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리를 보는 사람들(소보사)'과 함께 살고 있다. 내 귀에 들리는 소리를 그들에게 보여주기도 하고 그들이 보여주는 소리를 눈으로 듣기도 하면서 살아온 지 20년째다.
고등학교 때 동아리에서 수화를 배우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또래 농아 친구들을 만났다. 같은 하늘 아래 사는 같은 나이의 그들이 나와는 그토록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남들은 당연히 혹은 억지로라도 가는 대학을 그들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고, 아무리 꿈을 꾸어도 그들에겐 그야말로 꿈일 뿐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모순되고 부조리한 세상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이어갔고 그런 틈에 나는 대학에 진학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수화통역사 자격증을 따서 부지런히 농인들을 만나러 다녔다. 그렇게 수화를 열심히 배우고 농인들을 만나러 다닌 이유는 딱 하나였다. 내 10대의 마지막을 함께했던 농청소년들에게 돌아가기 위해서….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이제 사회는 변해갈 거라고. 너희와 대화하기 위해 수화를 배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이제 너희는 그저 너희답게, 그렇게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그렇게 함께 울고 웃고 싶어서 오랜 시간 동안 수화 실력을 키웠다. 그리고 드디어 다시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농청소년들과 함께하다
그러나 다시 만난 농청소년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인공 와우 수술 후 비교적 잘 듣고 잘 말하는 아이들은 분명히 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장애를 부끄러워했다. 구화(口話, 입으로 대화하는 법) 연습을 강요받는 그들에게 수화는 남들이 쳐다볼 때 절대 사용하면 안 되는 언어였다. 어떻게든 장애를 숨기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참아야 할 것도, 포기할 것도, 남들보다 더 애써야 할 것도 참 많았다. 어른들은 이것을 '장애 극복'이라고 했지만 그들은 그 말 뒤에 숨어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해야만 했다. 오랜 시간 수화를 쓰지 못하도록 강요받은 아이들은 내가 수화를 해도 알아보지 못했고, 어떤 방법으로도 소통이 잘 안 되었다. 사춘기를 맞은 아이들은 그 복잡하고 수많은 생각들을 전달할 수 없어 가슴에 답답함이 쌓였고 머릿속에 고여 있던 생각들은 점점 작아졌다.
부모와 어린아이가 길을 가다 개미를 발견했을 때, 대부분 이런 대화를 나눌 것이다. "개미네. 아주 작고 귀엽다. 그치? 지금 어디 가는 걸까? 개미한테 안녕, 잘 가 인사하자." 그러나 농아 자녀를 둔 부모님들의 반응은 조금 다르다. "개미. 개미. 따라 해봐. 개! 미!" 아이가 멀뚱멀뚱 쳐다보면 한 번 더 반복한다. "개미. 개미. 이건 개미야. 말해봐. 개미!" 다른 아이들은 개미를 관찰하고, 개미와 대화하고, 개미가 어떻게 생겼는지 대화를 나눌 시간에 부모와 농자녀들은 '개미'라는 두 음절을 발음하는 데 노력을 쏟는다.
아이가 '물'이라는 발음을 잘하기 전에는 물을 주지 않았다는 어머니의 이야기, '철렁하다'는 단어를 가르치기 위해 계단에서 아이를 밀어본 적이 있다는 어머니까지. 많은 부모들은 아이를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과 눈물을 쏟았다. 그 마음이야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마는, 이러한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농아동들은 듣지 못하는 대신 손짓이나 표정을 활발히 써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손을 쓰지 못하게 붙들리고,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내야 하는 상황을 반복해서 겪는다. 자신의 귀에는 잘 들리지도 않는데, 뭐라도 소리를 내면 칭찬을 받는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아이들은 하나의 사실을 마음에 각인시킨다. '아, 나는 비정상이구나. 정상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하는구나.' 이러한 마음은 아이들에게 장애를 극복할 동기가 되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실패의 경험 속에서 살게 한다.
어려서부터 가장 가까운 부모와도 제대로 소통이 되지 않는 아이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신을 부정하며 목소리 내는 법에 많은 시간을 쏟아붓고 있는 아이들을 다시 만났을 때, 난 너무나 절망적이었다. 수화는 그들의 삶에서 죽은 언어가 된 지 오래였고, 아이들은 이루어질 수 없더라도 한 번쯤 품어볼 법한 꿈마저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농청소년들을 다시 만나며 나는 결심했다. 소리를 보는 사람들, 소리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는 공동체를 만들자. 함께 살아가며 이 아이들에게 늘 말해주자. "넌 너무 정상이야. 넌 전혀 문제가 없어."
