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할랄 보드카'
도광양회(韜光養晦)는 백년대계이다. 100년이 못되어 흑해 원정에 성공한다. 1783년 크림반도를 얻었다. 170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80년 만이다. 북해는 여전히 추웠다. 겨울이면 바다가 얼었다. 하염없이 오로라만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다. 기어이 남해를 뚫었다. 얼지 않는 항구를 얻었다. 서유라시아에사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1475년 이래 400년 만에 지중해의 세력 전이가 벌어졌다. 오스만제국이 아프리카-아시아-유럽의 삼대륙에 걸쳐 구축한 '이슬람의 집'의 한 모퉁이가 처음으로 떨어져나간 것이다. 즉 오스만의 쇠락을 촉발한 것도 서유럽이 아니다. 흑해를 마주하고 있는 북방의 신흥세력, 러시아였다.
신상태(New Normal), 백년전쟁이 이어졌다. 19세기 내내 오스만과 러시아는 쟁투했다. 공식적인 전쟁만 열 차례가 넘는다. 러시아가 공격수였고, 오스만은 수비수였다. 남진하는 러시아의 공세에 오스만은 방어에 급급했다. 18세기 크림반도에 이어 19세기에는 발칸반도의 판세도 뒤집는다. '이슬람의 집'에 속해있던 정교도들이 속속 러시아 제국으로 기울었다. 오스만제국에서 독립한 발칸국가들, 그리스와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몬테네그로 등등이 모두 정교국가들이다. 즉 '동방문제'로 일컬어졌던 19세기 러시아와 오스만의 결투는 비단 지정학적 경쟁으로 그치지 않는다. 일종의 종교전쟁, 문명의 충돌이었다.
흑해와 카스피 해로 진출함으로써 러시아는 더더욱 제국의 성격을 보태었다. 하드파워만 세진 것이 아니다. 소프트파워가 신장했다. 새로이 복속된 러시아의 남부는 이슬람세계의 북변이었다. 러시아의 제국사보다 이슬람의 문명사가 더 유장하다. 이슬람이 온축한 문명 유산이 코카서스 도시들에 축적되어 있었다. 모스크와 마드라사를 통하여 아랍어 공론장의 지식과 사상이 유통되었다. 이슬람의 빼어난 학술과 예술, 과학과 법학과 신학이 러시아어로 번역되었다. 즉 이슬람의 고급문화를 흡수함으로써 19세기 러시아는 최량의 지적 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지금도 러시아 학계는 무슬림 지식인의 비중이 높다. 즉 18세기의 상트페테르부르크처럼 서유럽으로만 난 창만 있던 것이 아니다. 19세기에는 남대문도 크게 열렸다. 그 이슬람 연결망을 흡입함으로써 러시아는 인도양으로 태평양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20세기 소련은 발칸반도부터 동시베리아까지 광대한 이슬람세계를 관장하게 된다. 소비에트인의 1/4이 무슬림이었다. 오늘날에도 러시아인 가운데 2000만 명이 무슬림이다. 모스크바에는 무려 200만의 무슬림이 살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많은 무슬림이 거주하는 도시가 바로 모스크바이다. 20세기에는 '민중의 아편', 종교를 지움으로써 정교세계와 이슬람세계를 아우르려고 했다. 그러나 백년도 못 가 고꾸라졌다. 천년 문명이 백년 혁명을 뒤엎었다. 2015년 9월, 모스크바에 세계 최대의 모스크가 들어선다. 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개장식에는 푸틴과 터키의 에르도안이 함께 자리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압바스 의장도 참가했다. 새 천년과 다른 백년, 정교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공존체제를 다짐한다.
그 신시대(新時代)의 맹아가 싹튼 곳이 타타르공화국이다. 몽골계 무슬림, 타타르인의 고향이다. 모스크바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이틀이 지나면 타타르의 수도 카잔에 이른다.
