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열린 5월 29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발행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같은 사건에 대해 유죄를 선고한 1, 2심 판결이 뒤집어 진 것.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외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에게 삼성 경영권을 물려주는 과정에서 불거진 대표적인 법률 쟁점은 이렇게 해소됐다.
뒤이어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4일 전인 8월 14일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헐값 발행 혐의로 기소된 이 전 회장에 대한 파기환송심에서 재판부는 유죄를 인정하고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 원을 선고했다. 하지만 배임죄를 인정하고도 1심에서 조세 포탈 등의 혐의로 내린 형량을 그대로 유지해 논란이 일었다. 논란은 4일 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사그라졌다.
이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지난 9일.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이 '오너 경영자'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뒤이어 22일 권오현 삼성전자 사장은 "삼성뿐 아니라 우리 경제를 위해서라도 전임 회장의 경험과 지혜를 활용할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며 최 사장의 말을 구체화했다. 여기에 최근 '재벌 3세'들이 경영 일선에 나서고 있다는 보도까지 겹치면서 재벌의 오너경영체제가 기정사실로 굳어지는 분위기가 됐다.
2005년 <재벌의 소유구조>라는 책을 통해 각 대기업 총수 일가의 지배구조를 분석한 김진방 인하대 교수(참여연대 시민경제위원회 위원장)는 이런 분위기가 걱정스럽다. 언론이 삼성의 불법 승계 문제가 다 끝났다는 양 보도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가 보기에 삼성 경영권 승계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고 한국 대기업의 지배구조 문제 역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김 교수는 앞으로 계속 이어질 삼성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과거 저질러진 불법·편법 사례가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최근 언론이 강조하는 '3세 경영'론 역시 재벌의 비정상적인 기업 지배 구조를 묵인하면서 이들의 '세습'을 정당화시키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김 교수가 제시한 대안은 뭘까. 그것은 책임성과 투명성이다. 아무리 그럴 듯해 보이는 대안이라도 이 두 가지가 없으면, 재벌의 비정상적인 지배구조는 오히려 더 강화될 수 있다는 것. 일부 개혁 성향 지식인들이 지지하는 지주회사 체제 역시 그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지난 24일 그의 연구실에서 나눈 대화를 간추렸다.
"유죄 판결 났는데, 불법승계 논란 해결됐다는 억지 주장"
▲ 김진방 인하대 교수(참여연대 사민경제위원회 위원장) ⓒ프레시안 |
김진방 : 최근 삼성 재판 결과를 놓고 몇 가지 오해가 있는 것 같다. 특히 재판 결과를 전하는 언론은 마치 이건희·이재용 부자의 불법승계 논란이 해결되었다는 듯이 보도하고 있다. 삼성에버랜드 재판은 대법원에서 형식논리에 치중해 무죄를 선고했지만 삼성 SDS 사건에서는 배임 혐의가 분명히 인정됐다.
이를 두고 모든 게 해결된 것처럼 말하는 건 옳지 않다. 잘못이 드러난 만큼 재발 방지를 위한 고민을 해야 할 시점이다.
10년 가량 진행된 에버랜드와 삼성SDS의 재판은 우리 사회에 존재했던 여러 가지 부조리를 드러냈다. 이렇게 긴 시간 자체가 문제였다. 이 재판은 애당초 오래 끌 사안 자체가 아니었다. 그런데 처음 문제를 제기한 후 검찰에서 처리를 지연시키고, 법원으로 넘어간 이후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재벌에 대해 감독기관과 사정기관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국민에게 한 대기업의 총수 일가가 회사의 이익을 빼돌려 자기들이 차지하는 과정이 스스럼없이 드러났다는 데 있다. 과거에는 그런 일들이 감춰지고 묵인되었지만 이제 국민들이 그 과정을 소상히 알게 됐다. 그리고 사정기관·감시기관의 행태 역시 생생히 목격했다. 하지만 이들 기관은 반성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국민의 불신이 깊어질 전망이다.
