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나서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그리움을 받고 존경을 받고 정신을 말하고 정신을 기리는 뜻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노무현 대통령은 가식과 가면을 벗어버리는 정치를 했다....껍데기를 벗어 던지고 치장을 벗어던지는 사람의 원래 본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열광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은 그냥 개인 노무현이 아니다. 이 땅의 정치를 바꿔보겠다고 한 노무현이다. 가식과 위선에서 우리 정치를 참된 사람의 모습으로 바꿔보자고 했었던 것이다...우리가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민주주의는 그렇게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글자 그대로 국민이 주인이 되는 사회, 한사람 한사람이 존중되고 우리 사회를 움직여 나가는 동력이 힘이 한사람 한사람 시민에게서 나오는 그것을 노무현 대통령은 꿈꿨고 그걸 꿈꾸고 실현해 나갔다."
민주당 입장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적자가 아닌 서자였다. 한국의 정당들이 정치노선으로 나눠지기보단 지역이나 정치리더에 따른 이합집산을 거듭해왔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정치적 근거지인 '호남'이 아닌 '영남' 출신인 노 전 대통령은 88년 13대 총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끌던 통일민주당 후보로 당선돼 정치를 시작했다. 1997년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하기 전까지 노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다른 정치적 노선을 걸어왔다. 노 전 대통령이 2002년 대선에서 후보 자리를 꿰차고도 그해 6월 지방선거 참패 후 상당기간동안 견제를 받았던 것도 어쩌면 이런 '배경'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서자인 그는 당내 기반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노 전 대통령은 야당 출신이었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더더군다나 한나라당 출신 '서자'다. 김영삼 전 대통령에 의해 정치에 입문했다는 점도 같다. 손 대표는 1993년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자당에 입당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김문수, 이재오 등 재야운동 출신을 적극 영입했고, 기독교 빈민운동 출신인 손 대표도 비슷한 시기에 발탁됐다.
2007년 3월 한나라당을 탈당해 민주당에 입당하기 전까지 오랜 세월 손 대표는 민주당의 '반대편'에 있었다. 그러다보니 흠을 내기로 마음 먹고 찾자면 뱉어 놓은 말도 많고, 어지러운 행보도 많다.
서출인 그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당 대표로 선택된 것은 그만큼 민주당이 처한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얘기다.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로 선택된 것도 50년 만에 잡은 정권을 5년 만에 내줄 수는 없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차기대권에서 가장 유리한 자리인 대표가 된 배경에는 빼앗긴 정권을 5년 만에 다시 찾아와야 한다는, 5년 더 정권을 내줄 수 없다는 절박감이 놓여있다. 과거 한나라당과는 조금 결을 달리한 '실용적 보수정권'이 될 것이라 기대했던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감이 크다는 사실도 민주당 내에서 손 대표의 착근에 도움을 줬다.
한나라당 출신인 그가 뱉었던 말과 행동은 과거지사다. 문제는 지금이다. 민주당원들이 전략적으로 손학규를 선택했다는 것은 곧 그를 시험대에 올려놓았다는 얘기다. '한번 해보라'는 당심이 모여 주어진 대표 자리를 발판으로 '적자'로 거듭 날 수 있을까. '서자' 출신인 그에겐 더 엄격한 잣대, 더 큰 희생이 요구될 가능성이 높다. '서자'였던 노 전 대통령은 민주당 대선후보를 거쳐 대통령이 되고 이제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당의 정치적, 정신적 리더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노무현과 손학규는 '다른 사람'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감성적 정치'에 능했다면, 학자 출신인 손학규 대표는 '이성적 정치'에 가깝다. 대선 후보 경선에서 상대 후보가 '빨치산' 출신인 장인 이력을 들먹이자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라는 말입니까?"라고 치고 나가는 게 노무현식 화법이라면, "잃어버린 600만 표를 찾아오겠다"며 숫자에 근거한 정치적 목표와 전략을 제시하는 게 손학규식 화법이다. 노 전 대통령이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승부사적 기질'에 충실한 정치인이었다면, 손 대표는 '합리적 판단'을 앞세우는 사람이다. 어쩌면 손 대표가 한 가장 모험적 선택이 한나라당 탈당이었을지도 모른다.
정치인 노무현이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을 매료시켰던 자원은 '감성 화법'만이 아니다. 그 정수는 손 대표가 21일 봉하마을을 찾아 얘기했던 '진정성'이다. 대선 후보가 되기 전까지 정치인 노무현의 선택은 대체적으로 실리보다는 명분이 우선했고, 주로 지고 때로는 이기는 선거들을 치르면서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시대가 변했다. 국민들은 대통령 노무현도 겪었고, 이명박도 겪고 있다. 국민들의 눈도 달라졌다. '합리적'인, 그래서 '예측가능한' 손학규 대표가 야당의 지도자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 수 있다는 기대감이 생긴 것도 그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의 '오른 팔'로 불리는 이광재 전 강원지사가 지난 17일 손 대표에 대한 지지 선언을 하면서 밝힌 이유도 "이젠 손 대표 같이 예측 가능한 분이 대통령 되는 걸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다만 변하지 않은 게 있다. 정치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손학규 대표는 현재 이에 충실한가. '8%'라는 낮은 지지율은 아직 "그렇다"는 확신을 야권 지지자들에게 주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10월 민주당 대표가 된 직후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를 제치고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 이어 차기 대권주자 중 2위로 급부상했던 손 대표의 지지율은 계속 빠져 한때 4위까지 물러나기도 했다.
지금 정치판의 초점은 내달 27일 있을 재보선에 맞춰져 있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4월 재보선의 의미는 매우 크다. 손 대표에게도 중요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아 보인다. 국회의원과 도지사 4석 중 3석이 원래 민주당 자리였지만, 현 시점에서 어느 곳 하나 자신할 수 있는 지역이 없다. 강원도지사는 원래 한나라당 세가 강한데다 박근혜 전 대표가 측면 지원에 나섰다. 김해을은 국민참여당과 야권 단일후보 자리를 놓고 팽팽한 기싸움 중이다. 순천도 야권연대 차원에서 무공천 방침을 정했지만 민주당 후보들이 무소속 출마를 감행할 게 불보듯 훤하다. 당내 일각에서 손 대표에게 분당을 출마 압박을 가하는 이유도 그만큼 '위기감'이 크다는 얘기다.
반드시 분당을에 출마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 반드시 이번 재보선에서 이겨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재보선 과정에서 손 대표가 어떤 '메시지'를 당원과 지지자들에게 각인시키느냐다. 분당을 출마 여부와 상관없이 당내의 출마 요구에 대해 불리한 판세(지난해 6월 경기도지사 선거 당시 분당 지역에선 한나라당이 14.8% 더 많이 얻었다)를 이유로 자신에 대한 흔들기로 규정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친다면, 김해을과 순천에서 꼬인 야권연대를 현명하게 풀어내는 모습을 보이는데 실패한다면, 결과적으로 이기더라도 대권후보 손학규에게 크게 득이 될 것은 없다. (물론 이럴 경우 이기기는 힘들어 보인다.)
반대로 실제 승패와는 별개로 이번 재보선에서 손 대표가 당원들과 지지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무엇인가를 보여준다면 민주당의 리더로서 그의 위상은 달라질 것이다. 때론 '지는' 선거가 '이기는' 선거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노 전 대통령의 2000년 부산 출마가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처럼.
하나 더 덧붙이자면, 그 과정이야 어쨌든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는 이번 재보선에 '올인'했다. 유시민다운 '악착스러움'으로.
▲ 22일 유시민 국민참여당 신임 대표가 손학규 대표를 방문해 악수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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