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르쿠츠쿠 : 인연
이르쿠츠크 역에 내렸다. 모스크바에서 5500km를 달렸다. 태평양까지는 3700km가 남았다. 서편보다는 동녘에 더 가까운 곳이다. '러시아의 파리'라고도 불린다. 그만큼 아름다운 도시라는 뜻이렸다.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탐탁치 못한 수사이다. 파리에 빗대는 도시들이 너무 많다. 지난 3년 내가 다녀간 '~의 파리'만 두 손으로 헤아린다. 비서구의 서구화, 적폐의 소산이다. 비정상의 정상화, 제 이름을 바로 불러주어야 하겠다. 러시아사에 입각하여 별명을 짓자면 우랄 너머 시베리아로 가는 첫 관문, '동방의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더욱 어울린다.
낯선 도시였지만, 낯익은 이가 있었다. 역전으로 마중까지 나왔다. 온라인으로 먼저 연을 맺었다. Italki라는 사이트(www.italki.com)가 있다. 어학 공부하는 곳이다. 러시아, 원체 크고 넓은 나라이다. 두루 살피려면 한 곳에 진을 치고 진득하게 공부하기 힘들었다. 타개책으로 삼은 것이 인터넷 학습이다. 뜻밖의 효과를 거두었다. 만인과 만국과 만어를 연결시켜주는 글로벌 허브였다. 러시아어 또한 세계어이다. 동유럽부터 동시베리아까지 소통한다. 우크라이나부터 우즈베키스탄까지 유통된다. 요일마다 다른 나라 다른 도시 선생님들과 모니터를 두고 마주앉았다. 키예프에서도 타슈켄트에서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인강 인연 덕을 톡톡히 입었다. 그 디지털-러시아어 연결망의 중간 고리에 이르쿠츠크도 자리했던 것이다.
선생님 이름이 요코이다. 일본계이다. 1919년 할아버지가 시베리아로 출병하셨다. 러시아혁명의 동방 전파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된 일본군 장교였다. 백군과 합세하여 적군과 다투었다. 연해주에서 살아하던 조선인들을 괴롭혔을지도 모르겠다. 체포와 투옥 끝에 전향을 단행한다. 공산주의자로 거듭난 것이다. 대일본제국을 버리고 소비에트연방에 투신한다. 소련-몽골과 일본-만주국이 시베리아를 두고 겨루었던 할힌골 전투(노모한 전쟁)에도 참전했다. 일본의 북방 진출을 좌초시킨 전쟁에 일본인 장교가 소련 편에 서 있었던 것이다. 할힌골이 뚫렸더라면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이 아니라 대유라시아공영권을 주창했을지 모른다. 소련을 탈출한 러시아 지식인들의 '유라시아주의'를 실시간으로 번역하고 있었음을 확인한 마당에, 전혀 허황한 추론이 아닐 것이다. 할아버지는 끝내 소련이 일본에 승전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1943년 돌아가신다. 아버지는 그 소련이 해체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1989년 돌아가신다. 1971년생 요코는 1991년 소비에트인에서 러시아인이 되었다.
새천년 러시아어와 일본어를 가르치며 전 세계 사람들과 대화하며 사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한다. 재택근무와 모바일근무, 수입도 쏠쏠하다. 그 수백의 학생들 가운데 이르쿠츠크로 직접 찾아온 이는 내가 처음이었다. 집으로 초대받아 칭기스칸 보드카에 샤슬릭과 스시를 곁들여 푸짐하게 먹고 마셨다. 남편 세르게이 또한 러시아군 장교였다. 아랍과 유럽을 거쳐 러시아에 이르렀다는 말에, 이라크와 시리아, 리비아와 우크라이나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3할도 알아들지 못했으나 지레짐작 할 수는 있었다. 소련의 해체야말로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비극이었다는 푸틴의 견해를 고스란히 빼다 닮았다. 세르게이와 요코 모두 '우리 티니', 푸티느님을 사모했다. 1990년대 9년의 악몽이 푸틴에 대한 찬양과 고무를 가중시킨다.