재판 결과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크다. 대법원이 에버랜드에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앞으로 형식적 요건만 갖추면 쉽게 회사 돈을 빼돌릴 수 있게 됐다. 다행히 X-파일 사건 등 우여곡절을 거치며 재판까지 간 삼성SDS 사건이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의미 있는 성과다.
이 두 사건은 사실 하나의 패키지로 묶였어야 할 일인데 비슷한 사건에 서로 상반되는 결과가 나온 점은 한계로 꼽을 수 있다.
"삼성 승계 작업, 3분의 1도 안 끝났다"
프레시안 : 대법원의 판결 직후 한 토론회에서 "이건희 일가의 경영권 승계 작업은 아직 3부 능선도 못 넘었다"라고 말했다. 주류 언론이 승계 마무리를 기정사실화한 것과는 대조적인 입장이다.
김진방 : 그렇다. 승계 작업의 3분의 1도 끝나지 않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삼성그룹을 지배하려면, 삼성생명과 삼성전자의 장악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에버랜드의 삼성생명 지분율은 19.34%에 불과하다. 앞으로도 40% 정도의 지분이 더 필요한테 20%는 이건희 전 회장이 갖고 있다. 이 지분은 과거에 임원들의 명의로 숨겼던 것을 실명화한 것이라 변칙적인 방법을 쓰기가 힘들다. 이재용 전무에게 직접 넘기거나 에버랜드에 매각하거나, 삼성공익재단같은 비영리법인에 넘기거나하는 방법이 있는데 모두 만만치 않다. 지금까지처럼 세금을 피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삼성전자를 넘겨주는 것 역시 남은 장애물이 많다. 삼성생명은 삼성전자의 지분을 7.21% 가지고 있다. 그리고 특검 수사 등을 계기로 이건희 전 회장이 3~5% 정도를 실명화 했다. 나머지는 삼성물산이나 자회사 등의 내부지분으로 35% 정도를 차지한다. 이건희 전 회장의 지분을 이재용 전무가 가져가야만, 이 전무가 삼성전자를 장악할 수 있다.
그게 쉽지 않다. 삼성전자는 상장사이기 때문에 3% 지분이라고 해도 금액이 천문학적이다. 이건희 전 회장이 갖고 있는 삼성생명 지분보다 금액이 더 크다. 세금 부담을 피하면서 이런 규모를 넘기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나 더 보태면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장악력을 들겠다. 주식만 물려준다고 해서 이재용 전무가 삼성 그룹을 장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건희 전 회장 역시 단지 소유한 주식만으로 삼성 그룹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거대한 삼성 조직을 장악하려면, 지분율로 표현할 수 없는 요소가 필수적이다.
결과적으로 이재용 전무가 넘겨받은 주식은 아직 3분의 1수준이인데, 조직 장악이라는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3부 능선도 넘지 못했다고 말한 것은 그래서였다.
"삼성 승계 문제, 북한 연구자에게 물어보라"
프레시안 :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자산을 승계하는 문제가 남았다고 했다.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다.
김진방 : 일종의 세력관계라고 본다. 사실 경제학자가 대답할 내용이 아니다. 삼성의 경영승계 과정은 예전의 왕정이나 독재국가에서 진행된 세습과정과 닮았다. 북한 전문가에게 물어보면, 더 좋은 대답을 들을 것 같다. 북한이 최근 3세 승계를 준비한다는데, 이게 김정일이 선언한다고 되는 문제만은 아닐 게다. 내부에서 복잡한 조율 과정을 거칠 게다.
삼성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이건희 전 회장이라고 해도 삼성 내부의 모든 것을 틀어쥘 수는 없다. 약점도 있고, 외부에 있는 견제 세력도 부담스럽다. 조직 안팎에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들이 있는데, 서로 맞는 사람끼리 한 구심점으로 모일 것이다. 이런 구심점과 다른 구심점이 서로 갈등할 텐데, 이를 정리해주는 역할이 필요하다. 한마디로 조직 안팎의 세력관계를 정리하는 일이다. 아무리 지분을 갖고 있다고 해도 간단한 일은 아니다.