첫날밤부터 진풍경을 목도했다. 꿀꺽꿀꺽 삐보(맥주)를 들이킨다. 꿀떡꿀떡 보드카도 삼킨다. 도프를 두른 것을 보면 무슬림이 분명하건만 알코올을 마다하지 않는다. 작년 6개월, 이슬람세계를 견문하며 금주를 했던 일이 억울할 지경이다. 술을 마셔도 되나요? 동그랗게 눈을 뜨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답변이 걸작이다. '할랄 알코올'이란다. 술병을 아무리 훑어도 할랄 로고 보이지 않는다. 껄껄껄, 파안대소한다. '스탈린의 축복'이라는 것이다. 소련시절 강제적인 세속화가 단행되면서 '무슬림 문화'를 '프롤레타리아트 문화'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후진적인 종교문화를 타파하고 선진적인 계급문화를 이식시킨 것이다. 금주에서 음주로, 공산주의적 근대화의 소산으로 술맛을 알게 된 것이다. 담배연기 자욱한 러시아식 선술집에는 소련시대를 아련하게 추억하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가득했다. 1991년 이후 태어난 신세대들은 재차 술을 삼간다. 탈소련, 탈공산화가 재이슬람화로 귀의하고 있는 것이다.
2. 모스크바와 이스탄불 사이
볼가강과 우랄산맥은 유라시아를 동서로 나누는 천연 경계이다. 이 자연의 가로막을 넘어서 서쪽으로 쭉쭉 뻗어나간 이들이 몽골인이고, 그 길을 되밟아서 동쪽으로 팽창해간 이들이 러시아인이다. 볼가가 러시아의 '어머니의 강'이 된 것도, 우랄이 '러시아의 척추'가 된 것도 몽골의 유산인 셈이다. 서쪽에 뿌리를 내린 몽골계 타타르는 남쪽에서 전도된 이슬람을 수용했다. 타타르는 곧 투르크인, 북방초원을 가로지르던 돌궐의 후예이다. 이들이 서쪽으로는 터키부터 동쪽으로는 신장 위구르까지 널리 산포했다. 사이에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르기지스탄, 아제르바이잔 등이 자리한다. 대부분이 투르크어를 사용하고 케밥과 양꼬치를 먹으며 알라를 믿고 살아간다.
그 투르크-유라시아세계의 한복판에 자리한 도시가 카잔이다. 유럽과 중동과 아시아를 잇는 교통의 십자로에 위치한다. 일찍이 볼가 강을 통한 중계무역이 발달했다. 북방의 러시아 상인과 남방의 아랍 상인들이 교류하는 최적의 입지조건을 누렸다. 특히 이스탄불과 모스크바를 매개했던 모피 무역이 유명하다. 경제적 번영은 문화적 활기로 이어진다. 이슬람 학문과 교육의 중심지였다. 곳곳에 도서관과 마드라사가 들어섰다. 16세기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르네상스를 이끄는 거점 도시였다. 바로 이곳에서부터 이슬람이 초원세계 전역으로 확산되어간 것이다. 알타이와 만주, 연해주, 시베리아까지 이슬람 교인과 무슬림 상인이 퍼져나갔다. 즉 투르크와 접속함으로써 이슬람은 아랍의 지역문명에서 세계문명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카잔은 유라시아의 이슬람화와 투르크화를 선도하는 전위였다. 그 카잔을 복속시킴으로써 러시아는 제국으로 굴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툴렀다. 다문명세계를 조화롭게 경영하지 못했다. 도리어 감시하고 통제했다. 19세기 후반 무슬림을 관리하는 기구를 우파에 세운다. 개종할 것인가, 토지를 헌납할 것인가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징역과 과세 또한 과도했다. 무슬림들은 차르에 마음을 주기가 힘들었다. 오히려 오스만의 칼리프에 기댄다. 마침 오스만 또한 크림반도와 발칸반도의 영향력 상실을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통하여 만회하려 들었다. 부하라에서는 오스만 칼리프의 가계에서 군주를 영입했다. 칭기스탄 혈통의 군주만 인정하던 전통적 왕권관념을 떨쳐내고 이슬람 권위에 기초한 통치이념으로 옮아간 것이다. 몽골의 혈연적 정통성에서 이슬람의 문명적 정통성으로의 이행이야말로 중앙아시아의 '근대화'였다. 이웃한 동투르키스탄에도 변혁이 일어난다. 대청제국의 카슈가르에도 무슬림 정권이 들어선 것(1861~1867)이다. 오스만에서 무기와 군사고문단을 지원받은 야콥 벡은 금요예배마다 이스탄불에 계시는 칼리프의 이름을 외웠다. 서당을 짓고 한문교육을 강제하는 '대청제국의 근대화'와 성당을 세우고 정교도 개종을 강요하는 '러시아 제국의 근대화'에 맞서서 '오스만제국의 근대화'에 투신했던 것이다. 천자와 차르보다 칼리프가 믿음직스러웠다.
