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부터 박종팔(가명) 3형제가 살던 청량리 바닥은 실향민과 전국 각지에서 상경한 민초들이 밑바닥 생활을 하던 빈민촌과 같은 곳 이었다.
가진 것도 없이 가난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살던 청계천에는 당시 거지처럼 밥을 얻어 먹고사는 거지를 비롯해 넝마주이, 좀도둑, 건달들이 기생했고, 사창가와 술집이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특히 동대문 주변에는 동대문운동장을 중심으로 한 상가가 규모를 키우기 시작하자, 전국 최대의 동대문 상권이 형성 되었다.
궁핍하던 시절에 전국 최고의 상권이 형성되자 가게를 얻을 형편이 못되는 노점상이 속속 포진하면서 노점상에게 자릿세를 뜯는 건달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은 자연스럽게 동대문 세력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노점상들은 동대문 시장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자릿세를 내야 했고, 500명이 넘는 노점상에게 챙기는 자릿세 수입이 100여 명의 건달을 먹여 살리는 젖줄이 되었다.
이곳에 ‘청계천 독사’라는 별명을 가진 한 남자는 여인숙에서 매춘업을 시작해 청계천에서 돈 좀 만지는 악랄한 포주로 소문을 날렸다.
그는 여자의 피눈물과 한숨으로 번 돈을 투자해 장안에서 가장 큰 카바레를 동대문에 차려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이렇게 번 돈으로 그는 알뜰하게 저축하기보다는 짜릿한 승부를 겨루며 더욱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경마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재산을 탕진하기 시작하였다.
몇 번 말이 우승할 거라는 ‘소스’를 전해 듣고는 베팅해서 재미를 보기도 했지만, 이런 판에 베팅했다가 더 큰 돈을 날리는 일도 잦았다.
그 뒤로 청계천 독사는 소스를 믿지 않고 전문 경마꾼들의 조언을 듣고 ‘연식’에 베팅을 시작하였다. 한동안 연식 베팅으로 몇 백만 원을 벌거나 운이 좋으면 수천만 원을 따기도 했지만 그는 이게 ‘독이 든 성배’가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나중에는 딸의 결혼자금을 경마장에서 연식에 베팅했다가는 몽땅 날리고 말았다.
마침내 딸의 결혼식 날이 밝았지만 청계천 독사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아버지 없는 결혼식을 치르며 그의 부인과 딸은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그런데 경마장에서 딸의 결혼자금을 몽땅 탕진한 청계천 독사는 그래도 마지막 남은 양심은 있었는지 결혼식 당일날 식장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관악산에서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 며칠 뒤 관악산에 나물을 뜯으러 갔던 주민에 의해 청계천 독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피눈물을 흘리며 시신을 화장한 청계천 독사의 부인은 남편의 유골을 경마장에 뿌리면서 한을 삭였다.
청계천 주변에서 이런 험한 꼴을 보고 자란 종팔의 막내동생 종혁은 자연스럽게 정글에서 맹수가 살아남는 비결을 체득하게 된 것이다.
비교적 성격이 온순한 종혁은 그러나 한 가지 일에 빠지면 끝장을 보는 성미를 가지고 있었다.
비교적 어린 스무살 나이에 사교춤의 매력에 빠진 그는 1년여 만에 부르스는 물론 지루박, 탱고, 왈츠까지 모든 스텝을 완벽하게 습득하였다.
당시 국내 사교춤은 1957년 제1회 전국 무도선수권대회가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뒤 매년 개최되었고, 이후 사교춤이 빠르게 전국에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 후반, 한양에서 종혁이를 따라갈 ‘춤꾼’이 없다는 말까지 나왔고, 웬만한 ‘제비’들도 그의 춤 솜씨에 반할 정도였다.
종혁의 형수인 A씨는 “1980년 초반 당시 종혁의 춤 솜씨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여자들이 종혁이가 다니는 캬바레에는 그와 춤을 추기 위해 줄을 설 정도였다. 특히 춤 좀 추는 돈 많은 유한마담들은 가방에 수표를 가득 담아 그에게 줄을 섰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만약 종혁이 전문 춤꾼(제비)으로 나섰으면 많은 유한마담들을 녹이고, 춤 실력으로 큰 돈 꽤나 벌었을 것 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고 전한다.