러일 합작 부부는 바이칼 호숫가에 다차(교외 별장)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식 사우나, 반야도 갖추었다. 여름마다 그곳에서 휴가를 난단다. 때는 마침 5월말, 텅 비어 있었다. 빌려주겠다고 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도요타 SUV를 몰고 동남쪽으로 120km를 달려 바이칼에 이르렀다. 그루지아 와인과 바이칼 삐보(맥주)에 훈제 오믈(바이칼 생선)도 챙겨준다. TV도 없고 인터넷도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게 나는 바이칼 앞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졌다. 21세기로부터 로그아웃, 탈속한 것이다.
2. 바이칼 : 억겁의 연
우르르 쾅. 우르르르 쾅.
천둥소리에 잠을 깼다. 새벽 세시도 못되었다. 비가 쏟아지지도 않는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아니었다. 이른 하늘은 온통 별 밭이었다. 억겁의 시간을 건너온 억만의 별들이 영겁의 빛을 쏟아내고 있다. 천상을 빽빽하게 채운 틈 사이로 별똥별도 무시로 떨어진다. 별세계와 별천지, 은하수를 받아 안은 호수는 스파클링 워터처럼 반짝거렸다. 천둥소리의 정체도 밝혀졌다. 겨울 내 꽝꽝 얼었던 호수가 녹아나고 있었다. 철석철석, 파도가 치고 파랑도 인다. 떠밀려온 최후의 얼음조각들이 바위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바이칼의 늦봄을 일깨우는 맹렬하고 요란한 입춘 의례였다.
둘레길이 640km이다. 서울에서 부산보다 멀다. 폭이 가장 넓은 곳은 80km에 달한다. 가장 깊은 곳은 2km에 미친다. 맑디맑아 맨 눈으로 수심 40m까지 들여다보인다. 지난 3년 내가 보았던 대하들, 황하와 장강과 메콩강과 인더스강과 갠지스강과 나일강과 다뉴브강과 볼가강을 모두 합해도 바이칼을 채우지 못한다. 330개의 강줄기가 바이칼로 흘러들어, 지구 담수의 1/5을 홀로 차지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깊으며 가장 깨끗하고 가장 오래된 호수이다. 2500년 전이 아니다. 2500만 년 전에 생겨났다. 러시아가 있기 전에, 아니 사피엔스가 있기 전에, 영장류가 등장하기도 전에 바이칼은 태어났다. 지축이 흔들리고 지각이 갈라지고 물이 쏟아져 들어와 태초의 호반이 된 것이다. 초역사적이고, 초현실적이다. 지구적이고 우주적이다. 아름답다기보다는 경이로운 곳이다. 원초의 물맛도 음미해볼 수 있다. 담담하고 담백하고 담박하다. 후각과 미각을 조금도 자극하지 않는다. 오로지 촉각으로만 H2O의 순수한 질감이 전해진다. 죽기 전에 이 '신성한 바다' 바이칼을 방문하여 속죄하고 참회하는 것이 러시아인들의 소원이라고 한다. 종교적 순례를 연상시킨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처럼, 푸시킨의 시처럼,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처럼, 러시아의 영혼을 상징하는 곳이 되었다. 아무리 세속에 물든 현대인이라도 바이칼에 닿으면 별을 헤아리는 태고의 마음을 회복하기 때문이다.
바이칼은 27개의 섬을 품었다. 그 중 가장 큰 섬이 알혼 섬이다. 제주도의 절반 크기에 사람은 겨우 2000여명이다. 마을 주민의 거개가 부랴트이다. 러시아인들보다 더 오래 전부터 호수에 치성을 드리며 살았던 사람들이 부랴트이다. 바위에 올라 정좌하여 천공을 응시하며 명상하는 사람이 눈에 들었다. 해가 중천에 뜬 점심에 발견했는데, 해가 떨어지는 저녁이 되어서도 자세를 흩트리지 않는다. 온 종일 몰입에 든 모양이다. 라마라고 한다. 티베트 불교 승려란다. 우주적 에너지의 흐름에 자아를 방류하고 있단다. 소아에서 대아로, 몰아에서 무아로. 여래장의 본성을 기르는 수련 중이라는 것이다. 단숨에 호기심이 솟았다. 견문 첫해, 남중국의 도교 사원에서 양생 수행을 맛보았다. 둘째 해, 이슬람 수피교단의 신묘 의례를 엿보았다. 셋째 해, 그리스 아토스 산에서 정교회 수도사의 일상도 곁눈질했다. 만인을 평준화시키는 대중교육과 보통교육이 저물면 서당과 법당과 회당과 성당에서 전수되었던 숙지(熟知)의 가르침이 되살아나리라 여긴다. 여래와 사도와 군자의 양성이야말로 백세 인생의 평생교육이 될 것이다. 참새 방앗간, 밀교의 세계 또한 지나칠 수가 없었다.