19세기 말부터 중앙아시아에서 이스탄불로 순례 가는 행렬이 부쩍 늘어난다. 1908년 오스만제국은 카슈가르와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등 초원에서 메카로 순례를 가는 철도도 개통시켰다. 지중해를 누비던 오스만의 군함들이 벵골 만까지 진출한 것도 20세기 초이다. 유럽의 식민지로 전락한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해양 무슬림들에게도 칼리프의 위용을 과시한 것이다. 즉 19세기를 서세동점으로만 파악하는 것 또한 일면적이고 일방적이다. 오스만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서유라시아를 호령하던 칼리프의 영향력을 동유라시아의 초원길과 바다길로 확산시키고자 분투한 시기이기도 하다.
제 1차 세계대전은 남러시아와 북오스만에 살아가는 무슬림들에게 곤혹스러운 사태였다. 차르와 칼리프 사이 선택을 강요당했다. 러시아 신민으로서 오스만 병사들과 맞닥들인 무슬림이 적지 않았다. 종교적으로는 이슬람이었고, 혈통적으로는 투르크계였다. 특히 오스만은 1차 대전을 성전(지하드)으로 선전하면서 전 세계 움마의 지원을 호소했다. 무려 100만의 무슬림이 러시아 제국에서 오스만제국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피난 이후에도 파란이 그치지 않았다. 1917년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고, 그 공산주의=세속주의 혁명의 파장 속에서 오스만은 패망하고 칼리프는 폐지된다. 신오스만주의도 범이슬람주의도 폐기처분한 세속주의 터키공화국이 들어선 것이다. 실망과 낙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가스프린스키가 거점으로 삼은 곳이 바로 카잔이다. 세속의 중심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영혼의 중심 메카를 잇는 성/속의 가교로서 카잔을 자리매김했다. 카잔이야말로 현대문명과 고전문명, 유럽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혼합되는 이슬람 계몽주의의 실험장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코란>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한편으로 러시아어 학습도 강조했다. 러시아어를 통한 과학 수용이 이슬람 문명과 별개라고 여기지 않았다. 바쿠와 카잔과 타슈켄트를 순회하며 무슬림 대회를 개최한다. 러시아 제국과 이슬람세계를 동시에 조망하는 독특한 관점으로 투르크-무슬림 공론장을 창출해 낸 것이다.
<안녕의 나라의 무슬림>이라는 소설도 발표한다. 1906년에 발간되었으니, 러일전쟁 패배 직후에 출간된 셈이다. 1907년에는 카이로까지 방문하여 아랍 지식인들과도 접촉한다. 아프리카부터 아시아까지 세계 무슬림 대회를 개최하자고 제창했다. <안녕의 나라의 무슬림>은 아랍의 이슬람 개혁을 이끌었던 잡지 <등대>에도 게재된다. 페르시아어로 번역된 것은 1915년이다. 투르크어와 아랍어와 페르시아어가 공진화하는 움마의 공론장으로 진화해 간 것이다. 작품의 문학적 완성도가 높지는 않다. 교육적 목적을 위한 계몽소설, 유토피아 소설이다. 무대로 설정한 곳은 스페인 산자락의 도원향이다. 안달루시아를 지배하며 고도의 문명을 일구었던 이슬람의 황금시절을 상기시킨 것이다. 당장 견주어볼 작품으로 캉유웨이의 <대동서>가 떠오른다.
