의 군사행동을 촉발하지 않기 위해 극력 몸을 사렸다. 미국과의 군사력 격차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이탈리아 공산당의 무력 봉기를 억제했고 그리스 좌파의 독립투쟁도 아예 외면했다. 그리스를 영국 세력권으로 인정한 처칠과의 밀약을 준수한 것이다.
그랬던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한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작용했고, 마지못한 승인이었다. 우선 스탈린은 중국 내전에서 국민당이 이길 것으로 보았고 이에 따라 공산당을 거의 지원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공산당 승리 이후 스탈린은 마오쩌둥(毛澤東)에게 어색한 사과를 해야 했다.
다음으로 중국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과 함께 싸웠던 조선인 병사 2만 5000명이 1949년 말에서 1950년 초에 걸쳐 북한에 들어왔다. 김일성은 노련한 전투원인 이들과 함께 남한을 공격할 경우 남한 인민들도 함께 봉기해 한 달 내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소련이 핵을 갖게 된 것도 스탈린의 자신감을 북돋았다. 마지막으로 1950년 1월 '남한이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애치슨 선언도 스탈린의 모험을 가능케 했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 또는 미국 개입 전에 한반도 통일이 완수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애치슨 선언에 대한 오독에서 비롯된 오판이었다. 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이른바 애치슨라인은 소련과의 전면전에 대비한 방위선이었다. 소련과 전면전을 벌일 경우 남한(과 대만)은 미국의 군사적 보호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애치슨은 만일 한반도에 대한 국지적 도발이 감행된다면 유엔의 집단 안보를 발동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미국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을 동원해 남한 방어에 나섰다. 미국의 개입에 스탈린은 크게 당황했다. 미국과의 전쟁에 연루된 데 대해 겁을 먹었다.
흐루쇼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을 지원하고 도움을 주었지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겁을 집어먹었다. 미국을 무서워했다. 코를 석자나 늘어뜨렸다. 그는 미국에 대해 문자 그대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고 전한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사장될 위기에 처했던 NSC-68이 되살아났다. 급속한 재무장에 따른 재정 적자 따위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한반도 위기를 계기로 서방진영 전체의 전면적 군사력 증강에 나서야 한다는 게 미국 지도자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7월 19일 트루먼은 의회 연설을 통해 군사비 100억 달러의 증액을 요청했다. 우방국 원조 40억 달러, 핵무기 개발 예산 2억 6000만 달러도 요구했다. 당시 미국 지도부는 전쟁이 1년 내에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전쟁 이후 국방비 규모는 기존의 4배로 늘려야 하며 1954년까지 미국 및 동맹국의 재무장을 완료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계획은 9월 30일 NSC-68/2에 반영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미국이 치명적 실수를 저지른다. 38선 이북으로의 북진을 결정한 것이다. 당초 북한의 남침에 대한 유엔 결의는 '국경의 원상회복'이었다. 즉 북한군이 38선 이북으로 물러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7월부터 미 국무부는 미국 주도에 의한 한반도 통일을 구상했고 결국 9월 11일 북진을 결정한다. 9월 15일 인천 상륙에 성공한 미국은 남한군을 앞세워 10월 1일 38선을 넘었다. 이는 미국의 대소련 전략이 봉쇄(containment)에서 반격(rollback)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북한 주도의 한반도 통일이 미국에 치명적 타격인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 주도의 통일은 중국, 소련이 감내하기 어려운 손실이다. 특히 건국한 지 1년밖에 안 된 중국으로서는 미국이 북한을 넘어 중국까지 침공할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10월 15일 마오쩌둥은 대부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참전을 결정했다. 중국은 10월 25일 남한군에 대한 첫 공세로 미국에 경고를 보냈으나 맥아더는 이를 무시하고 북진을 계속했다. 결국 11월 28일 후방에 은신해 있던 중국군이 대대적 공세를 펼치면서 유엔군을 38선 이남으로 내몰았다.