3. 울란우데 : 환생
바이칼 동쪽에 자리한 울란우데가 북방불교세계의 메카이다. 인구 40만, 부랴트자치공화국의 수도이다. 곧장 몽골의 울란바토르가 연상되는 도시였다. 이동하는 다섯 시간 동안 게르도 눈에 띄었다. 다문명제국 러시아가 품고 있는 정교세계와 이슬람세계를 지나 티베트-몽골 세계로 진입한 것이다. 당장 정감이 돋는다. 생긴 꼴부터 흡사하다. 솟아난 광대뼈에 눈은 가늘게 찢어졌다. 한국에서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편에 속했다. 이국적이라는 소리 종종 들었다. 동남아까지는 왠만큼 통한다. 헌데 히말라야를 넘어서면 아리안의 후예, 골격과 안곽이 확연히 다르다. 아랍과 유럽에서도 사진을 함께 찍노라면 영락없는 오징어이다. 밋밋하고 넙데데한 몽골리안임을 실감하게 된다. 영혼의 꼴, 설화와 전설까지 유사하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는 선녀와 사냥꾼 이야기로 전래된다. 인당수에 몸을 던진 효녀 심청은 배경만 바이칼 호수로 달리한다. 울란우데에서 남쪽으로 기차를 갈아타면 울란바토르를 지나 베이징까지 닿는다. 몽골과 중국 사이 국경열차를 타고 고비사막을 지난 것이 2년 전이다. 귀국과 귀향, 귀로에 들어섰다.
울란우데의 불자들도 20세기는 고달팠다. 적색혁명의 파고가 닿은 1920년대부터 법당은 파괴되고 라마는 축출되었다. '울란'이라는 뜻부터가 붉은색을 의미한다. 1934년 소련이 부여한 도시명이다. 소련 해체 이후 불교 또한 환생했다. 정교가 부활한 것처럼 이슬람이 귀의한 것처럼 불교 또한 윤회했다. 혁명이 가고 문명이 중흥하자, 달라이 라마가 울란우데를 방문한 것만 다섯 차례이다. 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 탄트라와 만다라에 의거하여 21세기의 현생을 살아간다. 과거로 복귀한 것만은 아니다. 불교의 현대화가 두드러진다. 도심의 한복판에 법당을 세웠다. 사찰보다는 문화센터처럼 보인다. 몸을 치료하고 마음을 치유하는 곳이다. 한쪽에서는 라마들이 마사지를 하고 있다. 기울어지고 비틀어진 몸의 균형을 바로 잡는다. 다른 쪽에서는 상담에 열심이다. 남 욕심에 휘둘리고 제 욕심에 자빠지는 중생들을 공감과 돌봄으로 보살핀다. 번민과 번뇌, 탐진치로 흐려지고 흐트러진 탁기를 맑게 말갛게 정화시킨다.
