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포 앞바다 작은 섬, 신수도 초등학교 분교는 학생 수가 적어져 폐교 위기에 처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섬을 떠나 삼천포에 살던 이 학교 졸업생들이 모교 살리기에 나섰습니다. 자신의 자녀들을 섬으로 전학시켜 폐교 위기에서 구해냈지요. 그래서 신수도에 가면 섬에서 육지가 아니라 육지에서 섬으로 통학하는 학생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더없이 행복해 보입니다. 작은 학교라 서로 우애가 깊고 선생님들은 가정교사처럼 아이들을 지도합니다. 감동적인 이야기지요.
2월의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 제68강은 작지만 아름다운 사람들의 섬, 삼천포 신수도로 떠납니다. 섬은 천천히 걸어도 2시간이면 족할 정도로 아담합니다. 그래서 더욱 정겨운 고향 같은 섬입니다. 이번 섬학교에서는 또 미국 콜로라도주, 아르헨티나 서부해안과 함께 세계3대 공룡유적지인 고성의 상족암 일대도 걷고, 어느 항구보다 활력 넘치는 삼천포어시장과 삼천포가 낳은 시인 박재삼 선생의 문학관도 탐방합니다.
박재삼문학관이 있는 노산공원 일대의 동백은 그 어느 동백군락지보다 더 붉게 타오릅니다. 통영과 함께 경상도에서 손꼽히는 맛의 고장 삼천포의 겨울 해산물요리는 덤입니다. 입춘의 길목, 남녘 기행에 회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2018년 2월 3(토)-4(일)일 답사지인 삼천포 신수도와 상족암, 삼천포어시장에 대한 설명을 들어봅니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삼천포의 섬
삼천포항에서 여객선으로 10분 거리. 신수도는 손을 뻗으면 잡힐 듯, 훌쩍 뛰면 건널 수 있을 듯 뭍에서 가까운 섬이다. 2011년 봄 처음 신수도에 갔었다. 그때 섬은 기대에 들떠 있었다. 행정안전부 '한국의 명품섬 BEST 10'에 선정되어 25억 원을 지원받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섬사람들의 명품섬 개발에 대한 기대는 컸다.
하지만 개발의 바람을 비켜간 신수도가 나그네의 눈에는 이미 그 자체로 명품섬이었다. 그런데 또 무슨 명품섬 사업이 필요할까 의문이 들었었다. 그리고 6년 만에 나그네는 다시 신수도를 찾았다. 밭에 김매러 가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명품 섬 하고 나서 신수도가 좋아졌습니까?” 돌아오는 대답이 단호하다. “좋아지긴 머가 좋아져. 암 것도 한 거 없지 머.” 밭에서 일하는 다른 주민들도 같은 대답이다. “돈이 썩는다 케나. 한 바퀴 휙 돌아빌고 나가뿌요.”
명품섬 사업이 시작되면서 가장 먼저 들어선 것은 섬 일주도로였다. 당시 섬에는 자동차가 한 대도 없었다. 몇 년이 지난 현재도 섬에는 주민의 자동차가 딱 한 대뿐. 섬 일주도로는 관광객 유치를 명분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잘 깔린 도로 덕에 정작 관광객들은 자동차를 타고 들어와서 한 바퀴 휙 돌아보고 바로 나가버린다는 말씀이다. 왔다 금방 나가버리니 관광객의 증가가 섬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 “관광객 와 봐야 도선비만 보태주는 거지. 섬에 돈 쓰고 갈 일이 없어.” 차를 가져 오는 관광객들이 결국 여객선사에게만 이익을 주고 간다는 뜻이다. 명품섬 사업이 결국 신수도 관광을 망치고 있는 것이다.
섬 일주도로라 해봐야 5km밖에 안 된다. 자동차로는 겨우 10분 거리다. 그러니 자동차를 타고 들어온 관광객들은 한 바퀴 휙 돌아본 뒤 돈 한 푼 안 쓰고 바로 섬을 떠나버린다. 도로가 관광객을 머물게 하는 게 아니라 쫓아내는 도로가 된 것이다. 5km는 걸어도 한 두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니 섬 트레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확포장 되기 전 신수도의 오솔길들은 더없이 정겹고 아름다웠다. 그 섬길을 살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결국 신수도 명품섬 사업은 명분과는 달리 섬사람들에게는 별 다른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한 채 끝나버렸다. 예산만 낭비하고 섬을 망쳐버린 정부의 개발 사업이 한둘이 아니다. 그럼에도 정부 부처들은 여전히 비슷비슷한 관광개발 사업에 돈을 쏟아 붓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신수도 주민들의 주업은 밭농사다. 봄에는 고사리가, 가을에는 고구마가 중요한 수확물이다. 봄 고사리는 피해 입을 일이 없지만 여름을 나야 하는 다른 농작물들은 태풍이나 큰 바람을 맞으면 피해가 크다. 그러나 고구마는 땅속에 있어 안전하다. 섬들에 고구마 밭이 많은 이유다.
