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제는 집을 나서며 MP3 플레이어나 PMP를 챙기지 않는다. 어디에 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재활용 쓰레기로 버려졌을지도 모른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은 스마트폰이다. 출퇴근길에 음악을 듣고, 영화와 방송을 보기 위해 스마트폰을 꺼내 든다. 앱을 구동하고 플레이를 누른다. 스마트폰 하나만으로 MP3 플레이어, PMP, TV의 기능을 구현할 수 있다.
이것뿐이랴!
스마트폰은 지도를 탐색하고, 길을 안내하고, 일정을 관리하고, 연락처를 관리하고, 메모를 하고, 번역을 하는 등 수많은 기능을 한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MP3 플레이어, PMP, 내비게이션, 지도는 물론이고, 일정을 관리해줄 비서조차 필요 없다. 달리 말하자면, 스마트폰이 MP3, PMP, 내비게이션 등의 시장을 잠식했거나 혹은 그런 과정에 있다.
스마트폰의 출현과 보급 이후, MP3 플레이어나 PMP 같이 스마트폰이 손쉽게 대체 가능한 시장이 급격히 사라졌다. 과거 MP3 플레이어나 PMP 제조업체는 어떻게 됐을까? 이 업체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회사야 업종 변경이나 다른 구제책을 통해 버텼다고 해도 그곳에서 일하던 다수의 사람들은 직장을 나와야 하지 않았을까?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일정관리나 연락처 관리 등 비서 역할을 해주는 인터넷 서비스와 스마트폰 앱의 보급으로 2001~2013년 사이 영국에서는 약 16만 3000개의 비서직이 사라졌다고 한다. 일자리를 잃은 16만 명의 비서 중 인터넷 일정 관리 서비스와 스마트폰이 자신의 실직 이유가 될 것이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마찬가지로, 스마트폰이 세상에 나왔을 때 MP3나 PMP 회사 노동자 중 누가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고 상상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처럼 새로운 기술이 출현할 때, 그것이 기존의 시장을 파괴하고, 많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파괴할 것이라 예측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알맹이 빠진 4차 산업혁명 대응 계획
얼마 전 정부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대비한 '4차 산업혁명 대응 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자율주행차량을 포함해 무인 이동체·스마트 팩토리·간병 로봇·인공 지능·무인 농업용 로봇 등의 개발과 보급을 통해 경제를 성장시키고, 2022년까지 16만 2000개에서 37만 1000개의 신규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신기술 개발을 지원해 경제를 성장시키고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인식은 중요한 점을 간과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제품의 생산 또는 서비스의 제공을 인간이 아닌 기계가 한다는 점, 그 결과 인간의 일자리가 급격하게 사라진다는 점이다.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시작된 1차 산업혁명, 컨베이어 벨트와 전기 동력에 의한 2차 산업혁명, ICT와 결합된 부분자동화가 가능해진 3차 산업혁명 시대까지만 해도 어떤 형태로건 생산을 결정하고 생산을 담당하는 것은 인간이었다. 인간이 생산의 주체로 생산에 참여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았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의 시대는 1차에서 3차 산업혁명 시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더는 생산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생산이라는 경제활동에서 인간이 필요 없어지고, 자동화된 로봇이나 인공지능이 생산의 주체가 된다. 그 결과, 대규모 실직 사태가 예상된다.
따라서 기술 개발이나 경쟁력 강화도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정부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가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대비해 다뤄야 할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자동화로 사라질 일자리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이냐이다. 그런데 마침내 나온 정부의 대응 계획에는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대규모 실직 사태에 대한 언급은 일언반구도 없다. 오히려 정부는 인간을 대체할 기술을 개발하고 보급해서 수십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 것이라고 주장한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해 제대로 안다면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을까?
최근의 예를 들어보자.
2016년 독일계 스포츠용품 업체 아디다스는 2017년부터는 독일의 바이에른에 있는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1990년대 높은 인건비를 이유로 해외 생산기지로 공장을 이전한지 24년 만의 귀환이다. 아디다스가 생산기지를 인건비가 비싼 독일로 회귀한 배경에는 바로 4차 산업혁명 시대 제조업인 '스마트 팩토리'가 있다. 지능화된 로봇이 무인 자동화 공정으로 생산을 담당하는 스마트 팩토리를 통해 생산하기 때문에, 아디다스는 인건비 걱정 없이 독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아디다스의 발표에 따르면, 이 공장에서는 단 10명의 인원만으로 연간 50만 켤레의 운동화를 생산할 수 있다. 기존 저임금 해외 생산기지에서 동일한 생산량을 얻기 위해서는 600명이 필요했지만, 스마트 팩토리를 통해 무려 80% 이상의 인력을 감축한 것이다.