내 또래 여성 라마와 대면했다. 내 눈에는 샤먼처럼 보였다. 솟대와 오방색 천, 무속인의 서낭당을 연상시킨다. 시베리아의 샤머니즘과 히말라야의 부디즘이 바이칼에서 합류하고 합심한 것이다. 만물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토착적 사유는 생과 사를 가르지 않는다. 죽음은 신생이요 재생이고 영생이니, 불교의 환생과 윤회라는 관념과 결합한 것이다. 그래서 생을 추키고 사를 숨기는 생/사의 분단체제를 돌파한다. 업과 업의 네트워크, 전생과 금생과 후생의 인과응보를 탐구한다. 죽음과 공생하는 삶의 기술을 연마한다. '샤먼 라마'가 행하는 것 또한 죽음을 적대하고 박멸하는 현대적 의학이 아니다. 생/사의 균형을 조정하고 조율하는 기의 재배치, 삶의 기술이다. 과연 전생을 일러주겠노라, 돌연 굿판을 벌인다. 희번덕 눈은 돌아가고 목은 한없이 부풀러 올랐다. 정신 줄을 놓은 듯 접신의 춤사위는 무섭다기보다는 아름다웠다. 넋을 놓고 한참을 감상한 끝에, 티베트어인지 몽골어인지 부랴트어인지 가늠할 수 없는 말로 전생을 풀어준다. 러시아어 통역을 통해 떠듬떠듬 접수한 내용은 1317년 이 곳에 왔었다는 것이다. 700년 전에도 바이칼을 찾았단다. 반신반의, 긴가민가, 알 듯 말 듯, 아리송한 미소가 새어나왔다.
말에는 주술적 힘이 붙는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나가지 않았다. 바이칼에서 보낸 사흘간 1317년에 붙들려 있었다. 700년 전이면 고려 후기, 몽골제국 시대이다. 유라시아를 전전하며 '고려인'이라는 발상도 자라나고 있었다. 전생과 금생의 환생 속에 다시금 바이칼에 왔다는 말이야? 곰곰이 골똘히 생각하다 문득, 20세기 이 곳을 찾은 한국인이 궁금해졌다. 뜻밖의 인물을 발견했으니, 춘원 이광수이다. 무려 7개월을 이곳에서 보냈다. 꼭 100년 전이다.
4. 치타 : 부활
1892년생이다.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다. 1902년 부모를 여읜다. 고아가 의탁한 것은 동학의 후신, 천도교였다. 한문을 곧잘 읽고 글 짓는 재주가 빼어났다. 도쿄에 피신해 있는 손병희와 서울을 잇는 연락책 노릇을 한다. 일본에 유학할 수 있었던 것도 천도교 네트워크 덕이었다. 철부지 개화파 마냥 일본의 부국강병에 눈이 멀어 도쿄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입학한 중학교에서 홍명희와 정인보도 만난다.
도쿄에서 빠져든 것 또한 일본이 아니라 러시아였다. 톨스토이에 심취했다. 예수와 석가에 버금가는 성인이자 위인으로 받들었다. 동방예의지국의 동학쟁이의 말단이었던 이광수가 예수의 가르침을 알게 된 것도 톨스토이를 통해서였다. <나의 종교>를 먼저 읽고 <성경>을 나중에 읽었다. 그렇다면 서방 기독교보다는 동방 정교를 배운 것이라 하겠다. 반도의 북쪽에는 정교에 입문한 조선인들이 적지 않았다. '예수 이후 첫 사람' 톨스토이를 따라 문학에도 뜻을 세운다. '조선의 톨스토이'가 되는 것이 인생의 지침이 되었다. 러시아어를 배웠고, 톨스토이의 희곡 <어둠의 힘>을 번역했으며, 술에 취하면 러시아어로 주정을 부렸다. 러시아 혼혈아라는 풍문까지 떠돌았다.