3. 이슬람 문명과 공산혁명 사이
청년 레닌이 교육받은 도시가 바로 카잔이다. 카잔연방대학교에는 레닌 동상이 여전하다. 그러나 <레닌 전집> 어디를 살펴도 카잔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는다. 이슬람에 대해서도 무지했던 것 같다. 다른 문명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던 것이다. 트로츠키가 유배된 곳 또한 카자흐스탄이었다. 그러나 자서전에도 일절 언급이 없다. 이슬람 공동체와 무슬림 유목민에 대한 상투적인 감상조차 부재하다. 현장에 무심했던 것이다. 그들이 유념한 곳은 오로지 유럽이었다. 산업문명이 발달한 서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일어나기만을 학수고대했다. 그들이 섬겼던 공산주의 태두 마르크스부터 역력했던 바이다. 무굴제국을 식민지로 삼은 대영제국의 사명을 극찬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옹호한 좌파 오리엔탈리스트였다. 일선을 그은 이가 스탈린이다. 제국의 변방 조지아 출신이었다. 흑해부터 시베리아까지 무슬림의 존재를 인지했다. 소련의 속성이 '붉은 몽골제국'이라는 점도 직시했다. 다민족, 다문명을 아우르는 체제를 건설해야 했다. 오매불망 유럽 혁명에 대한 기대를 접는다. 일국사회주의를 표방한다. 소련을 통합하고 통솔할 민족이론부터 입안한다. 이슬람의 움마를 해체하여 민족 단위로 분리시키는 자치공화국 건설이 핵심이었다. 문명적 정체성에서 계급적 정체성으로 가는 중간단위로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한 것이다. 중세적 정체성(움마)에서 현대적 정체성(프롤레타리아트)으로 이행하는 근대적 정체성(민족과 국민)을 고안한 것이다. 1930년대 악명 높은 강제이주 정책과 무연치 않다. 소련식 분할통치를 실시했다.
이 쟁쟁한 지도자들과 척을 진 인물이 한 명 있었다. '이슬람 공산주의자'를 자처한 술탄 가리에브(Султан-Галиев)이다. 우랄의 산골짜기 마을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 마드라사에서 이슬람 고전을 공부한다. <코란>을 암송하고 샤리아도 습득했다. 아랍어(문명어)와 타타르어(민족어)에 러시아어(국제어)도 섭렵했다. 그가 유학한 장소 또한 카잔이다. 카잔의 신방식 학교였던 타타르 사범학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했다. 졸업 후에는 우파의 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한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숙독하며 정교 사회주의를 공부했다. 자연스레 공산주의에 이르는 이슬람의 길을 숙고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국가와 혁명'보다는 '문명과 혁명'을 궁리했다. 이슬람과 공산주의를 결합시키는, 고전문명과 현대문명을 합작시키는 '거룩한 혁명'을 탐구했다. 새로운 문물과 회통시킴으로써 이슬람의 진리를 더욱 자명하게 익히는 과정이야말로 혁명이었다.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나자 카잔에서 무슬림 사회주의자 위원회를 창립한다. 카잔과 우파에서 발간되는 간행물에 러시아어와 타타르어로 정력적으로 투고한다.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곧장 공산당에 투신한다. 그러나 입당 이후가 병통이다. 고난의 행군이었다. 논쟁의 연속이었다. 투쟁의 지속이었다.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에 이의를 제기했다.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에 반론을 제시했다. 이슬람세계의 영구혁명을 도모했다.
러시아혁명에 대한 이해부터가 달랐다. 혁명의 성공에는 종교인들의 기여가 다대했다. 정교의 고의식파만 가담한 것이 아니다. '민간 이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수피교단의 신자들도 대거 참여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입을 닦고 손을 씻었다. 권력을 독점하고 과거사를 다시 썼다. 러시아혁명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라고 선전했다. 술탄 가리에브는 '유사 역사학'을 비판했다. 애당초 도시 노동자는 혁명의 주체가 아니라고 했다. 노동계급에 대한 환상을 거두라고 했다. 그들은 식민지 노동자들과 국제주의를 실천하기는커녕 자국의 자본가들과 협력하여 경제적 이익을 취할 것이라고 했다. 사회민주주의에 타협하고 제국주의 국가에 충성할 소인들이라고 갈파했다.
