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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측 안내원 청년의 '짝사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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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측 안내원 청년의 '짝사랑' 이야기

[기고] <홀로 아리랑>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다

2월 말까지 책 초고를 완성해야 한다. 방학 중에 매일 연구실에 나오는 이유다. 글 진도가 안 나와 오후 내내 밍기적거리다가 유투브를 열었다. 어제 강릉에서 열린 삼지연관현악단 연주를 보려고.

그런데 풀 타임 동영상이 없다. 할수 없이 여기저기 짜깁기 영상을 둘러보다 마지막 공연 장면을 본다. 8명의 여가수들이 나와서 남한과 북한 노래를 한 곡 씩 부른다. 남한 노래는 <홀로 아리랑>. 익숙한 멜로디와 가사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당신이 여자 하키 단일팀 구성을 반대하는 20대라면, 50대 아저씨의 이러한 감상적 정서에 코웃음이 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눈물이 나는 것을 난들 어떻게 하누. 관객들도 눈시울이 젖는다. 마지막으로 가수들이 손을 흔드는데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함께 손을 흔든다. 그 모습 보고 있노라니, 20여년 전의 한 기억이 떠올랐다.

학교에 처음 부임한 1999년 5월부터 '학보사 주간'을 맡았다. 당시에는 전국 대학에서 다 모이는 '학보사 주간교수 협의회'라는 것이 있었다. 해마다 한번 정기모임을 가졌는데, 그해 여름은 금강산에서 회의를 하는 걸로 결정이 났다.

1998년 11월 18일에 남한 민간인들의 금강산관광이 개시되었다. 그러니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초창기였다. 당시는 관광지역 안에 숙박시설이 없어서, 대형 유람선에서 잠을 자고 낮에는 매번 출입국 절차를 밟아 금강산을 구경했다.

언젠가는 소설 소재로 쓰리라 작정한 에피소드들이 많았다. 몇 가지만 살짝 공개해 보자. 관광가이드를 맡은 남한 여성을 짝사랑한 북한 안내원의 이야기가 있다. 뭔가 말을 붙이려는데 여성이 차갑게 팽 돌아서는 모습. 그리고 그 북한 청년이 버스 주차장 근처에서 늙수구레한 선배 안내원들을 붙잡고 "아바이, 제 마음을 어쩌란 말입네까?" 울먹이는 모습을 우연히 스쳐 보았던 것이다.

북한 영토에 들어가기 전에 철저히 교육받은 것이 있었다. 혹시나 금강산 길 요소요소에 배치된 북한 안내원들의 입성이 남루하다고 간식거리나 특히 달러를 주면 큰 일 난다고. 북한의 민족적 자존심을 해치는 중요한 범죄행위가 된다는 게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이 어디야 다를까. 더구나 말이 통하고 감정이 통하는 한 민족끼리인데. 만물상을 구경하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내가 대열의 맨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우리 팀 남한 가이드가 뒤에서 머뭇머뭇거리는 게 아닌가. 돌아보니 잘 안 보이는 바위 틈에 초코파이와 귤을 몰래 숨기고 있었다.

대놓고 이유를 물어보지는 않았다. 반년 이상 관광코스 오르내리며 얼굴 익히고 마음을 나눈 북한 안내원들에게 뭐라도 나눠주고 싶은 인지상정임이 너무나 분명했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마지막 날이었다. 출입국 사무소를 빠져나오는 줄이 길었다. 언제 다시 오겠는가 싶은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울컥해졌다. 40대 초 정도 되는 북한 직원이 출국 도장을 쿵쿵 찍어주고 있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여권을 돌려주는 그이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감정이 복받쳐서 이렇게 말했다.

"통일 되면 다시 만납시다!"

표정 변화 없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던 그 남자. 관료주의적 무심일 수도 있었을 게다. 남한 관광객들을 대하는 정해진 매뉴얼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슬그머니 손을 빼는 그의 반응에 한편으로는 섭섭하고 한편으로는 더 마음이 애잔해졌었다.

<홀로 아리랑>을 듣는데 20여년 전 그때 그 장면이 선명히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 남자의 표정도 심지어 살짝 땀에 젖은 손바닥의 감촉도. 설악산에 비해 10배는 더 기기묘묘한 금강산의 절경. 하지만 2008년 금강산 가는 통로가 막힌 이후, 안타깝게도 그 산은 꿈에서도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통일이 무엇일까. 처한 입장에 따라 여러 계산이 있을 것이다. 북핵 위기로 대변되는 복잡다단한 정치경제적 환경에 따른 낙관론 혹은 비관론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나에게 그것은 복잡하지도 추상적이지도 않다. 인위적으로 찢겨지고 갈라진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통일이라 믿기에. 마음과 마음의 결합이 통일이라 믿기에.

나에게 통일은 가능성 제로의 짝사랑에 눈물 흘리는 북한 청년의 사랑이 결실을 맺는 날이다. 애써 무표정 짓던 북한 관원이 맞잡은 손에 나만큼의 힘을 주어 반응하는 날이다. 바로 그날이 통일의 날이다.

강릉 공연장을 메운 평범한 남쪽 사람들. 애틋한 마음으로 북쪽 가수들에게 마주 손을 흔드는 그이들의 마음도 다들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어차피 저녁에 책 쓰는 건 물 건너갔다. 담벼락에 이 글 올린 다음 풀타임 공연 장면을 검색해봐야겠다. 그러면 또 눈물이 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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