톨스토이 또한 동방과 연이 깊은 인물이다. 카잔대학의 동양학부 아랍-터키어과에서 공부했다. 입학시험에서 아랍어와 터키어, 타타르어에 모두 만점을 받은 전설로 유명하다. 기독교는 물론이요 이슬람 경전도 독파했던 인물이다. 같은 대학 출신의 레닌이 이슬람문명에 무지하고 무심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정신세계를 구현했다. 구도와 구세는 분리될 수 없는 과제였다. <무엇을 할 것인가> 못지않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궁리했다. <참회록>과 <부활> 등 말년에 갈수록 영성적인 색채를 더한다. 미혹과 유혹의 탈각, 개벽을 옹호했다. 물질개벽에 눈먼 근대세계를 향하여 정신개벽을 호소한 것이다. 인간의 계몽의지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계시와 은총, '사랑의 승전'을 역설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등 동아시아의 운명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조선에 대해서도 깊은 염려를 표시했다. 조선의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타락하고 무도한 인간이라고 비판했다. 청년 이광수가 톨스토이를 '어진 사람', '의로운 사람'으로 모셨던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1910년 고향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한다. 11월 톨스토이가 죽자 학생들을 모아서 추모회도 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네 마음속에 있다.'고 가르쳤던 톨스토이는 교회로부터 파문당한 이단자이다. 오산학교가 기독교 색채가 진해지면서 이광수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나라는 망하고, 직장은 잃었다. 첫 번째 결혼도 행복하지 못했다. 부인에게 정을 붙이지 못했고, 피붙이마저 일찍 죽는다. '헬조선'을 떠나 대륙을 방랑하고 유랑한다. 정주에서 기차를 타고 이른 곳이 안동이다. 압록강 건너 오늘날의 단동이다. 봉천, 오늘의 심양에 갔다가 북경과 상해를 지나 안남(베트남)과 인도, 페르시아와 이집트까지 가는 꿈을 꾸었다. 청나라부터 오스만까지, 쇠망하였거나 쇠락하고 있는 나라들을 돌아보려던 무전기행을 계획한 것이다. 이들 나라들의 상황을 살펴보고 어떻게 독립을 도모하고 있는가를 알아볼 참이었다. 비장한 각오였고 비상한 기획이었다. 실현이 되었더라면 후쿠자와 유기치의 <서양사정>, 유길준의 <서유견문>, 량치차오의 <구유심영록>을 능가하는 세기의 기행문이 산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돈이 궁했다. 여비가 여의치 않았다. 수심과 근심으로 압록강만 전전했다. 공상과 몽상과 망상만 무럭무럭 키우던 차, 우연인 듯 필연인양 정인보를 만난다. 홍명희가 머물고 있는 상하이에 가보라고 기차 삯도 주었다. 홍명희와 한 침대에서 부대끼며 지내다 나가사키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신한민보>의 주필 자리를 제안 받은 것이다. 러시아를 지나 유럽에 이른 뒤 미국으로 갈 작정이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길림성의 무링에 이른다.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의 집에서 며칠을 기거한다. 다시 기차에 올라 하얼빈에 닿는다. 안중근이 이토를 격살했던 현장에 이른 것이다. 그곳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치타에 달한다. 그러나 더 이상 서진할 수가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치타에 발이 묶여 7개월을 보낸다. 바이칼을 둘러본 것이 바로 그 시절이다. 1914년 2월부터 8월까지, 기나긴 겨울과 짧은 여름의 바이칼을 모두 볼 수 있었다.
이동하는 와중에 곳곳에 글을 남겼다. 블라디보스토크 극동연방대학의 도서관에서는 <권업신문>이 남아있다. 치타에서는 한인 정교회에서 발간하는 <정교보>의 편집도 맡았다. 이광수가 가담하면서 <정교보>의 수준은 몰라보게 높아진다. '우리주장', '바른소리', '본국소문', '세계소문' 등 기획코너를 만들어 집필도 전담했다.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는 20대 청년의 시퍼런 문장들이 절절하다. 길이 막힌 그는 조선으로 돌아왔다. 최남선과 김성수의 도움으로 와세다 대학으로 진학한다. 다시 찾은 도쿄에서 1919년 2월 8일, 3.1운동의 기폭제가 되는 '조선청년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상하이로 탈출한다. 도산 안창호를 보좌하며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 역할도 맡는다.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이자 주필에 취임한다. 1920년 2월에는 '독립군가'도 발표한다. 일제에 맞서 혈전을 선포하는 혈기로 충만한 노래이다.