그보다는 세계체제의 주변부인 러시아, 그 러시아에서도 주변부인 이슬람세계에 주목하라고 했다. '이중적 주변'으로서 무슬림이야말로 혁명적 주체가 될 수 있었다. 과학적 이성과 신학적 영성을 별개라고 여기지 않았다. 변혁적이되 중용을 취했다. 극단으로 기울지 않음으로써 가장 근본적일 수 있었다. 종교탄압이 아니라 종교개혁을 추구한다. 보수적 울라마로부터 이슬람을 떨쳐냄으로써 이슬람을 혁신시키려고 했다. 교단의 종교가 아니라 생활종교로 탈바꿈 시키려고 했다. 이슬람의 법학과 마르크스의 사회과학을 접목시키고자 했다. 인생을 과학적 수행으로 이끌고자 했다. 과학적 수련을 통하여 체제의 혁명과 마음의 혁명을 동시에 이루고자 했다. 움마는 민족으로도 계급으로도 분해되지 않는다고도 했다. 계급투쟁 없는 소비에트 혁명을 추구했다. 이슬람은 초계급적이고 초민족적이며 초국가적이며 탈영토적인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을 통하여 공산주의에 이르는 길, 복합혁명론을 제창했다.
볼셰비키는 비웃었다. 코웃음을 쳤다. '채식주의적 공산주의자'라고 비아냥거렸다. 1920년 타타르 자치공화국을 일방으로 선포해버린다. 공화국의 요직은 타타르인의 몫이 될 수 없었다. 신(新) 울라마에 불과한 이슬람 공산주의자들에게 권력을 나누어줄 수 없었다. 모스크바에서 훈련된 과학적 공산주의자들이 카잔을 접수했다. 토착 무슬림들의 눈에는 '적색 제국주의'가 아닐 수 없었다. 배타적인 슬라브 민족주의자들이었다. 러시아인들이, 유럽인들이 타타르의 땅을 점령한 것이다. 그들이 북아프리카부터 동시베리아까지 연결된 투르크-이슬람 연결망을 차단시키려 들었다. 오로지 모스크바만 섬기라는 것이다. 그 봉쇄된 공화국 내부에서 계급투쟁 또한 격화시켰다. 민족과 계급으로 움마를 조각조각 분쇄시킨 것이다. 모스크는 폐쇄되고 마드라사는 폐교되었다. 불경하고 불손한 혁명이었다. 문명을 해체시키는 폭력이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알라를 부르는 성심으로 술탄 가리에브가 저술한 책이 <사회혁명과 동방>이다. 1919년에 출간된다. 재차 혁명의 주체는 이익을 탐하는 계급이 아니라 이해관계를 넘어 사고하고 기도하는 무슬림이라고 했다. 코민테른과는 별개의 '무슬림 외교부' 창설도 요청했다. 무슬림 소비에트에 기초한 '식민지 인터내셔널'을 도모해야 소련이 전 세계에 영감을 줄 수 있다고 했다. 동방혁명의 거점을 카잔으로 옮겨야 한다고도 했다. 카잔을 소련의 제2수도로 삼자는 것이다. 카잔의 자매도시로는 바쿠와 우파와 타슈켄트를 거론했다. 바쿠는 서아시아 무슬림 소비에트의 거점이 될 수 있었다. 우파는 중앙아시아 무슬림 소비에트의 근거지가 될 수 있었다. 타슈켄트는 남아시아와 동시베리아의 무슬림 소비에트로 확장될 수 있었다. 카슈가르, 카불, 델리, 부하라, 테헤란, 이스탄불, 카이로 등등 이슬람 도시 네트워크를 통하여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전복시키자는 것이다. 런던과 파리와 베를린과 뉴욕에서는 절대로 공산혁명이 일어나지 않음을 장담했다.
호언은 허언으로 그치지 않았다. 실천에 나선다. 1920년 바쿠에서 동방제민족대회를 유치한다. 1922년 카잔에서는 우랄-불가 지역의 이슬람화 1000주년을 기념하는 공식행사도 열었다. 열렬하게 호응하는 무슬림 청년들이 많았다. 1923년 카잔대학교 학생 가운데 타타르스탄 출신은 1/3 뿐이었다. 우즈베키스탄, 조지아, 카자흐스탄, 신장 위구르, 아프가니스탄 등 유라시아 무슬림 공산주의자들의 해방구였다. 카잔에서 발간되는 신문과 잡지가 투르크어, 타타르어, 아랍어, 페르시아어로 번역되어 북아프리카부터 동남아시아까지 유통되었다. 동유라시아에 연안이 있었다면, 서유라시아에는 카잔이 있었던 것이다. 1924년 칼리프 폐지 또한 호기로 삼았다. 이스탄불이 수행했던 이슬람세계의 중심 역할도 카잔이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카잔이야말로 과학과 신학이 공진화하는 '거룩한 혁명'의 발원지가 될 수 있었다.