전쟁은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미국과 중국과의 직접 군사 대결로 확대된 것이다. 특히 당시까지 패배를 몰랐던 미군이, 삼류 농민군으로 깔봤던 중국군에 밀려 치욕적 후퇴를 해야 했다. 봉쇄에서 반격으로의 정책 전환이 파탄 난 것이다.
당황한 트루먼 대통령은 11월 30일 "우리가 가진 모든 무기를 사용할 것"이라며 원자탄을 사용할 뜻을 밝혔다. 바로 다음 날인 12월 1일 미국을 급거 방문한 영국의 애틀리 총리는 이를 극력 만류했다.
서유럽 국가들의 최우선 관심 사항은 자신들의 방위였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원자탄을 사용할 경우 소련이 서유럽을 침공할 것을 우려했다. 재래식 군사력에서 압도적인 소련이 침공할 경우 서유럽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에게 한국전쟁은 미국 군사력의 낭비였고 유럽을 지켜야 했다. 영국은 또한 미국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사전 협의를 요구했다. 결국 핵 사용은 일단 유예됐다.
트루먼 대통령은 12월 14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면서 국방예산의 대대적 증액을 요청했다. 미국 및 동맹국의 재무장 완성 시기를 기존의 1954년에서 1952년 7월로 앞당기기로 했다. 미국의 모든 경제력을 군사물자 생산에 쏟아 붓고 미군 병력을 확충하는 한편 동맹국에 대한 군사원조도 대폭 증액하기로 했다.
이러한 계획이 NSC-68/4로 작성됐고 이는 미국 재무장의 기본 계획이 됐다. 이날 열린 NSC 회의에서 애치슨 국무 장관은 전면적 재무장의 시급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부가 원하는 규모의 병력을 모두 확보한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유럽 우방국들이 원하는 군사 원조를 모두 해준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병사들을 무장시킬 무기들을 모두 생산한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총동원 체제를 갖춘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12월 15일 트루먼 대통령은 전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우리의 가정, 우리의 나라, 우리가 가치 있다고 믿는 모든 것들이 중대한 위협에 빠져 있다. 이 위험은 소련 지배자들에 의해 제기된 것"이라며 소련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5개월 전 북한만 비난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그는 이어 전쟁은 한반도에서 일어났지만 실제로는 "유럽과 세계 다른 지역들도 역시 중대한 위험에 직면했다"면서 이러한 "현존하는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병력을 기존 250만에서 350만으로 늘려야 하며, 무기 생산을 대대적으로 증강하고, 유럽 동맹국들과 미국의 군대를 통합하고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51년 1월 8일 연두교서를 통해서는 "남한 침략은 세계를 단계적으로 접수하려는 소련 공산 독재의 일환"이라고 규정했다.
나아가 "서유럽이 소련 침공에 무너지면 소련의 석탄 생산량은 2배, 철강 생산량은 3배로 늘어날 것이며 미국이 유럽을 외면하면 소련은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될 것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이 소련에 무너지면 핵심적 원자재의 산지들을 잃게 될 것인데 그중에는 원자탄의 원료인 우라늄도 포함돼 있다. 나아가 소련이 유럽과 아시아의 자유국가들을 집어삼키면 우리로서는 감당조차 할 수 없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우리를 압박해 올 것이다. 그런 상황이 되면 소련은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도 자신의 의지를 세계에 강요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 한반도에서는 제한전쟁을 수행하는 한편 세계 전략 추진을 위해 핵심 산업 지역인 서유럽과 일본을 재무장해야 한다는 게 트루먼 행정부의 전략이었다. 트루먼은 "우리는 유럽 국가들에 대한 경제 원조를 계속할 필요가 있다. 그 원조는 이제 그들의 국방 건설과 연계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제 한국전쟁의 승리는 트루먼 행정부의 목표가 아니었다. 미국과 동맹국의 전면적 재무장이 목표였다. 한반도에서 처음 시도했던 반격 정책의 실패를 받아들이고 봉쇄 정책으로 되돌아가는 한편 자유세계의 재무장에 의해 소련에 대한 압도적 힘의 우위를 달성하는 것이 목표가 됐다. 힘의 압도적 우위를 바탕으로 향후 외교의 주도권을 잡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데 뜻밖의 암초가 나타났다. 현지 사령관 맥아더가 다른 의견을 낸 것이다. 1951년 1월 중순 맥아더는 중국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만주에 20~30개의 원폭을 투하하며 중국을 해상 봉쇄하고 중국 국민당 군대를 동원하자고 제안했다. 맥아더는 한국전쟁의 승리를 원했고, 이를 위해서는 중국으로의 확전도 불사할 태세였다.