아다 시피 애국가가 되지는 못했다. 1929년 대공황, 1931년 만주국 건국, 1937년 중일전쟁 , 1941년 태평양전쟁, 중년의 이광수는 친일의 독배를 들이키고 말았다. 창씨를 개명하고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학병 연설도 했다. 1945년 도둑처럼 온 해방에 고개를 들고 살 수가 없었다. 양주에 농가를 짓고 두문불출 칩거한다. 1948년 8월과 9월, 남과 북에서는 분단국가가 수립된다. 그해 12월 <나의 고백>을 출간한다. 항일에서 친일로 귀결된 자신의 일생을 회한으로 담은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민족운동으로 투옥되고, 해방시대에는 친일운동으로 수감된다. 반민특위가 불기소를 결정하면서 겨우 출감이 되었다. 비로소 창작에 전념하려던 차,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납북되어 이번에는 북쪽의 철창에 갇힌다. 평생지기 홍명희가 북의 부수상이었다. 그의 배려로 병원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숨을 거두고 만다. 1950년, 기구한 인생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친일의 멍에를 벗을 수 있는 결정적 기회가 있었다. 1934년 또 한 번 피붙이를 잃는다. 부모도 자식도 나라로 허락받지 못한 저주스런 운명을 한탄했다. <조선일보> 부사장직을 그만두고 금강산에 들어간다. 1914년에 이어 20년 만에 다시 한 번 출가와 탈속을 선택한 것이다. 일찍이 천도교와 동방정교를 통해 표출되었던 종교적 발심이 끝내는 불교로 귀착되었던 것이다. 머리를 밀고 속세와 연을 끊고 중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버선발로 절까지 쫓아 온 둘째 부인의 안달을 뿌리치지 못하고 환속하고 말았다. 그 후 속세의 온갖 오욕을 겪어내고 치욕을 견뎌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변명 해주고 싶은 생각일랑 조금도 없다. 다만 크게 애달프고 깊이 애석하다. 단심이 펄펄 들끓었던 백 년 전 푸른 문장들을 읽었던 지라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애감이 도드라진다. 돌팔매질, 단죄는 쉽다. 허나 개인 탓으로만 돌리면 남는 것이 모자라고 얻는 것이 부족하다. 여린 사람이었다. 심약한 인물이었다. 평생을 통해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주지도 못한 가여운 인간이었다. 생이 그리도 처량하게 귀결된 것은 아무래도 시대 탓이 7할이다. 왜 도마처럼, 단재처럼, 벽초처럼 살지 못했냐고 모질게 나무라기 힘들다. 문(文)보다는 무(武)가 승했다. 뜻보다는 힘이 횡행했다. 성(聖)보다는 속(俗)이 창궐했다. 연옥이고 아수라였다. 꺽이고 꼬이고 말렸다. 천하대란의 카오스가 조선의 천재를 바닥으로 추락시킨 것이다. 총을 들 용기가 없었으니 비겁하고 비루한 삶이었다. 그래서 비극적이다. 잠시 분노하기보다는 오래 슬퍼할 일이다.
치타 역에서 다시 횡단열차에 올랐다. PDF로 구한 <유정>을 손에 들었다. 1933년 출간한 작품이다. 바이칼과 시베리아를 무대로 삼은 이국적 정서가 농염하다.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이라는 굴종을 감내하던 시기, 정신적 탈출구는 여전히 러시아이고 톨스토이였다. 더 이상은 갈 수 없는 땅이 되었다. 정교도 이슬람도 불교도 폐기처분한 소련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 전반으로 <부활>의 그림자가 물씬 어른거린다. 시베리아의 하얀 눈을 배경으로 정화와 구원의 여정을 펼쳐낸다. 본인이 가장 아끼는 소설이었다. 후세에 영향을 끼칠 작품으로, 외국어로 번역할만한 작품으로 단연 <유정>을 꼽았다. 흥미롭게도 작중 인물이 편지를 쓰고 있는 장소가 바이칼의 호숫가, 부랴트족 민가이다. 울란우데도 방문했던 모양이다. 라마와 샤먼을 조우했을지도 모르겠다. 금강산 입산을 시도한 것이 바로 이듬해였다. 딱 이 작품까지 남기고 여생을 났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춘원에게도 환생을 허여해주고 싶다. 700년은 너무 길다. 딱 100년, 1992년생이면 좋겠다. 마침 러시아 또한 정교문명대국으로 부활한 해이다. 안남과 인도와 페르시아와 이집트를 마음껏 주유할 수 있는 태평천하를 허여해 주고 싶다. 천지신명께 비옵건대, 세계는 통하고 문명은 흥하고 사람은 사랑하는 다른 백년을 허락해주시기를.
그 가련하고 가혹했던 20세기로부터 백년을 더 달려온 횡단열차는 시베리아 동쪽으로 더더욱 깊이 나아갔다. 타이가와 툰드라의 절경이 눈에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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