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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따뜻한 겨울, 통영은 맛있다!

2018년 1월 <섬학교 새해특집> 통영과 곤리도

겨울 통영은 어느 때보다 해산물 요리가 풍성하고 맛있습니다. 경상도 음식이 맛없다고 투덜거리던 사람들도 통영에 와서는 그 맛에 탄성을 지릅니다.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큰 전라도 사람들도 통영 음식만은 인정하길 주저하지 않습니다.

통영음식이 특별한 것은 조선시대 3백 년 동안 통영은 경상도가 아니라 삼도수군통제영이라는 특별자치구역이었기 때문입니다. 통영은 해산물 천국이지요. 겨울이 제철인 통영 굴은 알이 유독 굵고 탱글탱글한데다 우유처럼 고소합니다. 최고의 겨울 술국인 물메기국은 타락죽처럼 부드럽습니다. 온갖 해산물요리가 한상 가득 차려져 나오는 ‘다찌’는 단언컨대 한국 최고의 씨푸드입니다.

▲통영의 ‘다찌’상은 가히 해산물 천국이다. Ⓒ이상희

해산물 요리의 향연도 즐기고 윤이상, 박경리, 유치환, 이중섭, 백석 등 예술가들의 발자취도 더듬어봅니다. 동피랑 벽화마을과 내내 바다가 보이는 삼칭이 해안길도 걸어봅니다.

또 하나, 관광객에게 알려지지 않아서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 특별한 섬 <곤리도>를 찾아 갑니다. 나룻배로 10분이면 건널 수 있는 곤리도는 꾸며지지 않은 진짜 섬마을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신년 초 중부지방보다 10도쯤은 더 따뜻한 남쪽나라, 통영의 맛과 멋, 그리고 작은 섬으로의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 제67강 여행길에 초대합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2018년 1월 6(토)-7(일)일 답사지인 <통영>과 <곤리도>에 대한 설명을 들어봅니다.

통영은 경상도가 아니었다!

과거 통영은 500여 척의 전함과 3만여 명의 수군이 주둔하던 조선 최대의 군사도시였습니다. 사람들은 통영이 본래부터 경상도인 줄 알지만 오랜 세월 통영은 경상도가 아니었습니다. 1603년, “여우와 토끼가 뛰노는” 한미(寒微)한 포구였던 경상도 고성현 두룡포에 신도시 공사가 시작되었고 그렇게 탄생한 곳이 삼도수군통제영, 곧 통영입니다. 경상도 땅에 건설됐지만 통영의 수령인 삼도수군통제사는 경상도 관찰사와 동급인 종2품이었고, 통제영이 폐지된 1895년까지 독자적으로 통영과 전라, 경상, 충청 3도의 수군 주둔지들을 다스렸습니다. 통영은 3도에서 온 군사들과 군수품 제작을 위해 8도 각지에서 뽑혀온 12공방의 장인들, 그리고 전국에서 몰려든 상인들이 모여 이룬 융합도시였지요.

이들이 경상도와는 별도로 3백여 년 동안이나 독자적인 문화와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지금처럼 육로가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바다가 고속도로였으니 통영은 길이 불편한 경상도 내륙보다는 수로를 통해 경상도 해안이나 전라, 충청 등 타 지역들과 더 적극적인 문물교류를 했습니다. 군사도시인 까닭에 양반보다는 중인들이 주축이었고 장인들의 수공업과 객주, 상인들의 상업 활동이 전국 어느 곳보다 활발했지요. 많은 통영 사람들이 나전칠기, 소목, 화공 등 12공방의 일을 3백 년 동안이나 가업으로 이어오면서 그들의 몸속에는 예술적 유전자가 형성됐습니다. 음악가 윤이상의 아버지도 유명한 소목장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과 가깝고 교류가 활발했던 까닭에 서양문물이 어느 곳보다 먼저 유입될 수 있었습니다. 1914년에 이미 ‘봉래좌’란 극장이 들어섰고 1930년대는 영화사가 2곳이나 있었지요. 통영삼광영화사는 1930년에 김유영 감독의 <화륜>을, 1931년에는 이구영 감독의 <갈대꽃>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 친일연극인 유치진이나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 소설가 박경리, 시인 유치환, 김상옥, 김춘수, 화가 전혁림 등 통영 출신 예술가들이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도 모두 통제영 12공방에서 비롯된 예술적 유전자와 신문물을 일찍 수용할 수 있었던 통영의 역사, 지리적 요인들 때문입니다.

“짜장면도 맛없다”는 속설이 있는 경상도에서 통영만 유독 음식이 맛있는 이유도 통영이 경상도가 아닌 ‘통제영’이라는 특별자치구였던 데서 유래합니다. 맛이란 물산이 풍부할 때 생길 수 있는 것이지요. 배를 채우기에도 급급한 곳이라면 맛 같은 거 따질 여력이 없지 요. 척박한 지역일수록 음식이 맛없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풍요로워야 맛이 개선될 여지가 생기는 법이지요. 과거 통영은 풍요로운 땅이었습니다. 조선 최대의 군사도시였던 통영은 어느 지역보다 물산이 풍부했습니다. 정조 때는 통영에 주전소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통영에 엄청난 부가 집중됐었다는 뜻입니다.