1991년 소련 해체 당시 타타르스탄에는 모스크가 20개 남짓에 불과했다. 1917년 혁명 당시에는 2200개였다. 2017년 현재 다시 2000여개로 회복되었다. 정교가 부활한 것처럼, 무슬림 또한 귀의한 것이다. 혁명에서 문명으로, 21세기의 대반전이다.
4. 예언자
카잔의 무슬림 공산주의자가 처형되던 1940년, 연안의 마오쩌둥은 '신민주주의론'을 발표한다. 사회주의에 이르는 중국의 길을 창도했다. 소련의 노선을 답습하는 당료들을 쳐내고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에 시동을 걸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해, 세계 최대의 무슬림 국가 인도네시아에서도 이슬람의 원리를 헌법에 명시한 신생 공화국이 출범한다. 발칸반도를 재통합하고 유고슬라비아연방공화국을 출범시킨 티토가 인도네시아를 찾은 것은 1955년 반둥회의였다. 반둥회의 직후 이집트의 나세르는 오스만의 해체 이래 중동을 재통합하는 아랍사회주의연방공화국을 추진한다. 1964년 프랑스를 몰아내고 알제리 혁명을 이끌었던 아메드 벤 벨라가 열독했던 인물 또한 술탄 가리에브였다. 물질개벽에 눈 먼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정신개벽을 염원하는 무슬림을 혁명의 주체로 내세웠다. 응당 소련을 흠모하고 프랑스를 사모하는 알제리 공산주의자들은 배제되었다. 서구와 동구를 선망하는 알제리 공산주의자들의 뒤틀린 의식세계를 정신분석학적으로 탐구한 이가 프란츠 파농이다. 그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을 페르시아어로 번역한 이가 이란의 샤리아티이다. 호메이니가 파리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 샤리아트의 번역을 통하여 파농을 읽는다. 그리고 1979년 테헤란으로 복귀하여 이슬람 혁명을 성공시킨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은 곧장 국경을 접한 소련까지 충격파를 던졌다.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공화국들이 동요했고, 그 파장을 차단하기 위하여 1979년 아프가니스탄에도 개입했던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은 결국 소련의 무덤이 되었다. 적색 제국주의에 맞서는 유라시아 무슬림들이 카불에 총집결하여 소련을 좌초시켰다. 소련군이 철수한 1990년, 이슬람 공산주의자 술탄 가리에브의 명예는 공식적으로 회복된다. 이듬해 소련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술탄 가리에브의 유산은 이슬람 공화국들의 분리 독립으로 그치지 않는다. 2002년 터키에서 집권한 에르도안이 그의 후예를 자처한다. 20세기 터키의 세속주의, 적폐를 청산한다. 신오스만주의와 범이슬람주의와 범투르크주의를 조합하여 유라시아의 투르크-이슬람 세계에 매력 공세를 펼친다. 중앙아시아의 재이슬람화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있는 나라가 터키이다. 그리하여 모스크바의 대모스크 개관식에도 에르도안은 푸틴과 나란히 설 수 있었다. 러시아 제국과 이슬람세계를 동시에 사고하고 실천했던 '술탄 가리에브주의'가 귀환하고 있는 것이다. 모스크바와 이스탄불을 두루 아울렀던 선지자로서 칭송받는다. 21세기 신상태와 신시대를 예비한 예언자로서 추앙받는다. 고로 신유라시아주의는 러시아 일국의 국시가 아니다. 터키도 신유라시아주의로 합류하고 있다. 숙명의 앙숙이었던 러시아와 터키가 의기투합한다. 양 제국 사이 곤혹스러웠던 중앙아시아 국가들도 동참한다. 그 중 선두가 중앙아시아의 대국, 카자흐스탄이다. 카잔을 떠나 아스타나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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