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타슈켄트 : 소비에트 도시
'동방의 풍정이 농염한 도시'라고 했다. '포도원 결의를 맺은 도시'라고 했다. 알록달록 포도송이들이 보석들 같다며, 가나에서 수단까지, 조선에서 인도네시아까지, 검고 누런 손 굳게 잡고 15억 인민들의 기상을 노래하던 도시이다. 1958년 10월 '문학의 반둥회의', 타슈켄트 회의가 열렸다. 참가자들은 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잇던 비단길을 회감했다. 이슬람에서 역법이 전파되고 <본초강목>(本草綱目)이 전수된 장소임도 추억했다. 천축의 불경을 한문으로 번안하고 노자의 도덕경을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한 현장 법사가 지나간 도시라고 했다. 그곳에 중국의 루쉰로가 들어서고, 북조선의 한설야 거리고 조성되고, 베트남의 흐쯔엉 길이 들어선다고 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양 대륙의 작가들이 유사 이래 처음 회합한 획기적인 회동이었다. 그 타슈켄트 회의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며 박사논문을 쓰던 해가 2012년이다. 몸은 신대륙에 있었지만, 마음은 온통 구대륙에 쏠렸다. 5년이 흘러 마침내 현장에 당도한 것이다.
동방의 풍정을 찾기는 힘들었다. 포도넝쿨보다는 사람 머리통 네다섯을 합친 크기의 참외와 수박이 더 눈에 들었다. 루쉰로도 한설야 거리도 흐쯔엉 길도 없었다. 1966년 7.5도의 대지진이 일어난다. 700여회 크고 작은 여진이 연중 지축을 흔들었다. 실크로드의 흔적은 송두리째 사라진다. 중소분쟁과 베트남전쟁으로 동구사회주의와 동방사회주의도 멀어지고 있었다. 1967년부터 재건된 타슈켄트는 철저하게 소비에트 도시였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와 키예프를 잇는 소련의 4대 도시가 된다. 초원 국가들 가운데 유일하게 지하철이 다니고 있다. 거주자 또한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독일계가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동방의 역사문화도시 보다는 동구형 계획도시로 전변한 것이다. 소련에서 가장 큰 레닌 동상이 세워진 곳이 타슈켄트였다.
1991년 정치적 대지진이 일어난다. 인공적인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을 만들고 사마르칸트에서 타슈켄트로 수도를 옮겼던 소련 자체가 붕괴해버렸다. 러시아인들은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우크라이나인들은 키예프로 떠나갔다. 독일인들도 통일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동구에서 중앙아시아로 이동했던 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떠나갈 여력이 없는 자들만 남았다. 주민들의 거개가 다시 무슬림의 후예가 되었다. 드물게 극동에서 강제 이주한 고려인들도 눌러 앉았다. 동/서독은 하나 되었으되, 북조선/남한은 여전히 둘이었다. 남과 북, 돌아갈 나라가 마땅치 않았다. 무엇보다 공업보다 농업에 종사했다. 근 백년 초원에 씨앗을 뿌리고 뿌리를 내렸다. 끈질기고 끈덕지게 모범농장을 경영하는 우수한 소비에트인으로서 인정도 받았다. 기질 상 유목민이 되지 못했다. 동물을 길들여 이동하는 유목문명보다는 식물을 길들여 곡물로 만드는 정주문명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천하대란, 세상이 하도 어지럽고 세월이 하 수상하야 유랑민이 되었을 뿐이다. 3대에 이르러서는 조선어나 한국어는 설었고 러시아어가 편했다. 정 고향이 그리운 자들은 반도가 아니라 연해주로 돌아갔다.
새천년 타슈켄트의 풍정은 재차 동구에서 동방으로 반전한다. 레닌 동상이 있던 자리에는 지구본을 올렸다. 마르크스 동상을 치운 자리에는 티무르 동상을 세웠다. 녹색(자연)과 흰색(평화)과 청색(생명)의 삼색기에는 이슬람을 상징하는 커다란 초승달도 박아 넣었다. 붉은 별이 지고 하얀 달이 뜬 것이다. 백년 적색국가를 청산하고 천년 녹색국가가 귀의한다.