그렇게 시작된 소보사는 초기에는 수화를 잃어버린 아이들, 꿈을 잃어버린 아이들의 놀이터 역할을 했다. 겉으로는 공부방이었지만 일단 오면 한 시간은 먹고, 그 후 30분은 뜸을 들이다가 30분 정도 수화로 공부 비슷한 걸 흉내 내는 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모두가 안 된다고 했다. 부모님도 학교도 반대하는 걸 왜 굳이 시민단체에서 하느냐고, 아무도 모이지 않을 거라 했다. 하지만 카카오톡도 소셜네트워크(SNS)도 없던 그 당시 순전히 농학생들의 (입소문 아니라) 손소문으로 소보사에 아이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다녔다. "야! 거기 가면 완전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 모이면 수다만 두 시간 떨다 집에 돌아갔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니 아이들은 궁금한 게 생겼다. '왜?'라는 질문을 처음 시작하더니, 엄청난 집중력으로 그간의 모든 호기심을 쏟아냈고 소보사의 여러 스텝들은 부지런히 수화로 모든 질문에 답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공부로 연결되었다. 방학이 되면 한 달간 아이들끼리 준비해 여행을 떠났고, 연말에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농학생들을 모아서 온종일 놀다 흩어지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우리가 함께 나눈 대화 주제는 10년 동안 한결같았다. "우리는 농인이다! 우리는 수화라는 언어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농인인 것이 자랑스럽다!"
소보사가 하려는 일
소보사가 하려는 일은 단순하다. 건강한 농정체성을 확립시켜주는 것이다. 자존감, 정체성의 확립은 누구에게나 아주 익숙한 주제다. 농정체성 역시 그와 같다. 농인으로서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 그리고 농인답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건강한 농정체성이다. 듣지 못하고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듣는 방법, 말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자연스러운 언어, 수화를 사용하면 농아동들은 여느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자랄 수 있다.
농아동들을 만나다 보면 이들이 '어릴 적부터 청인(일반인)들처럼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언어를 배우고 세상을 알아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태어나자마자 농인 아기의 눈에 많은 말들을 손으로 보여주면 아이들은 신기하게 청인 아동의 언어발달 시기에 맞게 수화언어를 습득한다(청인인 우리 아들은 수화로 옹알이를 하기도 했다!).
10년 넘게 농아동들을 만나면 제일 먼저 그들이 잃어버렸던 언어를 되찾아주는 일부터 시작했다. 수화를 전혀 익히지 못한 아이들도 6개월 정도 지나면 아주 빠르게 자신의 '모국어'를 부여잡는다. 문법과 언어 체계가 전혀 다른 언어. 음성언어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언어. 그 언어는 오롯이 농인들의 것이다. 정상인이 비정상인들을 위해 만들어서 베푼 보조수단이 아니다. 이 언어를 발견한 아이들은 오래 잠들어 있던 자기 지성에 눈을 뜨게 된다. 그럼 다음 공부는 아주 쉽다. 아이들에게 수화라는 언어를 허락하면, 생각이 자라고 그 힘으로 꿈을 꾼다. 공부를 잘하게 되는 건 덤이다!
오랜 시간 특수학교에서는 수화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교사들이 많지 않았다. 부모들이 구화를 원하기도 했고, 인공 와우 같은 의료의 발달로 예전만큼 열심히 수화를 익힐 필요가 없어졌다는 현실을 반영해야 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수화를 허락하지 않는 것, 교육 현장에서 수화가 소극적이고 보조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것에는 아주 무섭고 무지한 생각이 숨어 있다. 장애라는 것은 '비정상'이며 다수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다. 장애는 질병이므로 어떻게든 고쳐야 한다는 병리적인 관점은 교육을 '배움'이 아닌 '치료'로 변질시켰다. 있는 모습 그대로 아이들을 받아들이기는 정말 어려운 걸까? 아이들이 계속 손으로 말하면 정말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는 것일까? 수화라는 언어를 버려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인 걸까? 듣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수화를 하는 대신, 듣지 못하는 이들이 힘겹게 듣고 말해야만 살 수 있는 사회가 정말 좋은 사회일까?
북한산 아래 농아인 학교를 열다
10년간 공부방과 이런저런 농정체성 프로그램으로 아이들을 만나며 그들에게서 나는 놀라운 비밀들을 발견했다. 참되게 듣는 것, 참되게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것을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이들에게서 발견하게 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난 지금껏 농인들처럼 잘 말하고 잘 듣는 이들을 본 적이 없다. 약한 것과 강한 것이 공존하는 게 자연의 이치이듯, 우리 사회에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것도 지극히 정상 아닐까? 우리가 이들과 함께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이들의 장애 때문이 아니다. '다양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 사회가 미처 이들을 맞이할 준비를 못 했기 때문이다.