에버랜드, 서울통신기술…현대글로비스식 '몰아주기 경영' 가능성
프레시안 : 향후 이어질 삼성 승계 과정에서 주목되는 회사가 삼성생명이다. 상장이 이뤄지지 않은 회사여서다. 비상장 회사인 에버랜드 지분을 넘기는 과정에서 삼성은 썼던 편법이 재연될 가능성은 없나. 이런 방법이 지난 5월 대법원에서 무죄로 판결이 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려는 더 커진다.
김진방 :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더욱 에버랜드 판결이 안타깝다. 다행히 세법은 어느 정도 정비가 된 상태다. 주식을 헐값으로 넘겨받아 얻은 이익에 대해서도 세금을 물릴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삼성이 세금 문제를 비켜가는 것은 힘이 들 것이다. 삼성SDS BW 헐값 발행 사건도 바뀐 세법이 적용돼 엄청난 세금을 물었지만 배임 부분이 문제가 돼 승강이를 벌이다 유죄로 나왔다.
세금을 내지 않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현대그룹이 '멋진' 사례를 보였는데 바로 현대글로비스 사건이다. 자회사에 계열사가 물량을 몰아줘 회사를 키워주는 방식으로 1조 원도 문제없이 만들 수 있었다. 이번에 현대글로비스가 공정거래위원회에 적발돼 법원까지 넘어갔는데 부당지원으로 판결이 났다. 하지만 공정거래법 위반으로 벌금을 내는 것은 현대자동차다. 이익을 본 현대글로비스는 물론, 정몽구·정의선 부자도 한 푼도 내지 않는다.
프레시안 : 삼성도 비슷한 방식을 쓸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인가.
김진방 : 그렇다고 본다. 두 회사에 주목하고 있다. 하나는 에버랜드다. 에버랜드의 거래 대부분이 계열사와 이뤄진다. 물론 부동산 관리나 임대는 어느 재벌이나 한다. 돈을 빨아들이는 빨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재용이 소유한 서울통신기술이다. 현대글로비스보다는 작은 회사지만 목적은 같다. 현대글로비스처럼 될 걸 우려해 아직 상장하고 있지 않는데 에버랜드처럼 돈을 빨아들이는 회사로 봐야 한다. 다만 서울통신기술이 돈을 불리는 목적에 국한된다면, 에버랜드는 그룹 지배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2세'는 동업자일 수 있지만, '3세'는 그저 황태자일 뿐"
▲ 왼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 이건희 전 삼성 회장, 이부진 호텔신라·에버랜드 전무 ⓒ뉴시스 |
김진방 : '3세 경영'이란 말이 나오는 것 자체가 한국 기업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세계의 기업사례를 보면, 2세 경영은 특별한 게 아니다. 창업자와 2세는 어느 정도 동업자적인 성격이 있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JP모건처럼 오히려 2세에 들어서 회사가 커진 사례도 있다.
하지만 3세의 경우는 질적으로 다르다. 삼성을 예로 들면 이재용은 동업자가 아니라 황태자에 가깝다. 록펠러 같은 경우 가업의 전통을 잇는 상징적인 인물이 대를 잇기도 한다. 하지만 경영 참가는 보통 1세에서 끝나고 2세도 드문 편이다. 3세 경영은 적어도 미국에서는 없다. 고작해야 대주주 역할을 하면서 거부권을 행사하는 정도다.
그런데 대한민국 경제를 좌우한다는 대기업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또 그런 움직임을 별다른 문제제기 없이 수용하려는 태도에서도 우려를 느끼고 있다. 더구나 우리나라 총수 일가가 소유한 기업 지분은 5%, 많아야 10%다. 방금 언급한 미국 기업 대주주의 지분율은 보통 20%~30%에 이른다. 3세의 자질 논란을 떠나 이렇게 적은 지분으로 대규모 기업집단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체제적으로 정체 내지 후퇴에 해당한다.