그는 또 포커와 바둑이를 배워 도박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는데, 종혁의 실력이 워낙 출중해서 친구들이 포커나 바둑이 게임을 하면 절대 끼워주지 않을 정도였다.
동대문파 주먹들과 경마장에 드나들면서 경마에 심취한 그는 어떻게 해야 베팅으로 돈을 벌게 되는지에 대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 하였다.
장안에서 악랄했던 ‘청계천 독사’가 경마장에서 전 재산 수십억을 날리고 자살까지 한 사연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연구를 통해 마대기 판(사설 경마)에서도 수억 원을 버는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당시 그는 번 돈으로 강남에 단독주택을 구입 하였고, 수 백평의 땅도 마련할 정도로 경마에 관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급 이었다.
그러나 20대 초반부터 그는 히로뽕 주사를 시작하여 그 후유증으로 종종 노상에서 옷을 몽땅 벗고는 난동을 피우는 ‘스트립쇼’를 펼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그의 형 종식은 2005년 초, 강원랜드 주변이 마약 청정지역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동생 종혁을 불러들여 그가 사북에서 재활하기를 기대하였다.
하지만 과거 히로뽕을 한 문제 때문에 종혁은 제3자가 보면 정신이상자와 같은 행동을 가끔씩 한다는 점이다.
2007년 봄, 강원랜드 VIP룸에서는 아주 희한한 소동이 벌어졌다.
VIP룸에서 게임을 하던 종혁이 돈을 다 잃자 양주를 몇 잔 마시다가는 갑자기 입고 있던 옷을 몽땅 벗어 던지고 바카라 게임 테이블 위로 올라선 것이다. 갑작스런 종혁의 행동에 주변에 있던 고객과 딜러, 고객서비스팀 직원들은 아연실색하면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예수다!”라고 말하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였다. 그러자 주변에서는 “웃기고 있네!” 하면서 실소를 금치 못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자 종혁은 대뜸 “너희들이 내가 예수가 아니라는 증거를 밝히지 못하면 내가 예수인 것이다.”하고 말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미친 사람이 따로 없구나.’ 하면서 코웃음을 치는가 하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덩치도 상당히 큰 사람이 남자의 중요 부위를 특별한 성형수술을 한 상태로 스트립쇼를 펼쳤으니 VIP영업장은 한바탕 난리도 아니었다.
종혁은 1990년대 후반, 서울 강남의 번화가인 신사동 리버사이드 호텔 교차로에서도 옷을 모두 벗어 버린 뒤 스트립쇼를 하다가 교통이 마비되는 상황을 초래하는 바람에 출동한 경찰에 의해 연행되기도 했다.
강원랜드 VIP룸에서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던 형의 그늘에서 놀던 그는 자신의 친형이 2006년 11월 마카오에서 살해된 이후 스트립쇼 사건으로 영구 출입정지를 당하면서 강원랜드를 떠났다.
한편 서울의 조폭세계를 잘 알고 있는 한 인사의 회고.
“서울의 건달들은 동대문이나 남대문을 비롯해 규모가 큰 재래시장에서 자릿세를 받아 수입을 올리기도 했지만 일부 건달들은 직접 노점상을 하며 돈을 벌기도 하였다.
동대문시장 포장마차의 경우 1980년대 권리금이 수천만 원에 달했고 천막이 씌워진 포장마차와 냉장고는 덤으로 제공되었다.
동대문에서 100원짜리 커피장사를 해도 하루에 순수입이 수십만 원 이상은 되기 때문에 자릿세도 비쌌고, 빈 자리가 나면 권리금도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상태였다.
나이트클럽을 직접 운영하는 경우도 있지만 조폭들은 폭력세계의 보호 명목으로 전무나 영업이사 자리를 독차지하고는 매월 인건비를 챙기기도 하였다.
또한 시장주변에서 하우스를 운영하기도 하고, 철거사업에 개입하는 등 이권에도 개입해 돈을 벌었다. 하지만 이렇게 번 돈으로 건달들은 히로뽕을 하거나 주말이면 경마장에 가서 경마를 즐기면서 쉽게 번 돈을 모두 탕진하거나 한꺼번에 날리기 일쑤였다.
조폭의 보스는 가족에게 생활비를 제대로 주진 못해도 동생들에게 항상 용돈을 챙겨 주거나 밥이나 술을 사는데 인색하지 않을 정도로 주머니가 두둑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건달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 대다수가 제대로 일해 돈 을 번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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