그러나 이는 트루먼 행정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트루먼 행정부는 한국전쟁이라는 국지전의 승리보다는 향후 소련과의 세계적 대결에서 주도권을 보장할 힘의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결국 4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해임한다. 전쟁 도중에 최고 사령관을 해임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한국전쟁의 승리냐, 자유진영의 재무장이냐 하는 문제는 전쟁 중 지휘관을 해임해야 할 정도로 미국 사회의 첨예한 논쟁점이었다.
미국의 일반 대중들에게 트루먼 행정부의 처사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한국전쟁이 교착 상태인데 현지 지휘관을 해임하다니. 게다가 한반도가 아닌 유럽에 미군 병력을 파견하는 등 미국과 서유럽 군사동맹(나토) 구축에 열을 올리다니. (트루먼 대통령은 50년 12월 20일 당시 콜럼비아대 총장이던 아이젠하워를 나토 최고사령관에 임명했고 아이젠하워는 다음 해 1월 5일 유럽으로 떠났다)
공화당 의회는 분노했고 대중들은 실망했다. 공화당은 중국 공산당과의 전면전을 통해서라도 중국을 되찾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맥아더는 개선장군처럼 미국에 돌아왔고 의회에서는 맥아더 해임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청문회가 열렸다.
그러나 트루먼은 진짜 이유를 밝힐 수 없었다. NSC-68이 극비 문서였기 때문이다(NSC-68이 기밀 해제된 것은 1970년대 후반이다). 애치슨 국무, 마셜 국방 장관과 브래들리 합참 의장 등 고위 관리들은 청문회에서 '중국으로의 확전은 소련과의 전면전으로 치달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전면전을 치를 군사적 준비가 안 돼 있다. 따라서 조속히 전력을 증강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서유럽의 군사력 증강이 필수적'이라는 논리로 의회와 대중을 설득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의 세계 패권은 비로소 완성됐다. 그것은 대대적 군사비 투입에 의한 전면적 재무장에 의해 가능해졌다. 1950년 회계연도의 미 국방 예산은 130억 달러였다. 한국전쟁 기간인 1951~53년 회계연도의 국방 예산은 총 1556억 달러였다. 4배 늘어난 것이다.
수소탄이 개발됐고 원자탄도 대폭 늘어났다. 미국의 원자탄은 1950년 299개에서 1955년 2422개로 늘어났다. 소련은 5개에서 200개로 늘었다. 1950년 6월에서 1953년 1월에 이르는 2년 반 동안 미국의 군수물자 생산은 7배로 늘어났다. 3개월 마다 80억 달러 상당의 군수물자가 생산됐다. 1950년 6월 21개 편대였던 전략폭격기는 1952년 6월 37개 편대로 증강됐다. 해외 100여 곳에 미군 폭격기의 발진기지가 건설됐고 최초의 제트 폭격기 B-47이 배치되기 시작했다.
동맹국에 대한 지원은 경제원조에서 군사원조로 바뀌었으며 액수는 2배로 늘었다. 경제원조에 대해서는 퍼주기라며 반발했던 의회와 국민들도 군사원조에는 찍소리 없이 수긍했다. '소련의 군사적 위협'이라는 부적이 신통력을 발휘한 것이다.