아디다스만의 일도 아니다. 수년 전 아이폰과 아이패드 등 애플의 제품을 OEM 방식으로 제조하던 '폭스콘'이라는 회사는 가혹한 노동 강도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노동자들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폭스콘이 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내놓은 대안이 바로 자동화였다. 자동화 도입으로 가혹한 노동 강도가 개선됐을지 몰라도, 일자리는 사라졌다. 중국 내 공장 한 곳에서만 무려 6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기술의 발전이 잡아먹는 일자리
2015년 기준으로 한국 제조업 종사자의 숫자는 약 360만 명이라고 한다. 제조업이 산업의 중추이며, 동시에 노동자 1만 명당 437명의 세계 최고의 로봇밀도(2013년 기준)인 제조업 강국이다. 이런 한국의 실정에서 아직도 제조업 종사자의 수가 360만 명에 달한다고 하면, 그들 다수는 자동화로 대체하기 어려운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인력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한국의 약 360만에 달하는 제조업 종사자 중 자동화로 대체하기 어려운 전문적인 기술과 지식을 가진 전문가 또는 준전문가 비율은 고작 22%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78%에 해당하는 인력은 자동화 기술로 손쉽게 대체 가능한 단순기능직·조립공·관리직 등에 속한다. 360만 명 중 78%면 약 280만 명이다. 이들 280만 명은 4차 산업혁명에서 제조업인 스마트 팩토리까지 갈 것도 없이 기존 자동화 설비의 성능이 조금 더 개선되고 가격이 내려가기만 해도 대부분 일자리를 잃을 가능성이 높다.
제조업만이 아니다.
최근 구글은 올해부터 자율주행차량을 활용한 무인택시 서비스의 영업을 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20년경 출시를 예상하던 시장의 예측에 비해 2년이나 빠른 것이다. 조만간 우리는 운전자 없이 다니는 택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인택시를 준비하는 것은 구글 만이 아니다. 우버나 리프트 같은 차량공유 서비스 업체들 역시 자동차 메이커들과 함께 무인택시 출시를 위해 준비 중이다.
구글이나 우버, 리프트 등의 무인택시 서비스 또는 이와 유사한 자율주행차량을 활용한 비즈니스가 보급되고, 그런 제품이나 서비스가 한국에 도입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현재 한국에서 운전과 관련한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약 85만 명에 달한다. 자율주행차량이 보급되었을 때 이들 중 자신의 일자리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가 될 것이다.
자율주행차량의 출현은 운전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금융업체 바클레이즈의 분석에 따르면, 자율주행차량이 보급될 경우 차량 판매가 급감해 미국에서만 약 40%의 시장 감소가 예상된다. 따라서 자동차 제조업체의 일자리도 급감한다. 여기에 자율주행차량의 보급시 교통사고는 약 90%가 감소되므로 자동차와 관련한 개인 보험 시장이 사라지고 자동차 보험 시장의 40%가 감소할 것이라고 한다. 또한 운전면허, 차량정비 등에 관련된 수십만 개의 일자리 역시 위험하다. 자율주행차량의 보급 후 수년 내에 발생할 일이다.
제조업과 운송업 분야만 계산을 해봐도 300만 개가 넘는 일자리가 사라질 위험에 처해있다. 자율주행차량과 관련되어 사라질 보험, 운전면허, 차량정비 일자리는 계산하지도 않은 수치이다.
과연 정부는 이런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을까?
수년 전 조선업계 부진으로 수만 명이 실직하고, 해당 지역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국가 전체적으로도 경제적 여파가 아직 이어지고 있다. 조선업이라는 단 1개의 업종에서 발생한 대규모 실직이 가져온 결과다. 이를 고려한다면, 최소 몇십 배 이상으로 예상되는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일자리 소멸 사태는 어떨까. 하지만 정부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의 누구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다. 문제를 인식하기는커녕, 자율주행차량, 스마트 팩토리, 인공 지능 등의 개발을 통해 수십 만개의 신규 일자리가 창출할 것이라며 장밋빛 환상만을 얘기한다. 정부 역시 4차 산업혁명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조차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율주행차량, 스마트 팩토리, 인공 지능 등의 개발과 관련해 창출될 일자리는 결국 연구개발 관련이다. 이 일자리는 이미 존재하는 것이며, 관련 기술의 수요 증가에 따라 연구개발 일자리가 늘어난다고 해도 지금과 비교해 급격하게 늘기 어렵다. 새로운 기술과 관련한 부품이나 제품을 생산하는 것 역시 또 다른 자동화 시스템이기 때문에 연구개발을 제외한 다른 쪽에서는 일자리가 생겨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기술로 일자리를 잃게 될 사람 대부분은 전문적인 기술이나 지식을 가지지 못한 미숙련 노동자다. 이들이 새로운 기술의 개발과 보급으로 생겨난 연구개발 일자리에 취업할 수 있을까? 더구나 새로 생겨나는 일자리는 사라진 일자리에 비해 턱없이 적은데?
정부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싶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 경쟁력 강화를 위해 기술 개발을 지원하고, (연구개발을 위한) 인력 교육을 지원하고, 기업에 힘쓰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 더욱 시급하게 대비해야 할 문제는 대량 실직 사태다. 이에 대한 보다 면밀한 대비가 필요하다. 자동화 기술 개발로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도 좋지만, 자동화로 인해 일자리를 잃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준비를 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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