"배임 유죄 이건희, 집유 기간도 안 끝났는데…"
프레시안 : 한편에서는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 권오현 사장 등이 잇따라 이건희 전 회장의 복귀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김진방 : 한마디로 삼성의 자가발전이다. 그런데 여기에 보수언론이 호응하는 행태를 연출하고 있다. 이건희는 유죄를 받았다. 그것도 배임 혐의의 유죄판결이다. 경영자로서 회사에 손해를 끼쳐 징역 3년 형을 받은 것이다. 집행유예 기간도 끝나지 않았는데 그런 사람을 경영자로 불러오자는 말이 나오는 데 아연실색했다.
프레시안 : 일부 전문가들은 소버린 사건 등을 예를 들며 외국 투기자본에서 재벌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보 인사들 중에도 이런 주장에 호응하는 이들이 제법 있다.
김진방 : 그런 주장은 전제가 잘못돼 있다. 그들의 주장을 보면 하나는 경영권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경영권을 보호하느라 투자할 여력이 없어져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첫 번째 위협론부터 보자. SK그룹은 실제로 위협을 받았다. 하지만 그밖에 어떤 사례가 있나. SK는 지분율이 삼성보다 더 낮은 불안정한 상태였다. 우리나라 30대 재벌 가운데 최하위 수준이었다. C&C가 유공을 인수하고 SK텔레콤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지분율이 낮아졌다. 게다가 당시 최태원 회장은 구속됐다. 그런 과정에서 일어난 특수한 경우다.
나머지는 어불성설이다. 우리나라 재벌의 내부지분율이 상장사가 30%, 비상장사는 50%다. 이러면서 경영권을 위협받는다고 주장하는 게 성립되나? 재벌과 외국 자본이 서로 견제한다고 치자. 외국 회사 지분은 기껏해야 5~10%고 그 정도까지 가는 경우도 별로 없다. 실제로는 기업 경영에 문제제기를 하는 수준이다. 주주발언을 경영권에 대한 위협으로 느낀다면 그게 더 큰 문제다.
두 번째 투자를 안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근거가 없다. 재벌들은 실제로 투자했다. 다만 외국에 했을 뿐이다. 국내에 투자를 하지 않는 게 외국 회사 때문이라는 건 잘못된 판단이다. 국내 투자를 외국인 회사가 막을 이해상관관계가 없다. 사회적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투자면 더 안 할 이유가 없다. 모두 총수 일가가 하기 싫어서 안 한 것이다.
경영권을 보호하면 사회적인 목적에서 고용을 늘리려 투자할까? 그렇지 않다. 이미 경영권을 보장해 줬는데 그 후에 어떤 사회적 압력을 넣을 수 있나? 그때는 아마 완고한 성이 돼 있엇 성 안에 영원한 제국을 건설할 것이다.
"금융주도축적체제론, 한국 현실과 다르다"
한편에는 우리 경제의 문제를 주주자본주의나 금융주도축적체제의 문제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릇된 진단이다. 사실은 재벌 자본주의의 문제다. 주주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 미국의 급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금융주도축적체제론은 금융 부문이 유능한 인재와 자산을 다 빨아들인다는 이론인데, 이는 우리 현실과 맞지 않다.
금융주도축적체제론을 현실에 적용하려면 여러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우선 기업의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야 한다. 그리고 기관 투자자가 큰 비중을 차지해야 한다. 또 국민이 직간접적으로 금융자산을 많이 보유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주주이익이 노동자의 이익을 앞설 수 있다. 소수 주주, 포트폴리오 투자자들의 이익이 우선이 되고 단기주의 이익 역시 우선시될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우리 현실을 보자. 총수 일가가 직접 소유한 지분은 5%에서 10%지만 내부지분율은 평균 40%다. 대부분 25%를 넘는다. 주주 자본주의와는 거리가 먼 구조다. 국민 대다수가 주식을 해서 주주이익 위주로 법제도를 만들어지는 상황도 아직은 아니다. 국민 자산 대부분은 부동산과 저축이다. 주식 투자가 늘어났다고 하지만 아직은 비중이 작고 투자자 수도 적다. 금융주도축적체제론이 적용될 수 있는 기본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점은 우리나라 은행의 기능을 보면 당장 알 수 있다. 민간에서 제일 큰 기관 투자자를 꼽아봤자 미래에셋 정도다. 미래에셋이 기업을 좌지우지하나? 이익을 뽑아가나? 그렇지 않다. GDP 대비 금융의 비중을 봐도 금융 부문이 단물을 빨아먹는다는 주장은 맞지 않다.
