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주기적이고 공정한 선거를 통하여 정치 엘리트를 선출하는 절차적 정당성의 확보로 이해하는 방식은 민주화 이행론의 지배적 관점이다. 그러나 최소정의적 개념의 민주주의에 그치고 사회경제적 차원에서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으면 민주화는 정권 엘리트들의 교체라는 의미 이상을 갖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실질적 민주주의로의 이행은 기대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정치적 참여가 보편화되고 사회적 평등이 진전되는 질적 발전을 견인할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치경제적 기득 계급의 이익이 다른 계급을 압도하는 사회구조가 지속되는 한 공정과 형평의 가치 지향은 구호에 머무르고 만다. 정치 엘리트와 사회경제적 파워 집단의 결합은 계급 동맹의 성격을 띠게 되고 수직적 위계질서와 권위주의적 문화가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 사회적 형평과 경제적 평등이 사회의 지배적 패러다임으로 정착하지 않으면 양적 성장은 질적 발전과 조응할 수 없다. 특정 정치세력의 집권과 무관하게 사회의 기득 이익이 지속적으로 관철되는 한국사회의 운영 방식의 변화를 이끌어낼 제도개혁이 절실한 이유이다.
권력구조 개편, 기본권과 지방분권 강화 등의 거시적 정치담론 등이 사회운영 원리의 획기적 개혁을 모색하는 공론의 장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심각한 문제는 사회 전체에 뿌리 깊게 드리워져 있는 권위주의적 문화다. 경제사회적 사다리가 끊기고 소득 분배의 불균형이 심화되는 사회구조는 권위주의적 문화의 확산과 사회적 약자 및 소외층의 주변화를 결과한다.
한국의 경제 성장은 개발독재라는 단어가 상징하듯이 권위주의 정권과 재벌의 동맹을 통한 위로부터의 일방적 산업화였다. 정권의 절차적 정당성이 확립된 이후에도 이러한 사회의 기본 작동원리는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김대중 정부 때 IMF에 의해 강요된 신자유주의적 방식의 강화와 노동과 사회적 약자보다 기득 질서에 결과적으로 봉사했던 정책의 추진으로 한국사회의 양극화는 더욱 가속화됐다. 이명박 정권은 명시적으로 친기업 정책과 법인세 및 소득세의 인하를 추진함으로써 경제적 평등을 지향하는 노동과 복지정책은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박근혜 정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군사권위주의 정권은 물론이고 민주정부 조차 정책의 우선순위는 성장이었다.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은 사회적 기득질서 위주의 사회구조의 개혁을 추동하지 못했고 사회의 수직적 위계질서는 화석처럼 굳어졌다. 사회적 균열과 갈등이 대표되지 못하는 정당체계의 지속은 이러한 구조를 공고화했고, 공적 영역에서의 수평적 협력의 부재와 사회적 관계에서의 횡적 연대의 빈곤은 인간관계의 파편화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권한 남용으로 이어졌다. 사회적 소수와 약자의 주변화는 고질적 갑을 관계의 확대재생산과 사회경제적 배제로 구체화된다. 이러한 환경에서 사회적 해체는 빠르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
지식정보 산업, 금융 및 인공지능 서비스산업, 4차 혁명 등이 미래의 대안이라는 사고방식은 여야, 주류 언론, 전문가 그룹에게는 하나의 흔들리지 않는 도그마다. 격차 해소와 사회적 평등의 실현을 위한 토론이 공론의 장에서 지배적 담론의 위상을 차지하지 못한다. 정치공학적 논리에 매몰되어 있는 정치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지 못함으로써 개혁적 민주정부로의 정권교체마저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추동하지 못한다.
서지현 검사가 폭로한 성추행 등의 폭력은 사회적 병리임과 동시에 정치적인 문제다. 한국사회의 구조를 고민하지 않고 권력기관이 갖는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특징으로 사안의 성격을 축소하는 환원주의는 사태의 심각성과 한국사회의 폭력성이라는 핵심을 규명하지 못한다. 진단이 잘못되면 그릇된 처방이 내려질 수밖에 없다. 정치가 사회경제적 격차와 경제적 불평등, 이에서 연유하는 강자와 약자의 사회적 관계에 천착하지 않을 때 제2, 제3의 서지현은 속출할 것이고, 서지현과 비교도 안 되게 취약한 계층과 사회생태계의 먹이사슬의 하층에 위치하는 서민들과 사회적 소수의 삶은 더욱 피폐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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