애치슨은 1951년 1월 10일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소련이 없다 해도, 공산주의가 없다 해도 전쟁으로 망가진 자유세계의 일부를 유지, 강화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업"이라고 토로한 바 있다. 즉 미국의 군비 증강은 소련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대응이라기보다는 자유세계의 결속과 경제 부흥을 위한 편법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소련에 대한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를 달성했다. 나아가 소련의 핵 보유와 중국 공산화로 잃었던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또한 서유럽과 일본을 미국 세력권에 묶어놓은 것과 함께 이들 국가의 경제를 부흥시켰다. 미국의 막대한 군사원조가 경제 재건의 마중물이었다.
1949년부터 침체에 빠졌던 미국 경제도(1948년 하반기 192였던 제조업 생산지수는 1949년 4월 179로 하락했고 실업자 수도 220만 명에서 300만 명으로 늘어났다) 한국전쟁 이후 군사 수요에 힘입어 되살아났다. 미국인들의 표현에 따르면 '총과 버터', 즉 군비 증강과 경제 부흥을 동시에 확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미국은 군사국가, 전쟁경제로 변모했다. 사실 미국이 대공황을 극복한 것은 뉴딜 정책 덕택이 아니었다. 2차 대전에 따른 막대한 전쟁 수요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는 2차 대전에 2950억 달러(현재 가치 약 3조 9000억 달러)의 전쟁 비용을 지출했으며 이중 17%인 501억 달러(현재 가치 6670억 달러)는 영국, 프랑스, 중국, 소련 등 동맹국에 대한 식량, 석유, 무기 대여에 사용됐다. 렌드리스(Lend-Lease, 무기대여법)가 그것이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전쟁 수요가 미국을 대공황의 늪에서 건져 올린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본의 경제 부흥에, 베트남전쟁이 한국의 경제 재건에 기여한 바를 상기해 보라. 세계의 전쟁 물자를 거의 혼자 만들어낸 미국이 2차 대전의 전쟁 수요로 얻은 혜택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해야 할 것이다.
2차 대전이 끝나면서 이 엄청난 군사 수요가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했을 때 미국 경제는 과연 순항할 수 있었을까. 1945년 1140만이었던 미군 병력이 1947년에는 160만으로, 1945년 890억 달러였던 국방 예산이 1947년에는 190억 달러로 대폭 축소됐다. 이는 새로운 일자리 1000만개를 창출해야 하는 반면 (군사) 수요는 700억 달러 줄었음을 의미한다. 당연히 경제는 침체할 수밖에 없게 된다.
1950년 초 NSC-68을 구상했던 미국의 정책당국자들도 당연히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 경제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대규모 군사 수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군사적 케인스주의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은 대대적 재무장으로 세계의 주도권과 경제 부흥을 이끌었지만 이는 끊임없는 군비 증강과 전쟁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는 위험한 길이었다.
사실 1950년의 재무장은 2차 대전의 전시 상황을 재현한 것이나 다름없다. 1940년부터 1945년 8월까지 6년 가까이 미국의 전쟁 비용은 2950억 달러였다. 1951년에서 53년까지 3년간 국방 예산은 약 1556억 달러였다. 전쟁 기간과 거의 같은 규모의 군사비를 지출한 것이다. 이러한 군사비 지출은 이후에도 지속된다. 일례로 1960년대 말 윌리엄 풀브라이트 상원의원의 조사에 따르면 1946년부터 1967년까지 22년간 미국 정부가 '군사력 증강'에 사용한 예산은 9040억 달러인(전체 예산의 57.3%) 반면 교육, 보건, 노동, 주택, 복지 등 '사회적 목적'에 사용한 돈은 960억 달러에(6.1%) 불과했다.
즉 1950년 이후 지금까지 미국은 실제 전쟁을 하거나 아니며 전쟁 준비에 매진하는 영구 전쟁국가로 변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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