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재오 특임장관으로부터 '특명'을 받고 강원도 지역을 찾고 있다는 한 한나라당 친이계 의원이 사석에서 이런 말을 했다. '엄기영 후보가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으로 앞서고 있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그러면 지난 6.2지방선거 때 서울에서 구청장 다 한나라당이 됐겠다"고 대꾸했다.
강원도는 넓다. 이 곳 유권자의 성향과 관련해 한나라당, 민주당 인사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태백산맥을 기준으로 영동지방(강릉, 속초, 동해, 삼척)은 보수 성향이 강하다. 간첩 사건 등이 빈번히 일어났던 곳인데다, 이북에 고향을 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영서 지방은 비교적 리버럴한데, 영서 지방도 남북으로 나뉜다. 춘천을 기준으로 북쪽 접경 지역까지는 보수 성향이 강하고, 남쪽 이광재 전 지사의 지역구(태백, 평창, 영월), 그리고 '민주화의 성지'라 불리는 원주 등은 진보 성향이 강하다.
단순히 따지면 영동-영서북은 한나라당 강세, 영서남은 민주당이 강세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민심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 거기에 엄기영 후보는 치명적인 '자책골'까지 넣었다. 엄기영-최문순 후보 지지율 차가 10%를 훌쩍 넘어 20%까지 간다고 하지만 많은 이들이 강원도 지역을 '박빙'으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엄기영, 어떻게 불법 선거 운동을…"
강릉의 한 펜션에서 30여 명의 여성들이 불법 전화홍보를 하던 사건과 관련해 엄기영 후보는 자신과 연관성을 부인하고 있다. 22일 엄 후보 불법 선거운동을 하던 30여 명의 '알바'들이 경찰에 연행됐고, 24일 이들 중 주모자 2명에 대해 구속영장이 청구됐고, 나머지 30명에 대해선 불구속 입건 조치가 취해졌다. 엄 후보는 개입 여부를 떠나 구설수에 올랐다는 것만해도 치명적 내상을 입은 상태다.
ⓒ엄기영 후보 캠프 |
24일 춘천에서 만난 10여 명의 시민들은 대개 이번 '불법 콜센터' 사건을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전날 엄 후보가 MBC TV 토론회에서 이와 관련해 "최문순 후보가 지난 토론회 때 천안함 사건 문제에 대해 국민 정서와 너무 동떨어진 발언을 해서 '아 이건 안되겠구나' 해 이번에 반드시 나를 지원해야겠다고 한 자원봉사자들이 모여서 시청자들과 지지자들에게 전화홍보를 했다"고 해명했지만 파문은 가라앉지 않는 모습이다.
엄 후보의 해명에 대해 전날 토론회를 지켜봤다는 40대 택시기사는 "그걸 누가 믿겠느냐. 대명천지에 누가 대포폰으로 자원봉사 선거 운동을 하느냐"고 말했다. 그는 지면에 담기 힘든 수사를 사용하며 엄 후보 '자원봉사자'들의 행태를 비판하고 "이번에 연행된 사람들에게 지급된 돈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낱낱이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자영업을 하는 50대 남성은 "나는 원래 '부동층'이었는데, 이번 사건으로 민주당 찍기로 했다. 안그래도 우리 OOO 동호회 회장은 '최문순으로 가자'고 하고, 나는 내심 엄기영 쪽으로 가고 싶어했는데, 이번 참에 마음을 바꾸기로 했다"고 말했다. "춘천은 민주당으로 기울었다"는 말들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최대 20%로 추정되는 '부동층' 민심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반면 한나라당 지지자라고 밝힌 40대 남성은 "민주당은 그런 불법 안저질렀겠느냐. 선거판이 다 그런 것 아니겠나. 이번에 엄 후보가 재수없게 걸렸다. 나는 이번에도 한나라당을 찍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책골'을 넣은 엄 후보 입장에서는 이같은 지지층 결속이 시급한 상황이다.
"더이상 '감자바우' 아니라는 것 한나라에 보여주자"
영동지역 민심은 어떨까. 강원도 삼척시. 원전 유치가 쟁점으로 부상하면서 주목을 받았던 도시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계기로 인지도 측면에서 불리한 최 후보가 "원전 적극 유치"를 초기에 내세웠던 엄 후보를 추격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었다.