2. 부하라 : 스톤로드(Stone Road)
유라시아에는 실크로드만 있던 것이 아니다. 중국과 유럽 사이 비단만 오고가지 않았다. 유럽중심주의와 중국중심주의가 합작하여 실크로드만 유난히 강조한다. 일각에서는 향신료와 설탕, 커피가 이동했던 길을 연구한다. 하더라도 서구와 비서구의 폭력적 수탈관계, 근대 중심주의의 편향을 거두기 힘들다. 다시금 유라시아의 중앙부가, 유라시아의 절반이 이슬람세계임을 강조해둔다. 이슬람-유라시아의 교통과 유통과 소통을 착목해야 한다. 정신문명만 공유했을 리가 없다. 물질문명도 환류했다.
25만 중소도시 부하라는 그 자체로 박물관이다. 바그다드와 장안이 세계의 양대 도시를 구가하던 무렵, 두 도시를 연결하며 세 번째로 번영하던 곳이다. 이슬람세계와 중화세계의 물자와 문화를 매개하는 오아시스 도시로 찬란했다. 동방의 사람들은 안국(安國)이라고 불렀다. 수많은 모스크와 마드라사도 세워졌다. 단박에 흙빛 건축물을 마감하는 영롱하고 청아한 청록빛깔이 눈에 든다. 사막의 오아시스, 천상의 쪽빛과 지상의 물빛을 뒤섞은 오묘한 색감이다. 자고로 아름다움이란 어우러짐과 어울림에서 비롯한다. 천상과 지상을 잇는 종교 건물마다 파란 하늘과 푸른 초원을 담았다. 땅에 발을 딛고 하늘을 우러러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천지신명을 받들며 기도를 올리고 머리를 숙였다. 천지인이 합일하는 영험한 장소였다.
본디 중앙아시아에서 잘 나지 않는 자재이다. 귀하고 드문 광석이다. 지각 아래서 마그마의 뜨거운 지열에 달구어져 알루미늄과 구리가 몸을 섞는다. 지진이라도 일어나면 지표면으로 솟아오르며 화학변화와 물리변화가 격화된다. 물과 산소와 접촉하면서 청록빛깔을 머금는 광석으로 식어가며 굳는 것이다. 모래바람에 깍이고 또 깍여서 푸른빛을 반사하는 경우가 있었다. 사막과 고원을 지나가던 사람들의 눈에는 기적 같은 광물이 아닐 수 없었다. 검은 땅 속에서 푸른 하늘 조각이 솟아난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수천 년, 아니 수만 년의 지질학적 연금술의 걸작에 탄복한 이들이 초원길을 오고가던 무슬림이었다. 그 광물을 동물 등에 싣고 부지런히 나르고 옮겼다.
가장 유명한 산출지가 이란의 니샤푸르(نیشابور)이다. 사파비 제국시절 광산만 7개에 달했다. 광석을 채굴하여 세공업자들에게 판다. 이들이 깍고 다듬어 카라반에게 되판다. 카라반은 발품을 팔아 오아시스 도시를 다니며 다시 팔았다. 하늘을 닮은, 하늘을 담은 광석의 유라시아적 교류망이 작동했던 것이다.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 반천 년 간 절정을 구가한다. 포스트-몽골제국의 유라시아를 이슬람제국들이 석권했기 때문이다. 티무르제국, 오스만제국, 사파비제국, 무굴제국이 웅비했다. 샤와 술탄과 칼리프의 왕관에도 하늘색 광석이 장식품으로 들어갔다. 칼과 방패와 마구에도 치장품으로 삼았다. 위대한 종교 경전과 뛰어난 학술 서적의 표지를 장식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슬람 제국간 독특한 조공무역 상품이기도 했다. 오스만과 무굴에서 새로운 술탄이 등극할 때마다 사파비의 샤가 선물로 헌사했던 것이 푸른 돌이다. 오스만의 슐레이만이 앉던 의자에도, 무굴의 후마윤이 쓰던 모자에도 청석(靑石)이 박혔다. 자항기르 황제는 이 돌을 너무나도 사랑하여 반지로 만들어 끼고 다녔을 정도이다. 하늘을 내 손 안에 쥐었노라, 늘상 쓰다듬었다고 한다. 세속의 권력을 상징하는 장치에도, 영성을 고양하는 푸른 타일에도 널리널리 확산된 것이다. 물질을 교환하고 문화를 교류하고 지식을 순환시키며 이슬람-유라시아세계, 움마로서의 공속감은 더욱 깊어갔다.