미국 경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설령 미국 경제가 금융주도축적체제라고 하더라도, 그걸 이식해왔으니 한국도 그렇다는 논리는 관념적인 해석이다.
혹은 그 개념을 확대해서 일각에서는 지주회사를 금융주도축적제도의 한 유형으로 보기도 하는데 우리나라 지주회사는 금융 투자를 위한 회사가 아니다. 전망이 좋은 사업을 찾아 기업을 인수해 값을 올려서 파는 회사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우리나라의 지주회사는 인수합병을 해도 매각차익을 노린 게 아니라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현재로선 잘못된 이해다.
▲ "외국 자본이 경영권을 위협하기 때문에 투자를 할 수 없다는 주장은 잘못이다. 총수가 국내 투자를 거부한 탓이다" ⓒ프레시안 |
"지주회사가 기업지배구조 대안?…SBS를 보라"
프레시안 : 기업지배구조의 대안으로 가장 많이 논의된 게 지주회사다. 이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다.
김진방 : 앞서 말한 JP모건의 경우, 대주주의 지분율이 높으니 'No'하는 힘이 크다. 지분율이 낮으면 편법적인 경영 방식을 놓는 순간 일반 주주의 하나가 될 가능성이 크다. 총수 일가가 그런 선택을 자발적으로 할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거꾸로 그렇게 때문에 편법 경영이 절박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계속 그런 행태를 용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기업지배구조를 놓고 다양한 대안이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일각에서 제시하는 지주회사는 대안이 될 수 없다. 우리나라 현실에서 지주회사는 오너의 지배권을 오히려 유지·강화하는 제도라고 본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재임 당시 지주회사를 허용했는데, 이는 외환위기 이후 외국인 자본이 들어와서 우리나라 기업을 가져갈 수 있다는 염려가 나오면서 이를 막을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것이다.
그때도 재벌 체제의 강화를 막기 위해 금산 분리 원칙을 세웠고 자회사를 설립하는 데도 부채 비율 등 여러 제약을 가했다. 지배력 강화는 용인하더라도 몸집을 불리려는 것은 막으려 했다. 요컨대 당시에도 지주회사 체제가 가져올 위험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다만 당시 상황에 떠밀려서 도입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지주회사가 마치 좋은 제도인 것처럼 말하는 이들을 보면 답답하다. 나쁜 제도임에도 일부 좋은 점이 있는 것뿐이다. 지주회사에 대한 오해가 판치는 분위기 속에서 이 제도의 단점을 보완했던 장치들이 제거되고 있다. 지금은 자회사뿐 아니라 증손자회사까지 당연시하고 있다. 심지어 부채비율 제한도 없애려 한다. 게다가 일반 지주회사에서 사외이사 등록 관련 규정도 완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지주회사를 마냥 좋은 대안으로 추켜올리는 것은 명백한 퇴행이다.
잠시 엉뚱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SBS가 지금 혼란스럽다. 이유가 뭐냐면 예전에 지주회사가 좋다고 해서 SBS 경영진이 그 길로 갔는데, 당시 노동조합도 이를 지지했다. 반대 세력을 물리력으로 압박할 정도였다. 그런데 요즘 크게 후회하고 있다고 한다. 지주회사가 되면서 30% 지분을 가진 태영의 지배력이 더욱 커진 것이다. SBS가 창출한 수익이 태영이 100% 지분을 가진 다른 계열사로 빠져나간다. 방송은 공익적 사업이라 수익이 많으면 기부도 해야 하지만 다른 계열사는 그렇지 않으니 SBS에 수익을 남길 이유가 없다. 지주회사가 잘못되면 이런 일이 생긴다.
"SK의 지주회사 전환, 최태원에게만 좋은 일"
지주회사인 SK그룹의 사례를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는데, 역시 잘못 이해한 것이다. SK의 지주회사 전환은 별다른 이유가 없다. 최태원 회장의 지배력 강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예전에는 최 회장이 SK C&C를 통해 SK텔레콤 등을 지배했다. 문제는 C&C가 차지한 지분이 10%대로 약한 편이라 다른 지분의 동의가 있어야 지배가 가능했다는 점이다.
