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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격노'와 '정신무장 지시'는 뭐가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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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격노'와 '정신무장 지시'는 뭐가 다를까?

[기자의 눈] 일반의약품 슈퍼마켓 판매와 레임덕 현상

감기약·소화제 등 일반의약품(OTC) 수퍼마켓 판매가 사실상 무산된 데 대해 청와대와 보건복지부 사이에서 설왕설래가 이어지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보도가 나왔고, 청와대는 이를 부인했지만 대통령의 의중이 '판매 허용' 쪽에 실려 있음을 시사했다.

이 문제는 약사협회, 의사협회, 제약업계 등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안으로 어느 정부에서도 쉽게 풀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처럼 잡음이 새나온데 대해서는 짚어볼 지점이 없지 않다는 지적이다.

"격노했다" vs "격노한 건 아니다"

일반의약품을 약국이 아닌 수퍼마켓, 편의점 등에서도 판매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지론이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보건복지부의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콧물이 나면 내가 아는 약을 사 먹는다. 그러면 개운해진다"면서 "미국 같은 데 나가 보면 슈퍼마켓에서 약을 사 먹는데 한국은 어떠냐"고 진수희 장관에게 말한 바 있다.

하지만 1년 이상 이 문제를 쥐고 있던 복지부가 지난 3일 "약은 약사만이 다루도록 약사법에 규정되어 있다"고 발표하면서 일반의약품 약국 판매가 사실상 무산됐다.

이에 대해 의사단체는 물론 언론이나 일반 여론 등도 "복지부가 약사단체 편만 들었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통령이 지난 7일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면서 '격노'했다는 것. 이날 <중앙일보>는 "대통령이 '도대체 사무관이 하는 것처럼 일을 하느냐'며 화를 냈다"며 "이 대통령이 진수희 장관을 거명하면서 화를 냈다고 들었다"는 청와대 관계자의 발언을 전했다.

당시 청와대는 "한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정신을 재무장할 필요가 있다", "여러 가지 현안이 있고 이슈가 복잡한 때일수록 청와대와 정부는 민생에 중심을 두고 꾸준히 일을 해 나가야 한다", "우리가 중점을 두고 있는 정책을 일관되게 끊임없이 추진해야 한다"는 등 대통령 발언만 소개했었다. 이날 <중앙일보> 보도는 한층 더 구체적이었던 것.

진 장관이 올 1월 지역구 약사회에서 "여러분이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고, 진 장관과 가까운 이재오 특임장관이 "기획재정부에서 슈퍼 판매를 추진하는데 내가 못하도록 하겠다. 약사님들은 안심하셔도 좋다"고 말했던 전사(前事)와 맞물려 이 보도는 적잖은 파장을 낳았다.

김희정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면서도 "일반 의약품 슈퍼 판매 관련해선 관련 수석실의 보고가 있었고, 대통령께선 국민 편익을 중시해야 한다는 평소의 지론을 한 번 더 말했다"고 덧붙였다.

이 문제에 대한 이 대통령의 심기가 편치 않은 것을 시사한 것. 청와대 관계자는 "(일반 의약품 슈퍼 판매를) 푸는 쪽으로 계속 논의해보라는 뜻"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청와대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을까?

이날 보도와 청와대 기류대로라면 복지부가 약사회의 압력에 굴복해 국민 여론과 대통령의 지시를 수행하지 못한 것이 된다. 하지만 이같은 경우에도 '청와대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 지를 모르고 있었나'는 지적은 가능하다. 주무부처인 고용복지수석실과 보건복지비서관은 뭘 했냐는 것.

최근 중수부 폐지 문제를 둘러싸고도 한나라당에서도 청와대에 대해 "사개특위가 진행되던 지난 3달 동안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이제 와서 검찰 편을 들어준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정책 조정, 여론 선도 등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가 가닥이 잡히고 나면 여론의 향배와 정치적 득실을 고려해 뒤늦게 숟가락을 얹고 나선다는 것.

복지부 쪽도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할 말이 없진 않은 분위기다. 복지부 관계자는 '스탭이 꼬인 면'은 인정하면서도, "대통령이 세세한 사안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청와대는 다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청와대 입성 전부터 일반의약품 슈퍼 판매 소신을 견지했던 정상혁 보건복지비서관은 이화여대 의대 교수인 의사고, 보건복지비서관실에는 복지부에서 파견된 행정관도 있다. 이들이 일의 전개를 훤히 꿰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복지부는 이달 중순 열릴 중앙약사심의위원회에 무게를 싣고 있었다. 의사 처방전이 필요한 전문의약품과 약사가 단독으로 판매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 약국 밖에서도 팔 수 있는 의약외품 분류 조정이 되면 약국 밖에서 살 수 있는 품목이 자동적으로 늘어난다는 논리다. 안정성이 확인된 가정상비약이 의약외품으로 전환되면 실질적으로 같은 효과를 가질 수 있다는 것.

복지부 관계자는 "약사단체와 의사단체를 모두 중앙약사심의위원회까지 안고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고 말했다. 중앙약사심의위원회는 의사 4인, 약사 4인, 전문가 4인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이제 중앙약사심의위원회가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 지도 미지수다. 그간 이 회의는 전문의약품을 지키려는 의사단체와 일반의약품을 지키려는 약사단체가 절묘한 힘의 균형을 이뤄 재분류를 거의 진행하지 못했다.

게다가 대한의사협회는 일반의약품 슈퍼 판매 무산을 기화로 경증환자가 대형병원으로 쏠리는 현상을 막기 위해 복지부가 추진 중인 선택의원제 백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약사회가 반대하는 일은 못하면서 의사회가 반대하는 일은 하겠다는 것이냐"는 논리다.

청와대와 부처, '복지부동' 배틀?

지역구 의원직을 겸임하고 있고 내년 총선 출마가 확실시되기 때문에 사실상 재임기간이 얼마남지 않은 진수희 장관이 마지막 난제에 봉착한 상황이다. 약사단체에서 오해의 소지가 큰 발언을 했을 뿐더러, 이익단체들을 매끄럽게 조정하지 못한 진 장관의 책임이 적지 않다.

하지만 갈등 조정, 정책 방향 제시 등에 있어서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정신 무장', '국민 우선' 등의 돌격구호만 앞세우는 청와대도 임기 말에 스스로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부처에 가보면 정말 안 움직인다"면서 "공무원 마인드는 어쩔 수 없는건가 모르겠다"고 말하고 한다. 이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이 볼멘 소리의 횟수는 더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여의도에선 "진짜 복지부동하는 곳은 청와대다"는 불만도 높다. 한 한나라당 관계자는 "중수부 문제도 그렇고 등록금 문제도 논쟁이 치열할 때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일이 정리가 되면 몽니를 부리던지 숟가락을 얹고 나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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