이 아름다운 섬에 와서 해변의 풍경과 고구마와 콩과 참깨가 자라는 것을 보며 느리게 걸어간다면 그보다 더 큰 휴식이 어디 있겠는가. 도로가 넓어질수록 섬의 볼거리는 적어진다. 이 작은 섬에서 자동차를 타고 간다면 대체 섬의 무엇을 보고 느낄 수 있을까. 신수도 본동인 큰 마을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도시의 어느 오래된 동네 같다. 마을 위 언덕은 모두가 곡식을 키우는 밭이다.
"저 방파제가 문제요." 길을 가다 만난 사내는 마을 앞 방파제를 손가락질 한다. "저 방파제 안 막았을 때는 저 앞이 게 엄지발가락 모양이었어요. 땅이 길게 튀어나온 것이 바깥 것들 물어들이는 게 집게발 모양이었거든. 그래 부자 섬이었지. 돈 섬이라고도 했으니까."
그런데 방파제를 막으면서 게의 집게발 모양의 땅이 잘려버렸다. 그 다음부터 섬이 가난해지기 시작했다고 사내는 믿는다. 바깥에서 재물을 집어오던 집게발이 없어졌으니 재물이 굴러다녀도 집을 방법이 없어 섬이 가난해졌다는 것이다. 바다 오염과 어업 기술의 발달로 어자원이 고갈되면서 신수도의 어업도 쇠퇴했다. 게다가 마을 앞 갯벌이 매립되면서 황금의 조개 밭마저 사라져버렸다. 더 이상 신수도 사람들은 바다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 없게 됐다. 그것이 섬이 가난해진 이유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러한 상황을 자신들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으니 어떤 초자연적인데서 그 원인을 찾고 싶어 한다. 그래서 섬의 쇠락도 게 집게발가락이 사라진 때문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명품섬이라고 텔레비전 나가고 나서 외지 사람들이 많이 와요." 그 외지인들이 벌써 섬의 땅들을 많이 사버렸다. 명품섬 지정해서 국가예산을 투입하니 개발업자나 외지 부동산 투기꾼들이 먼저 눈독 들였던 것이다. 섬이 투기꾼들의 먹잇감이 된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여기 죽방은 혼죽방이 아녀”
신수도는 많지 않은 사천의 섬들 중 가장 크다지만 면적 1.01제곱킬로미터의 작은 섬이다. 옛적에는 침수도(沈水島) 혹은 신두섬이라 했다. 신수도는 한때 1,500여 명까지 살았을 정도로 은성했던 적도 있지만 이제 신수본동과 대구마을 두 마을에 137가구 360여 명만이 살아가는 한적한 섬이 되었다.
신수도는 죽방렴으로 유명한 남해 지족해협과 가깝다. 지족해협의 죽방렴에서 잡힌 죽방멸치는 금값이다. 신수도 인근 바다에도 언뜻 죽방렴과 흡사한 형태의 멸치 어장들이 많다. 대구마을 해안가에도 죽방렴이 있다. 그런데 어째서 신수도 죽방멸치는 알려지지 않았던 것일까?