지주회사로 전환한 지금은 C&C가 예전보다 3배의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 SK텔레콤의 지배력은 같지만 SK에너지에겐 2배의 지배력을 갖고 있다. 아무런 돈도 들이지 않고 지주회사를 지렛대로 집어넣어 지배력을 높인 것이다. 순환출자구조가 해소되지 않겠느냐는 말이 있는데 SK의 경우 계열사 출자를 하나 더 늘리는 것에 불과하다. 지주회사가 있다, 없다가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지주회사 체제를 도입해서 잘 된 경우는 극히 드물다. LG그룹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게 거의 유일하게 긍정적인 사례인데, 이 경우는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 오랜 동업관계였던 구 씨 일가와 허 씨 일가가 쪼개지면서 자산 배분을 위해 지주회사를 설립한 경우다. 당시 그룹에서 금융 부문을 포기하는 등 제약을 받아들였다. 반면, 삼성은 은행까지 가져가면서 지주회사로 가려고 하고 있다. SK 역시 SK금융을 분리하지 않으려 한다.
일본의 사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일본 역시 현재의 재벌체제가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2차 대전 당시의 재벌 구조가 패전 후 맥아더 장군에 의해 해체되고 다시 그룹으로 재결합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때 지배주주가 사라졌다. 상호출자 등을 통해 사장단 회의로 전반적인 일을 꾸려나가고 계열회사를 통해 그룹관계가 생겨났다.
여기에도 효율성 제고나 경영자의 기득권 문제 등 문제점은 많다. 그래도 한국 재벌을 개혁하는 과도기적인 체제로 고려해볼만 하다. 전제가 있는데 대주주는 제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배주주는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 때문에 경영권이 심하게 위협받는다면 일본식 그룹체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삼성 지주회사, 걸림돌은 공정거래법"
▲ "현재 한국의 지주회사는 순환출자 해소가 목적이 아닌 지배력 강화를 위한 도구로 쓰이고 있다" ⓒ프레시안 |
김진방 : 직접적으로 영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주회사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삼성생명을 상장하는 게 편할 것이다. 결국 삼성생명과 삼성전자를 각각 지주회사와 사업회사로 나누고 두 지주회사를 합병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요컨대 삼성생명 지주회사와 삼성생명 사업회사, 삼성전자 지주회사와 삼성전자 지주회사를 세운 뒤, 삼성생명 지주회사와 삼성전자 지주회사를 합병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합병비율이 문제가 될 텐데, 결국 둘 다 상장해서 시가로 비교하는 방법이 가장 간단하다. 다만 삼성생명을 상장하는 데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보험가입자의 이익과 주주의 몫을 어떻게 나눌지라는 문제가 핵심이다. 이 문제는 김대중 정부 후기부터 노무현 정부 초기까지 계속 논의됐는데, 노무현 정부가 윤증현 현 기획재정부 장관을 금융위원장으로 앉히면서 흐름이 바뀌었다. 윤 위원장은 주주 몫만 있고 가입자 몫은 없다고 결론지으면서 다만 회사가 도덕적 측면에서 이익을 어느 정도 양보하라는 쪽으로 마무리했다. 하지만 원칙만 세워놓고 실현은 되지 않아서 불씨는 여전한 상태다.
삼성생명 지주회사와 삼성전자 지주회사를 합치는 방안이 가진 법률적 문제점으로는 공정거래법 위반 가능성을 꼽을 수 있다. 두 지주회사를 합칠 때 삼성전자의 덩치가 워낙 커서 금융지주가 아니라 일반지주회사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공정거래법에 따르면, 일반지주회사는 금융지주 자회사를 가질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금지돼 있다. 원래 금융지주회사법과 공정거래법을 같이 바꿔 이런 제한을 없애려 했는데 공정거래법이 한 템포 늦게 따라가고 있다. 금융지주회사법을 다시 돌려놓든가 공정거래법이 바뀌든가 해야 하는데 어디로 갈지는 지켜볼 일이다.
