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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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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정희 시대'를 말한다

[기고] <5.16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출판 기념회

민주·평화·복지 포럼(상임대표 이부영)이 주최하고 사월혁명회, 6·3동지회, 70년대 민주노동운동동지회, 4·9통일평화재단,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 71동지회, 7080민주화학생운동연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등 8개 단체가 초청하는 제1부 '5·16, 우리에게 무엇인가' 자료집 완간본 출판기념회와 제 2부 강연회가 16일 오후 2시 30분부터 5시까지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 20층 프레스클럽에서 열린다.

자료집 완간본은 지난 3월 14일 열렸던 '5·16쿠데타 50년- 5·16, 우리에게 무엇인가' 학술대회의 논문과 토론문을 정리·종합한 민주·평화·복지 포럼 정책자료집이다. 이날 출판기념회에서는 민주당 손학규 대표와 한승헌 변호사, 조화순 목사가 자료집 출판에 축사를 해준다.

강연회의 연사에는 70년대 노동자대표 최순영 전 YH노동조합 위원장과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한국현대사)가 나온다. 최순영 전 위원장은 <박정희 시대>의 최대 피해집단인 노동자 특히 여성노동자들의 입장에서, 그리고 한홍구 교수는 현대한국사 전공연구자의 입장에서 5·16군사쿠데타와 박정희 시대를 이야기한다.

다음은 두 사람의 강연문 요약이다.

◉최순영(전 국회의원, 전 YH노동조합 위원장) "한국 산업화는 박정희 독재의 공인가?"

박정희 군사독재 치하에서 YH무역노조 지부장으로서 여공으로 그 시대를 겪었던 나로서는 "아버지가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복지국가 건설이고 행복한 국가"라고 설명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행태에 기가 찰 노릇이다. 수구보수 세력까지 인정하는 현재의 빈부격차 확대, 재벌 독식 경제구조의 원조(元祖)가 박정희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병 주고 약 주는 꼴이다. 그래서 박정희에 대한 근본적인 재평가가 필요하다. 흔희들 박정희의 개발독재를 경제성장이라는 '공(功)"과 정치적 독재라는 '과(過)'로 평가한다. 경제성장이라는 '빛'을 위해서는 그 '그림자'로서 정치적 독재가 불가피했다는 식이다. 과연 그러한가? 수구보수 세력도 인정하는 정치적 독재자로서의 박정희의 '과'는 그렇다 치고, 우선 1960~1970년대의 경제성장이 박정희의 '공'인가? 오늘날 한국경제의 눈부신 발전의 토대를 쌓은 '한강의 기적'이 과연 박정희의 '공'인가?

첫째,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은 남북분단으로 인해 냉전체제의 '본보기'(show-window)가 된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강제된 것이었고, 그 성공을 위한 필요조건은 미국에 의해 제공됐다. 막대한 외자가 차관 등 여러 형태로 제공되었고 일본의 기술 제공과 미국의 시장을 열어주는 조치가 뒤따랐고 이 가운데서도 한일 국교정상화에 따른 대일(對日)청구권자금, 베트남 파병에 의한 외화 가득, 그리고 차관 제공 등에 의한 막대한 외자 도입이 1960~70년대의 여타 제3세계 나라들과 한국을 구별 지은 결정적인 차이였다. 1985년 말에는 467억 6,000만 달러로 급속히 증가했다.

둘째, 박정희 정권은 군사쿠데타로 집권해서 정통성을 결여했기 때문에 미국의 요구에 순응했을 뿐 아니라 그 요구를 유능하게 수행해냈다. 정통성 결여와 좌익경력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고도성장, 즉 급속한 자본주의적 발달을 이룩해내야만 대내외적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셋째, 박정희 정권은 재벌에게 특혜를 주고 철권통치를 휘두르는 과정에서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박정희 개인은 '청렴결백'했는가?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발표(2005년)에 따르면, 박정희는 중앙정보부를 통해 강제로 '부일(釜日)장학회'의 재산과 경향신문을 헌납하도록 압력을 넣어 '5·16 장학회'를 거쳐 '정수 장학회'(박정희와 육영수의 이름을 따서 작명했다)의 소유로 만들어 박정희 일가의 사유재산으로 만들었다(박근혜가 1994년부터 2005년까지 정수 장학회 이사장으로 재임했고, 2005년 현재 이 장학회가 보유한 자산은 1조 원대로 평가되고 있다). 김종필·이후락 등 그 측근 실세들도 부정축재자들로 발표되었다.