마침, 어느 집 마당에서 노 어부 한 분이 어구 손질을 하고 계시다. 노인은 창선도가 고향이다. 50년 전, 멸치어장 때문에 신수도로 이주해 왔다. “어르신, 여기도 죽방렴을 하네요. 멸치 값이 비싸겠어요.” 죽방렴에 대해 아는 척을 했더니 돌아오는 대답. “여기 죽방은 혼죽방이 아녀.” “혼죽방이라니요?” “진짜 죽방이 아니라고.” 무슨 말씀이신가. 이 근방의 죽방렴은 진짜 죽방이 아니란다. 삼천포 앞바다의 죽방렴처럼 보이는 모든 멸치어장들이 죽방렴이 아니란 말씀이다. 진짜 죽방렴은 남해 삼동면과 창선면 사이에 있는 지족해협에만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죽방렴이란 대나무를 엮어 만든 그물, 혹은 대나무 통발이라고 보면 된다. 참나무 말뚝을 V자로 박아 나열하고 그 안에 대나무로 그물을 엮어 물고기가 들어오면 V자 끝에 설치된 통발에 갇혀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해서 잡는 어법이다. 주로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물살이 세고 수심이 얕은 곳에 설치한다.
지족해협의 죽방렴은 조선 예종 때의 문헌 <경상도속찬지리지>에도 그 기록이 남아있는, 500년 이상 이어온 전통 어법이다. 죽방렴에서 잡힌 물고기는 신선도가 높아 고가에 거래된다. 그렇다면 죽방렴을 닮은 저 멸치어장은 뭘까? 물고기를 잡는 원리는 죽방렴과 동일하다. V로 말뚝을 박는 것도 같다. 다만 그 안을 대나무발이 아니라 나일론 그물로 채우는 것이 다르다. 그러니 죽방렴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또 한 의문이 풀렸다. 하지만 멸치는 죽방렴과 동일한 방식으로 잡는다. 게다가 값은 말할 수 없이 저렴하지만 맛은 뛰어나다. 죽방렴 아닌 죽방렴. 신수도 바다가 주는 선물이다.
“전에 산기 하도 억울해서 쪼끼 더 살면 싶다”
신수 본동 큰 마을, 낡은 집 툇마루에 할머니 혼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계신다. 마당을 기웃거리는데 할머니가 들어오라 손짓한다. 집 울타리 밖에는 오래된 고목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고목 아래 낡은 집, "할머니 집이 운치가 있는데요. 고목나무도 있고 여름에 그늘 땜에 시원하시겠어요." "아이고 하나도 안 좋아요. 떨어진 나무 이파리가 썩어서 날파리랑 지네도 많고, 나부(나비), 꺼무나부, 힌나부들도 많고 뱀도 많아요." 할머니는 지네에 물려 퉁퉁 부은 발등을 보여주신다. 고목나무 주변에도 숲이 울창하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 사는 데는 고역이다. 팔순의 할머니 혼자 사시니 집 주변의 나뭇잎을 치우거나 풀을 베어내 관리하기가 쉽지 않다.
"전에는 나무 해 때고 풀도 베고 그라께네 깨끗했는데 이제는 풀밭이 많으니 벌레도 많고."
예전 할아버지 살아계시고 할머니도 젊을 때는 늘 주변을 관리하니까 집 주변이 깨끗했다. 나뭇잎이 쌓일 틈도 없었다. 그러니 그 때는 마루에서 잠을 자도 벌레에 물릴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루에서 잠자기가 무섭다. "나무가 썩어서 덮어져 있으니 짐승이 안 끓겠나. 바글바글 합니다." 약을 많이 뿌려도 소용없다. 근본적인 처방이 없으니 집에 약을 뿌린다고 될 일이 아니다. "작년에는 구랭이가 많이 뵈더니 올해는 독사 새끼들이 많이 나옵니다." 뱀이 집 마당까지 들어오기도 한다. 나그네처럼 속 모르는 사람들은 집의 겉모양만 보고 좋아서 감탄을 하기도 하지만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외지 사람이 와서는 이런 집 처음 본다고 그러면 내가 생전 처음 보면 많이 보라 그래."
그래도 할머니는 이 집에서 혼자 사는 게 편타. 이런 툭 트인 데 살다가 시내 가면 못 살겠다. 할아버지는 진주가 고향이었다. 결혼해서 진주 살다가 할머니의 고향 신수도로 들어와 배를 부리며 살았다. 할아버지는 20년 전에 세상을 떳고 자식들은 삼천포에 산다. 자식들 집에 가면 서로 조심이 돼서 마음이 불편하다. 낡고 벌레 들끓는 집일망정 내 집이 편하다. "뒤비자든가 말든가 맘대로 해서 편코."