이 '스톤로드'에 참입하지 못했던 서구가 가로 늦게 푸른 보석에 눈을 뜬 것이 19세기이다. 오리엔트의 신비를 담은 돌이라 하여 로마와 파리와 런던의 귀족들을 매혹시켰다. 이탈리아어로는 pietre turchese, 프랑스어로는 pierre turquoise라고 했다. 오스만제국을 통하여 처음으로 접했기 때문이다. 영어로도 turquoise, '터키석'이라 불린다. 보석의 유통과 더불어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로 기록된 광물과 금속에 대한 광범위한 서적들도 입수했다. 무굴제국에 축적되어 있던 페르시아어 자연과학지식을 영어로 번역하여 런던에 세워진 것이 그 유명한 자연사박물관이다.
무굴제국은 대영제국에 복속되었다. 사파비제국은 영국과 러시아의 경합 속에서 이란으로 축소되었다. 오스만제국은 아프리카와 유럽과 아라비아를 모두 잃고 터키로 쪼그라들었다. 중동은 영국과 프랑스가 조각조각 인공국가들로 쪼개었고, 중앙아시아는 소련이 듬성듬성 인공국가들로 분절시켰다. 서구가 중동을 지배하고, 동구가 중앙아시아를 점령하면서 이슬람-유라시아 네트워크가 해체되었던 것이다. 영판 사라지지는 않았다. 잠류하고 복류했다. 1991년 소련 붕괴와 함께 서서히 재건되고 있다. 새천년에 들어서자 더욱 가파르게 복원된다. 저마다 이슬람 문명으로 귀의하면서 모스크와 마드라사 신축이 재차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에서 채굴되는 터키석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에서도 터키석을 수출한다. 소비에트의 위세에 짓눌려 수줍기만 했던 오아시스 도시들에 이슬람-유라시아의 푸른빛 연결망이 재부상하고 있다.
3. 사마르칸트 : 모바일 월드
터키석을 운반하던 이들이 투르크이다. 초원과 고원을 누비고 다녔다. 바닷길의 일인자가 아랍인이었다면, 초원길의 으뜸은 투르크였다. 로마인들이 중국에 갔던 것이다. 중국인들도 유럽에 이르지 못했다. 로마와 페르시아와 중화를 북방의 투르크가 이었다. 지금은 극서 암스테르담과 극동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다. 견문 3년차, 구글 어스로 위성사진을 감상하는 취미가 생겼다. 아프리카의 북서부터 중국의 서북까지, 광대한 건조 지대가 펼쳐진다. 서남쪽으로 갈수록 덥고, 동북쪽으로 갈수록 춥다. 북아프리카의 사막과 동시베리아의 툰드라가 지형적으로 통하는 것이다. 그 외부에 자리한 극서유럽과 극동아시아는 정주문명이 발달했다. 그 사이로 장쾌하게 펼쳐지는 모바일 세계, 이 월드와이드웹(WWW)의 주인공이 투르크였던 것이다.
비단과 차와 종이와 돌을 투르크가 유통시켰다. 중국의 차를 차이라고 부른 사람들이 돌궐이었다. 이슬람을 수용한 돌궐, 투르크의 영향으로 인도에서도 짜이이고, 아프리카에서도 차이이고, 러시아에서도 챠이이다. 알바니아,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그리스, 루마니아도 차이라고 부른다. 극서 변방 유럽인들만 발음이 서툴렀으니 티(tea)가 되었다.
아프리카와 아라비아의 커피를 유라시아에 전파한 이 또한 투르크이다. 아랍어로 카흐와(قهوة)라고 한다. 터키어로 카베(kahve), 영어로 coffee이다. 양탄자가 깔린 이스탄불의 카페에서 풍기는 이디오피아 에스프레소 향기에 탄복한 이들이 베니스 상인들이다. 무굴과 사파비에서 여행온 지식인들이 오스만의 문화예술인들과 토론하는 모습도 부럽게 쳐다보았다. 그 라이프스타일이 이탈리아를 거쳐 유럽으로 전파되면서 카페 문화가 이식된 것이다. 무슬림 공론장을 본받아 부르주아 공공영역이 창출되었다. 터키어로 아침 식사를 카발티(kahvalti)라고 한다. khhve + alti, '커피 전'이라는 뜻이다. 모닝커피를 마시기 전에 배를 채우는 것이 조식이다. 커피에 달달한 터키쉬 딜라이트를 곁들이던 투르크의 습관은 아메리카노에 조각케익을 주문하는 스타벅스의 흔한 풍경이 되었다. 우유와 요구르트, 버터와 치즈 또한 투르크 유목망을 따라 유라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천개의 고원을 주파하며 천년을 유랑하던 투르크-이슬람-유라시아 세계가 분절된 것이 20세기이다. 19세기 오스만제국과 백년의 일합을 겨루었던 러시아는 투르크세계를 가장 경계했다. 투르크의 절반을 소련으로 품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서방의 투르크세계를 '터키적(Turkish)'이라 했고, 동방의 투르크세계를 투르크적(Turkic)이라 분류했다. 리얼리스트 스탈린은 고육지책 분리 지배를 창안한다. 중앙아시아에 5개의 인공국가를 만들어 각자의 국어를 부여한 것이다. 과학적이고 진보적인 국사도 편찬시켰다. 돌연히 '우즈벡인'과 '카자흐인'으로 호명된 사람들 은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모스크바를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조우했다. 내부 여권을 만들어 투르크세계의 자유 이동도 차단시켰다. 개별 공화국 아래서 자원은 국유화되고 농장은 집단화되었다.