삼척시에서 만난 50대 택시기사는 "원전 유치 현수막이 엄청 많이 붙었어요. 그런데 이번 그거(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태) 때문에 현수막이 많이 뜯겨 나갔지. 원전이 드오면(들어오면) 삼척이 인구가 십 몇만 된다고 했는데 몇 년간은 시민들이 잘 먹고 살겠죠. 인구도 불어나고, 먹고 사는데는 괜찮은데, 후손들을 생각하면...(오면 안되지) 일본 터지는 바람에 반대가 마이(많이) 나타났어요. 엄기영 씨도 첨에 유치한다고 했다가 안한다고 했지"라고 말했다.
ⓒ최문순 후보 캠프 |
그는 "그간 한나라당이 강원도 쪽을 신경을 많이 안썼죠. 최문순 씨는, 이광재 씨의 영향을 많이 안 받나 생각하죠. 다른 손님들도 이광재 씨를 얘기하면서 최문순 씨를 조금 그런게 (이광재 전 지사와 친분이) 있었깐에, 최문순 씨를 밀어줘야 한다는 분들이 많애요. 시민들이 그렇게 얘기를 하시더라"고 말했다.
강릉, 동해, 삼척 등 영동 지역의 한나라당 지지 성향은 여야 모두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라 섣부른 예측은 금물이다. 다만 '변화'의 바람은 불고 있다. "우리 강원도가 더이상 '감자바우'가 아니라는 것을 한나라당에 보여줘야 한다"는 일종의 '강원도 홀대론' 역시 만만치 않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선거 관심 증가, '박빙' 예상…치명타 입은 한나라 "맞대응 할 것"
지난 22일 코리아리서치 여론조사를 참고해 보자. 엄 후보를 찍겠다는 응답이 45.0%로 나타나 민주당 최문순 후보 지지율(28.0%)을 17%포인트 차로 앞서는 것으로 나왔다. 그러나 모름, 무응답 층이 단순 계산으로 평균 23.1%에 이른다. 이들이 전부 최 후보를 지지할 가능성은 없지만, 무응답층의 3분의 2 정도가 최 후보 지지로 쏠리게 되면 '박빙'을 예상할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엄 후보 측은 "민주당의 '네거티브' 공세"라고 주장하지만 이번 '불법 콜센터' 사건이 선거 관심도를 높인 게 사실이다. 투표율은 선거 관심도에 비례한다. 강원도 지역 유권자들의 선거 관심도는 어느 정도일까? 18일 밤 10시에 방영된 엄기영-최문순 후보 토론회 시청률은 무려 17.5%였다. '무한도전' 같은 오락 프로그램 이상의 관심도다. 이는 선거 관심도와 관련해 상징적인 수치다. 주말인 23일 밤 토론회는 5.8%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보궐선거 토론회라는 점을 감안하면 비교적 높은 수치다.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엄기영 후보 측 정군기 특보는 "아직 엄 후보가 많이 앞서고 있다. 일부 언론 보도에는 30대가 엄 후보 쪽으로 돌아섰다. 다만 방심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혹스러운 기색은 역력했다. 정 특보는 "23일 엄 후보가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현대중공업 최대주주)를 만나 투자 유치를 약속 받았다. 우리는 대기업 유치 공약 등 강원도에 실제로 필요한 일들에 주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 특보는 "우리 측은 네거티브를 하지 않으려 했지만 민주당 측에서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일로 공세를 펴고 있다"며 "최 후보 측이 허위 문자 메시지를 보낸 건을 집중적으로 제기하려 한다"고 맞대응 의지를 표명했다. 엄 후보 캠프는 관련해 최 후보를 검찰에 고발키로 했다.
그러나 최 후보 측은 "지금 엄 후보의 불법 사실이 드러난만큼 민심이 우리 쪽으로 오고 있다. 선거 사상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라며 "일부 착오는 있었지만, 언론 보도 등을 통해 믿을만하다 생각한 것이고, 문자 메시지 전송 자체도 분명 합법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불법 전화 선거 운동을 한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깨끗한 이미지' 엄기영 후보는 높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50% 가까운 지지율을 꾸준히 보여왔지만, 선거전이 진행될수록 만신창이가 된 모습을 보였다. 반면 "강원도가 낳은 최고로 똑똑한 인재 이광재랑 같은 당(40대 자영업자)"이라는 최 후보는 '균열'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무섭게 추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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