물이 귀한 섬에 살다보니 예전에는 저 산 너머 웅덩이까지 날마다 물을 기르러 다니곤 했다. 물 길러 이고 오면 한 시간도 더 걸렸다. "산에서 나무도 해다 때고 아휴 어치 살았는고 모리겠다." 물 길러다 밥해 먹고 산에서 나무 해다 불 때고, 밭일 하고, 갯벌 가서 조개 캐고. 밥 먹고 사는 일이 생활의 전부였다. "지금은 만고 편치. 수돗물도 잘 나오겠다. 전에 산기 하도 억울해서 쪼끼 더 살면 싶다."
그러면서도 할머니는 병들어 자식들 고생시킬까봐 걱정이다. "나이 먹을수록 목욕도 자주 해야 냄새도 안 나지. 전에 산거로 생각하면 더 살면 싶은데, 구겡도 하고 여행도 댕기고 애 터지게 벌어갖고 그리 사는 기지." 어렵게 살았던 삶이 억울해서 할머니는 더 오래 살고 싶지만 어차피 오는 죽음 편안히 맞이하고 싶은 바램 또한 크다. "사는 게 사는 걸까요. 안 죽으니께 산다고. 살면 얼마나 살겠다고. 자는 참에 소롯히 가삐리면 좋겠다. 그기 편치." 죽음 앞에 초연한 듯한 할머니의 말씀이 하도 쓸쓸하여 나그네는 길 가는 내내 가슴이 먹먹하고 아릿하다.
세계 3대 공룡유적지 고성 상족암
경남 고성군 하이면에 있는 상족암은 해식애의 암벽이 겹겹이 층을 이룬 해안절벽이다. 그 옛날 선녀들이 내려와 돌베틀로 옥황상제에게 바칠 금옷[錦衣]을 짰고 동굴 안에는 선녀들이 목욕했다는 웅덩이가 있다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로 천하의 비경이다.
상족암이 유명세를 탄 것은 상족암 주변에서 발견된 수백 개의 공룡 발자국 때문이다. 상족암은 미국 콜로라도주, 아르헨티나 서부해안과 함께 세계 3대 공룡유적지로 인정받고 있다. 1982년의 학술조사로 무려 2,000여 개가 넘는 세계 최대의 공룡발자국이 발견되어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다. 새발자국 화석(천연기념물 제411호)도 있다. 상족암(床足岩)이란 지명은 절벽 아래에 해식동굴들이 숭숭 뚫려 있어 바다에서 보면 거대한 밥상다리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근 주민들은 발자국이 많다 해서 ‘쌍족암(雙足岩)’ 혹은 ‘쌍발이’라고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상족암(床足巖)은 소을비포(所乙非浦)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돌기둥 네 개가 있으며 바위가 평상 같다. 파도가 밀려오면 물이 그 밑을 지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근처에는 공룡박물관이 있는데 공룡 전신 골격 진품과 복제품, 익룡 전신 골격, 부조 화석, 일반 화석 등 수백 점이 전시돼 있다.
삼천포 박재삼문학관을 찾아서
도쿄에서 출생해 삼천포에서 성장한 박재삼(1933∼1997) 시인은 한국 전통 서정시의 한 절정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한국 서정시의 전통적 음색을 재현하면서 소박한 일상생활과 자연에서 소재를 찾아 애련하고 섬세한 가락을 노래했다. 그의 시는 슬픔이라는 삶의 근원적인 정서에 한국적 정한의 세계를 절제된 가락으로 실어, 그 속에서 삶의 예지와 감동을 전해준다. 삼천포어시장 부근 노산공원에 그를 기리는 문학관이 들어서 있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 질 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겄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겄네.
(박재삼 시인의 <울음이 타는 가을 강>)
2018년 2월의 섬학교 제68강 <삼천포 신수도와 상족암, 삼천포어시장>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2월 3일(토)
08:30 서울 출발(아침 8시 2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 지하철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68강 여는 모임
-삼천포 도착
-점심식사
-삼천포 출항
-신수도 걷기(약 6km)
신수항-진끝-대구마을-몽돌해변-노랑늘-잘푸여치-신수동-추섬-존지늘끝-진가담치-신수항
-신수도 출항
-저녁식사 겸 뒤풀이
-자유시간 및 취침(다인실)
2월 4일(일)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
-상족암 걷기
-박재삼문학관 방문
-점심식사
-삼천포어시장 탐방 및 장보기
14:00 서울 향발. 제68강 마무리모임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모자, 선글라스, 장갑,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섬학교'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이며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1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故)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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