"'정답은 없다'는 태도는 잘못…책임성·투명성이 정답"
프레시안 : 기업지배구조 문제에 대해 정답은 없는 것 같다. 여러 유형이 각각 장단점을 갖고 있을 테니 말이다.
김진방 : 나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정답이 없으니 뭐든지 좋다는 태도가 가장 잘못된 생각이다. 사실 정답은 있다. 책임성과 투명성이다. 다만 이 두 가지를 높이기 위한 방안은 다양할 뿐이다.
한국 경제의 암적 존재는 재벌 지배주주다. 총수 일가가 적은 지분을 가지고 과도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현상을 치유해야 한다. 수술을 하건 방사능을 쏘건 일단 치유해야한다. 건강을 회복하고 나서 어떤 체제로 갈지는 여러 길이 있다. 어느 길이든 책임성과 투명성, 더 나아가 전문성을 보장할 수 있으면 된다.
그런데 책임성이라는 말은 결국 경영을 잘못했을 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뜻이다. 또 투명성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밖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이재용 전무의 삼성 경영권 승계 논란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대목이 드러난다. 흔히 이 전무의 자질을 문제 삼는다. 경영능력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는 게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가 잘못했을 때 쫓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잘못에 대해 책임만 물릴 수 있다면, 다른 문제는 부차적이다.
지금 구조는 오로지 이건희 눈에 들면 좋은 것이고 안 들면 나쁜 것이 되는 방식이다. 잘못이 드러나기도 어렵고, 설령 드러나도 책임을 물릴 수 없다는 이야기다. 회사에 손해를 끼쳐도 이건희 눈에만 들면 승승장구하니까 말이다.
만약 삼성이 지주회사를 도입한다고 해도 역시 원칙을 세워야 한다. 나는 지주회사에 대해 몹시 비판적이지만, 나름대로 순기능이 없지 않다고 본다. 새로 사업영역을 발굴해 투자하는 지주회사의 역할은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상 가장 악독한 지주회사로는 미국의 록펠러가 세운 회사를 꼽을 수 있다. 지주회사에 미국 전체의 정유회사를 편입시켜 시장 독점을 꾀한 경우다. 한마디로 최악이다.
유럽 쪽 지주회사는 여러 가문이나 회사가 연합해 이익을 조정하는 방식인 경우가 많다.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이 긍정적인 사례인데, 대주주의 집결처 역할에만 충실한 경우다. 지주회사는 배당만 받고, 계열사 경영에는 간섭하지 않는다. 다만 지주회사 이사진은 계열사 사장 가운데 높은 실적을 거둔 이들로 구성한다. 이들이 제시한 큰 방향과 계열사 독립 경영이 균형을 이루는 구조다.
"현대글로비스 사건 재판에 주목한다"
프레시안 : 삼성에버랜드 CB 헐값 발행 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내려지면서, 재벌의 불법승계를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더 절실해졌다. 그렇지 않으면, 에버랜드 방식을 흉내 낸 사례가 남발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진방 : 2001년께 세법이 개정돼서 주식 헐값 발행을 통해 세금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회사 돈을 함부로 빼내는 것 역시 과거보다는 어려워졌다. 결국 가장 큰 유혹을 느끼게 될 방법은 현대글로비스 방식이다. 부당 내부 거래를 통해 회사 돈을 빼돌리는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상법에 부당 내부 거래, 계열사 부당 지원에 대해 배임죄로 처벌하는 조항을 넣는 게 좋다.
현대글로비스 사건에 눈길이 쏠리는 것 역시 그래서다. 이런 방식은 삼성처럼 세금 안 내고 주식을 넘기는 것보다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이 더 크다. 오너 일가가 뽑아가는 돈 이상의 피해를 남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위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너무 낮다. 법도 너무 허술하다. 현대글로비스 사건은 고등법원에서 유죄로 판결이 났는데 대법원에서도 같은 결론이 나올지 지켜봐야 한다. 이 사건에서 유익한 판례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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