이동하고 유랑하는 유목민의 후예들에게 농장과 공장은 수용소, 굴락(ГУЛАГ)에 다름 아니었다. 온종일, 일생을 토지에 묶여서 노동하다 죽어가는 정주민들을 딱하게 여겼던 이들이다. 이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얼마나 다채로운 풍광과 다양한 문화가 있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엾게 보았다. 농업에 기초한 민족문화보다 상업에 기초한 세계문화를 즐겼다. 사람과 문화와 물자가 순환하며 융합하고 창조하고 회통하는 모바일 라이프를 사랑했다. 소련이 선사해준 국토와 국경과 국어와 국사는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 국가화와 국유화와 집단화 또한 어색한 살림살이였다. 답답하고 갑갑했다. 탈영토적, 탈중심적, 초국가적 구세계를 향수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된다. 껍데기는 갔다. 껍질이 벗겨졌다. 빼앗긴 들에도 봄이 왔다. 좌파독재국가로부터 벗어난 동투르크세계에 가장 환호했던 나라는 서투르크, 터키였다. 소련 해체 직후인 1992년, 앙카라에서 투르크계 공화국 정상회의를 개최한다. 박차를 가한 것은 새 천년 이다. 100년 묵은 세속주의 공화국, 우파독재로부터 이탈하여 신오스만주의를 표방하는 공정정의당이 집권한 해가 2002년이다. 유럽에 기독교민주주의가 있다면 투르크세계에는 이슬람민주주의가 있다면 중앙아시아 신생 국가들에게 매력공세를 펼친다. EU에 등을 돌린 서투크세계와 SU(Soviet Union)에서 빠져나온 동투르크세계의 재결합(TU)을 본격화한 것이다. 동/서 이념으로 분리되었던 투르크의 분단체제를 고전문명으로 극복한다. 중앙아시아의 젊은 친구들은 이제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가 아니라 앙카라와 이스탄불로 유학 간다.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은 터키어를 모방하여 키릴문자를 버리고 라틴문자로 표기한다. 소련 시절 파괴되었던 이슬람 유적지가 터키의 지원으로 복원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감옥에서 투란 연방을 염원했던 무슬림 공산주의자 술탄가리에브의 꿈이 끝내 이루어지는 듯하다.
터키 또한 방향을 선회한다. 탈아입구, 더 이상 EU 가입에 안달하지 않는다. 동투르크세계와의 냉전을 조장했던 NATO에서도 이탈하려 든다. 동투르크가 모두 가담하고 있는 SCO에 입회하려 한다. 내륙아시아, 북아시아로부터 기원하여 아나톨리아로 이주한 후손들임을 자각한다. 범이슬람주의와 신오스만주의, 범투르크주의와 신유라시아주의가 공진화한다. 이슬람이라는 유장한 공속감, 투르크라는 끈끈한 연대감이 대륙적 유라시아연합으로 귀결된다. 터키부터 아프가니스탄을 아우르는 새 천년의 새 문명지도를 그려가는 것이다. 고로 사마르칸트를 고대의 실크로드 도시라고만 간주해서는 모자라다. 새천년 모바일 월드의 허브도시, 미래도시이자 첨단도시이다. 우즈베키스탄 또한 일국으로 접근하면 부족하다. 아나톨리아에서 시베리아까지, 투르크-이슬람-유라시아세계를 아우르는 중간 역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4. 아프라시아브 :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사마르칸트 동북쪽에 아프라시아브가 자리한다. 고대도시의 궁전과 주택지를 발굴하던 1965년, 빛바랜 채색 벽화가 발견되었다. 정면에는 12명의 외국 사절단이 묘사되었다. 그 오른쪽 끝에는 새의 깃털 장식을 한 모자와 긴 칼을 허리에 찬 인물이 그려졌다. 두 손을 소매 깃에 넣어 공수(供手)하는 자세가 익숙하다. 구소련의 고고학자는 고구려인이 아닐까 추론했다. 1976년 일본 학자들도 고구려 복식일 것으로 추정했다. 1990년 한소 수교 이후 한국학자들도 주목했다. 지금은 고구려 멸망 이후 통일신라 사람일 것이라는 설이 더 유력하다.
