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보선이 끝나면서 여기저기 앞 다퉈 고개를 들고 나서는, '반갑지 않은 일'들이 줄을 이을 전망이다. 주로 '여당의 득표'에 보탬보다는 손해가 된다하여, 시행을 선거 뒤로 미뤄 놓은 '일'들이다. 정부부처나 청와대에서 정권의 충성스런 '전사'들이 머리를 짜낸 선거대책이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허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국민들을 상대로 한 잔꾀·속임수가 대부분이다. 그래서는 안 될 일들이었다. 선거 때마다 느끼는 바지만, 이 나라에는 특히 '선거 속임수'가 많다.
공약(公約)을 가장한 공약(空約)이 거듭 등장하는 데도, 유권자들은 계속 속아 넘어가는 악순환이 계속되곤 했다. 당장 세종시와 동남권공항, 과학벨트에, 생활비 30%절감, 주가 5000 등 MB의 대선공약도 다 그런 것이었다. 지역마다에도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전남 목포시와 신안군 압해도를 잇는 압해대교가 있다. 2000년 6월 착공해 2008년 5월 완공된 길이 3563m의 연륙교다. 그때까지 이 연륙교는 그야말로 수십 년 동안, 선거 때마다 어김없이 1순위를 차지한 유명한 공약이었다.
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에서 옹진군 신도를 거쳐, 강화 길상면을 잇는 14.8km 길이의 연륙교 '계획'이 있다. 이 연륙교는 지난해 6·2지방선거를 한 달 앞두고, 공사를 시작하는 기공식까지 모양 좋게 치렀으나, 공사는 아직껏 감감 무소식이다. 시장선거용이라는 비난이 뒤를 이었다. 이번 재보선에서도, 연간 예산이 3조3000억 원에 불과한 강원도에, 앞으로 9년간 46조 원을 쏟아 붓겠다는 공약(空約)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 지역공약들은 주로 특정 선거구에 국한되는 성격의 공사들이지만, 전 국민의 생활과 직결되는 물가인상이나, 제도·시책의 시행여부는 그 파급효과가 심각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더구나 그것이 정부차원에서 잔꾀나 속임수로 악용된다면 사태는 또 달라진다. 그 피해를 고스란히 국민들이 뒤집어 써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재보선에서는 그 같은 사례가 적지 않았다.
정부가 "선거가 끝나면 올리라"한 물가가 있다. 계속되는 물가 폭격 속에 올릴 계획이었던 제품값들이다. 한꺼번에 올리지 말고 분산해서 인상하라 해서, 업계가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다. 대부분 인상날짜까지 지정돼 있다. 두유·소스류(고추장 간장 된장 조미료 등 포함)·장류는 5월 16일 9% 오르고, 제빵·라면·통병조림식품·레토르트·냉동식품·다류 등은 6월 16일 인상예정이다. 이 역시 9%다. 지방의 공공요금도 순서를 기다린다.
선거 전에 행정안전부가 시·도 부단체장회의를 소집해 '협조'를 당부한, 상하수도·시내버스·도시철도요금 등이다. 이제 선거가 끝났으므로 부담 없이 인상시기가 결정될 것이다. 인상시기를 늦추는 것은 물론 국민들에게 이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큰 손해가 있다. 인상시기가 '선거에서의 여당 득표지원'같은, 정부의 떳떳치 못한 정치적 목적에 의해 통제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정부와 국민사이, 정치와 국민사이의 신뢰관계가 깨지는 게 문제다. MB가 줄곧 외쳐온 '소통'이나 '공정사회'와도 거리가 멀어진다. 나라가 이런 식으로 굴러가서는 안 된다.
직장인들의 월급봉투에서, 많게는 수십만 원씩 건강보험료가 추가로 빠져나간, 이른바 '건보료 폭탄'도 그런 경우다. 지난해 임금이 오른 직장인들의 건보료를 한꺼번에 정산하면서 생긴 문제다. 복지부는 당초 이를 지난 22일 보도자료를 내고, 자초지종을 설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선거 악영향'을 염려한 '윗선'의 지시에 따라, 선거 다음날인 28일로 설명이 연기됐다고 했다. 그 자체만으로도 관권선거에 해당된다. 영문도 모르고 돈을 '빼앗긴' 직장인들이 난리다.