요컨대 박정희 정권의 유능함, 민족주의, 그리고 청렴결백함이 1960~1970년대 경제성장을 가져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한강의 기적'을 가져왔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접적인 생산자가 자발적으로 자본가에게 찾아가 임금노동자가 되는 것은 '목구멍이 포도청'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면서 분신자결한 전태일 열사의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요구는 노동자들의 진정한 열망을 표현했다.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는 '세계 최저의 임금수준,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세계최대의 산업재해'로 표현되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초과착취를 토대로 벌어들인 초과이윤을 재벌들에게 몰아주어 급속한 산업화, 즉 고도성장을 달성했다. 이것이 '한강의 기적'의 실체였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저곡가정책 등으로 농민들의 이농을 강제하는 한편, 노동자를 무권리 상태로 억압했다. 특히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동운동의 등장은 노동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했다. 국가권력과 자본의 폭압에 맞서고, 어용 한국노총을 거부하는 자주적 '민주노조'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지금 박정희를 '독재자'에서 '공로자'로 복권하려는 움직임은 무엇을 뜻하는가? 박정희는 결코 복지국가나 '행복한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오히려 고도성장을 위해 노동자·민중의 입과 눈과 귀를 막았고 노예처럼 묵묵히 자본과 국가권력을 위해 희생하라고 총칼로 위협했다. 그 결과 지금과 같은 불평등한 자본주의적 계급사회가 확립되었다. 이것이 '한강의 기적'이다.

박정희는 이 나라의 공로자가 아니다. 오히려 수구보수 세력도 인정하는 오늘날의 문제인 빈부격차와 사회양극화의 원조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은 '강제된 희생'이었지만 노동자·민중의 모든 희생을 감내한 부지런함 덕분이었다.

◉한홍구(성공회대 교수· 한국현대사) "군사반란 50년, 박정희 시대에 대한 역사 평가"

박정희의 친일이 '경미'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가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친일파로 꼽히는 이유는 그가 가장 철저한 일본식 황국신민화 교육을 받았고, 대통령이 된 뒤에 일본 군국주의의 발전 모델, 특히 만주국에서의 경험에 따라 한국을 병영국가로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시절 박정희의 삶에는 네 번의 결정적 변신이 있었다. 첫 번째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다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 것이고, 두 번째는 해방 직후에 광복군에 가담한 것, 세 번째는 남로당에 가담한 것, 마지막으로 여순사건 이후 단행된 숙군과정에서 다시 한번 극적인 변신을 해 살아남은 것이다. 한국현대사 굴곡에서 박정희 만큼 변신을 자주한 이도 찾아보기 힘들다.

전두환 시대에는 살아있는 독재자를 상대하기에도 힘에 부쳤다. 아무도 박정희를 파묻지 못했기 때문에 박정희는 1997년 다시 살아났다. DJP연합에 힘입어 등장해 박정희 껴안기에 주력했던 김대중 정권은 박정희를 다시 묻는 대신에 거액의 국고를 지원하여 그의 기념관을 짓겠다고 했다. 한편 노무현 탄핵 직후 위기에 몰린 수구세력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사람이 독재자의 딸 박근혜였다. 자연히 박정희 문제는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나라당이나 수구언론은 현재 박정희에게 쏠리는 관심이 마치 박근혜를 흠집내기 위한 정치공작인 것처럼 비판하지만, 사실 박정희로 대표되는 과거를 극복하고 역사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는 작업은 대한민국이 박근혜가 있건 없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통과의례다. 그 동안 수구세력은 있는 힘을 다해 박정희 시대를 미화해왔고, 냄새나는 것을 기를 쓰고 덮어왔다.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낼 능력도 관심도 없는 수구세력은 박정희의 유산에 기대지 않을 수 없었다. 유산을 상속받게 되면 부채도 같이 상속받아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일까? 수구세력이 뒤늦게 전열을 정비해 박정희를 비판하는 것을 자학사관으로 몰아붙이지만, 하필 빌릴 것이 없어 일본의 극우파 용어를 베껴와서 하는가? 아무리 박정희가 일본식 민족주의자요, 그의 발전 모델이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모델, 특히 만주국 모델을 닮았다 하더라도, 그를 미화하는 것까지 일본 극우파의 논리를 빌려와야 하는가?

박정희 시대가 그리운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정말 우리가 피와 땀으로 쟁취한 민주주의와 자유를 가벼이 여기는 사람들이다. 박정희 시대가 그리운 사람들은 오늘의 기준으로 그 시절을 평가하지 말자고 한다. 좋다. 그런데 박정희가 한 짓, 다른 나쁜 짓은 제쳐놓고 총을 거꾸로 들고 민주정부를 뒤엎고 헌법을 두 번씩이나 짓밟은 것은 그 시절 기준으로 해도 국가보안법은 봐주고, 형법을 적용한다 해도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한 자"로서 "수괴는 사형,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박정희, 그 시절 기준으로 해도 1961년과 1972년 두 차례에 걸쳐 범행을 저지른 국헌 문란의 수괴 아닌가? 형법 어디를 찾아봐도 경제 발전에 기여하면 그 죄를 사해준다는 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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