그 고대벽화가 2017년 11월 다시금 우즈베키스탄에서 널리 환기되었다. 신임 대통령 미르지요예프가 한국을 국빈으로 방문한 것이다. 2시간이 넘는 공식 행사를 생중계로 방송했다. 재방송도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20세기 소비에트 문화를 대신하여 21세기 대중문화를 선도한 것이 한류였다. <대장금>과 <겨울연가>를 비롯하여 <별에서 온 그대>와 <태양의 후예>까지 우즈벡의 일상에 깊이 침투했다. 전임 카리모프 대통령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한 유일한 현직 정상이었다. 신임 대통령 또한 정성이 각별하다. 고려인 출신 관료들과 상/하원 의원들을 대거 대동했다. 아내와 아들은 물론 손자까지 동반하여, 대대손손 우의를 약조한다. 형님국가, 아우국가 하면서 우즈벡의 시장화와 자유화에 한국이 적극 참여해줄 것을 당부한 것이다.
목하 초원에 불고 있는 신시대의 신세계화를 상징한다. 지상의 길을 닦고 있는 나라는 중국이다. 천상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나라는 터키이다. 러시아는 지하자원을 운송하고 집단안보를 제공한다. '그레이트 게임'을 펼쳤던 영국은 어느덧 가물하다. 유럽에서만 이탈한 것이 아니다. 유라시아 전체에서 희미하다. 21세기 다른 백년, 서구화도 소련화도 미국화도 아니다. 유라시아의 한복판에 서서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한다. 투르크의 기질과 천성에도 딱 들어맞는다. 태평양부터 대서양까지, 시베리아부터 인도양까지, 서유럽인부터 동아시아인까지 유전자도 두루 섞였다. 잡종적이고 혼종적인 DNA가 각인되었다. 연합적이며 연방적이고 연정적이다. 다문화적이고 다문명적이며 다문자적이다. 우즈벡어와 위구르어는 통한다. 카자흐어와 타타르어도 통한다. 우랄 알타이 어족, 터키어는 한국어와 일본어와 몽골어와도 통한다. 어순과 문법이 흡사하다. 키릴문자로 표기하는 몽골어와 라틴문자로 쓰는 터키어 사이에 동일한 어휘가 25%에 달한다. 북방 초원을 달리던 말을 타고 말과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던 것이다.
유라시아 견문 950일차, 유라시아 4대 문자가 확연해진다. 서쪽에는 라틴문자가 있다. 남쪽에는 아랍문자가 있다. 북쪽은 키릴문자이다. 동쪽은 한문이다. 라틴문자를 익히면 영어, 독어, 불어가 갈래를 친다. 아랍문자를 익히면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투르크어까지 수월하다. 키릴문자를 익히면 그리스어부터 몽골어까지 연결된다. 한문을 배우면 일본어부터 베트남어까지 용이하다. 현재의 인문/사회과학은 라틴문자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다. 비정상의 정상화, 적폐 청산, 재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유라시아 4대문자에 기초하여 학제를 개편하고, 지식과 정보가 유통되는 말길과 글길을 활짝 터야 한다. 외길만 답습하면 외골수가 되고 외통수가 되기 십상이다. 정보의 편향과 지식의 편식은 세뇌의 첩경이다. 골고루 접하고 고루고루 취해야 한다. 그래야 실시간으로 전개되고 있는 신시대의 신세계화를 주체적으로 인식하고 창조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한글 창제부터가 몽골제국의 유산, 유라시아와의 전면적 교류의 소산이었음을 필히 유념해야 할 것이다. 북방과 서역과의 회통,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덕이었다.
일방적인 발견의 시대는 갔다. 편파적인 탐험의 시대도 지났다. 재발견하고 재발굴하고 재음미하는 회심의 시대이다. 오래된 길을 다시 밟으며 옛 말씀을 곱씹고 묵은 영혼에 귀를 기울이는 되새김의 신시대이다. 다시 러시아로 돌아간다. 정교대국 러시아는 이슬람세계만 품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세계도 안고 있다. 태초와 태고, 태허와 태극의 만다라를 묵상하게 만드는 바이칼 호수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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