모름지기 관리들이 국민을 바라보지 않고, 잔꾀나 부리며 한눈을 팔면 사단이 나게 돼 있다. 농협·수협·신협·산림조합 등 4대 상호금융기관에서 대출받기도 이제 힘들어진다. 금융감독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내일 모레 5월 1일부터 그렇게 된다. 지금까지 이들 금융기관에서는 대출해줄 때, 단위조합의 사업영역 밖에 있는 사람인 경우, 담보가치를 최대 80%까지 인정해줬으나, 앞으로는 60%로 제한한다. 대출한도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적용받는 단위조합이 2354개에 이른다. 재보선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시행하는 것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 이번 재보선 과정에서 가장 큰 사건 중 하나였던 엄기영 강원도지사 후보의 '불법 콜센터' 사건. ⓒ연합 |
방송인 김미화 씨도 선거 뒤에 '잘릴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본인이 25일 자진사퇴하는 바람에 '차질'이 생겼다. 그의 사퇴가 자진사퇴가 아닌, 그야말로 미운 털 박힌 '타진(他進) 사퇴'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선거진행 과정에서도 잔꾀는 마구 설쳐댔다. 특임장관실 직원의 수상한 '선거 관련 수첩'이 김해에서 발견되고, 동계올림픽 유치기원서명자 명단이 불법 전화선거운동 장소에서 나오기도 했다. 예상대로 다들 '모르는 일'이라 했다.
여당의 득표에 보탬이 안 되는 것은 선거 뒤로 미루기까지 하면서 치러낸, 총력체제의 선거였다. 잔꾀가 만발한 재보선이었다. 그런데도 MB정권은 참패했다. 주권자들이 '잔꾀 정권'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잔꾀와 심리전은 사실은 동전의 앞뒷면이다. 따로 떼어서 생각해도 심리전에 능수능란한 게 이 정권이다. 심리전은 명백한 적대행위는 없어도, 상대방의 심리에 작용하여 제압하고자 하는 전쟁이다. 물론 대결상대는 적이다.
국민을 상대로 한 심리전은, 국민을 적의 위치에 놓고 벌이는 전쟁이다. 선의(善意)가 전혀 없고 도리를 벗어났다는 점에서, 홍보와는 목적부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선거관련 이야기뿐만이 아니다. 신공항 백지화를 찬성하는 '시민단체의 신문광고'에 청와대가 개입됐다느니, 청와대 부탁으로 국책사업과 관련해 정부 편을 드는 쪽으로 '사이버 전사'가 되어 여론을 조작했다느니 하는 폭로가 있었다. 바로 심리전 차원의 이야기다. 아니 그 이상의 범죄일수도 있다. 잔꾀, 속임수, 여론조작, 심리전, 이런 어휘들은 이 정권 전유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전쟁판을 연상시키는 사태도 등장했다. 전쟁에는 룰(rule)이 없다. 이겨서 이익을 차지해야 할 아군과, 져서 손해를 감당해야할 적군만이 있을 뿐이다. 저축은행이 영업정지 처분되기 전날 밤, 잘 아는 '큰손' 고객들만 따로 불러들여, 1000억 원이 넘는 예금을 빼내주었다. '아군'끼리만 결속이 돼 있는 관계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금감원 직원들이 은행에 미리 파견까지 되어 있었다고 했다.
그런 상태에서 마치 관행이나 풍조처럼, 7개나 되는 저축은행 모두에서 하나같이 그 일이 이뤄졌다는 게 놀랍다. 손때 묻은 통장에 한푼 두푼 눈물겹게 돈을 모은 '작은 손' 서민들은 그저 '적군'이었다. 그들만 벌컥벌컥 물을 먹였다. 이것도 양극화로 보아야 하는가. 어느새 세상이 거기까지 갔는가.
재보궐 선거가 끝났다. 우선 더 이상은 잔꾀나 속임수가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여론조작이나 심리전에도, 눈 부릅뜨고 속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또 다져야 한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내년에는 그야말로 이 나라의 명운이 걸린 큰 선거가 두 개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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