조금이나마 어른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좀 더 오랜 시간 아이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언어로 놀며 배우는 터전을 만들고 싶었다. 유년 시절의 가장 긴 시간을 보내는 학교. 그 학교에서만이라도 아이들이 자유롭게 꿈꾸도록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2017년 3월 서울 강북의 북한산 아래 우이동에 작은 대안학교를 세웠다. 소보사 대안학교에는 열 명의 농학생들이 함께하고 있다. '반짝반짝공동육아어린이집'에 다니는 네 살짜리가 막내고, 초중고 통합과정인 '봄 see&spring 배움공동체'에 있는 열여섯 살 형님이 맏이다.
그들의 사연은 가지각색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소보사에 오기 전 이들은 장애인으로 살았고 어른들은 이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여겼다. 누구는 중복장애가 있다고 했고. 누구는 이민을 가야 한다고 했으며, 누구는 ADHD 판정을 받았다. 그중 한 아이는 10년간 어떤 언어로도 소통하지 못하고 살다가 소보사에 왔는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길 없어서 화가 나면 때리고, 하고 싶은 일을 저지당하면 침을 뱉었다. 문제 행동이 아니었다. 자신을 표현하는 일종의 언어였다. 우리를 만난 첫날, 한 시간 동안 무려 열세 번 침을 뱉었다. 그러나 한 달도 되지 않아 그 아이는 침을 뱉지 않았다. '싫어요'라고 수화로 말할 수 있었고 '하지 마'라고 화도 표현할 수 있게 되면서 그런 행동을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달팽이만큼 더디게 수화를 시작한 아이는 한 학기가 지나자 '용서 구하기' 시간(하루를 닫기 전 서로의 마음에 상처 주는 일은 없었는지 돌아보고 용서를 구하는 시간)에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점심때 스파게티를 많이 먹었어.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스파게티를 못 먹었어. 욕심 나빠. 미안해요.' 교사들은 그날 난리도 아니었다. 수화로 이런 표현을 한 것도 놀랍지만, 이제 막 언어를 얻은 이 아이가 자신과 남의 마음을 돌아보게 되었다는 사실에 너무나 감격했다.
소보사에서는 농자녀를 둔 부모님들끼리의 관계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청인 부모도 있고 농인 부모도 있는데, 농인 자녀를 처음 키워보는 청인 부모님들은 농인 부모님들과 관계를 맺으며 아이의 미래를 볼 수 있고, 농인 자녀와 청인 자녀를 함께 키우는 농인 부모님들은 청인 부모님들과의 소통 속에서 청인들의 문화를 알아간다. 두 가지 문화를 수용하는 것은 참 어렵지만 공동체 안에서 가족으로 만나 교류하면 수많은 이론보다도 빠른 도움을 주고받는다.
장애를 바라보는 이 사회의 시선
소보사의 아침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책으로 시작된다. 학교 뒷산, 북한산 둘레길, 동네 공터 여기저기를 산책하며 밤사이 쌓인 복잡한 감정을 다스린다. 소보사에는 수화 이야기, 수화로 책 읽기, 농사회 투어 등 청각장애 특수학교에서조차 없는 과목들이 있다. 올해 처음 모인 열 명의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업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언어로 정리하여 표현하는 것이었다. 오랜 시간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를 익혀야 했던 아이들. 그래서 소보사에서는 날적이(일기)도 수화로 쓰고, 구화 실력이나 한국어 실력이 아이들의 가치를 평가하는 척도가 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아이들을 살핀다. 시끌벅적한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지금도 이따금 눈물이 난다. 이토록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아이들이 너무도 예뻐서다.
이곳을 떠나면 아이들은 다시 자신들을 비정상이라 하는 이상한 현실에 마주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지를 소보사 안에서 잘 익혀갈 수만 있다면, 아직 준비되지 않은 세상에서의 싸움도 잘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얼마 전 특수학교 설립을 허락해달라며 이미 다 큰 자녀를 둔 어머님이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장애를 바라보는 사회의 수준이 아직 이 정도라는 게 참 서글펐다.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은 걸까? 혼자 앞서가는 것보다 천천히 가더라도 함께 행복한 것이 중요하다고 배운 것이 실현되는 사회, 모양은 달라도 그 안에 있는 본질은 같다는 단순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가 오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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