전주의 음식문화가 발달한 것은 인근에 김제만경 평야라는 큰 들녘과 풍요로운 갯벌이 있었기 때문인 것처럼 통영 음식문화의 발전 또한 조선 최대 군사도시 통영의 물적 기반과 남해바다의 풍부한 해산물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또한 해로교통이 활발했던 과거에 수군사령부인 통영으로 각지의 물산과 문화가 자유롭고 활발하게 유입되었습니다. 풍부한 식재료와 여러 지방의 음식문화가 하나로 융합되어 통영의 음식문화가 발전했던 것이지요. 통영이 경상도 타 지역과는 차원이 다른 뛰어난 음식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입니다.

▲세파에 지친 속을 달래주는 물메기국. 타락죽처럼 부드럽다. Ⓒ이상희


해산물 요리의 알파와 오메가, 다찌

싱싱한 제철 해산물은 발품만 팔면 어느 바닷가에서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딜 가든 우리가 맛볼 수 있는 요리는 제한적입니다. 봄이면 쭈꾸미나 도다리회 한 가지만 수북하게 쌓아놓고 배가 터지도록 먹어야 하고 가을이면 대하만 질리도록 먹어야 합니다. 아무리 맛난 음식도 물리도록 한 가지만 먹어야 하는 것은 고역입니다.

맛있는 해산물을 조금씩 다양하게 맛볼 수는 없을까요. 생선회도 조금, 생선구이도 조금, 쭈꾸미도 조금, 꽃게도 조금, 멍게도, 굴도, 도다리도, 물메기도 조금씩 다 맛볼 수는 없는 걸까요. 통영에서는 가능합니다. 다찌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통영의 다찌집에서는 계절마다 제철 생선회와 해산물들이 다 있습니다. 싱싱함과 맛깔스러움, 무엇하나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경상도 음식은 맛없다는 편견을 보기 좋게 깨주는 곳이 통영의 다찌집입니다. 술을 시키면 안주는 주인이 주는 대로 먹는 술집이 다찌입니다. 다찌집에서는 그날그날 시장에 나온 식재료에 따라 메뉴가 바뀌고 계절마다 제철 음식이 나옵니다.

전주의 막걸리 골목처럼 다찌는 본래 술값만 받고 안주값은 안 받는 술집문화입니다. 대신 술값이 좀 비쌉니다. 술값에 안주값이 포함되니 그렇습니다. 하지만 안주를 생각하면 결코 비싼 것이 아닙니다. 음식만으로도 충분한 값어치를 하고도 남지요. 요즘은 다찌에서도 수지타산을 맞추기 어려워 기본요금을 받기도 합니다.

대체로 통영 사람들은 다양한 해산물 안주를 원하지만 안주를 많이 먹는 편이 아닙니다. 맛있는 안주를 고루고루 조금씩 먹는 것을 즐깁니다. 다찌 문화가 유행할 수 있는 배경이지요. 통영 사람들도 다찌의 어원은 잘 모릅니다. 통영문화원 김일룡 관장은 다찌가 “일본 선술집을 뜻하는 ‘다찌노미’에서 왔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름의 유래야 어떻든 다찌집은 통영 해산물요리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미륵산에서 바라보는 한산도 등 통영 섬들과 거제도의 풍경은 그 자체로 한 폭의 수묵화 다. Ⓒ이상희

타락죽처럼 부드러운 물메기국

물메기의 표준어는 꼼치입니다. 꼼치는 동서남해 모든 바다에서 납니다. 지역마다 그 이름도 각각이지요. 동해에서는 곰치, 물곰, 남해에서는 미거지, 물미거지, 서해에서는 잠뱅이, 물잠뱅이 등으로 칭합니다. 통영에서는 흔히 '미기' 혹은 ‘메기’, ‘물메기’라 부릅니다. 물메기는 동중국해에서 여름을 나고 겨울이면 산란을 위해 한국의 연안으로 올라옵니다. 12월에서 3월까지의 물메기가 맛있는 것은 산란을 위해 살을 찌우기 때문입니다. 보통 수명은 1년 남짓. 대부분 산란 후 죽습니다.

<자산어보>에도 물메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잡히면 버리는 하찮은 물고기가 아니라 술병까지 고치는 명약으로 대접받았다 합니다.
"고기 살은 매우 연하다. 뼈도 무르다. 맛은 싱겁고 곧잘 술병을 고친다."(정약전 <자산어보>)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우리나라 호남 부안현(扶安縣) 해중에 수점(水鮎, 물메기)이 있는데, 살이 타락죽(찹쌀우유죽) 같아 양로(養老)에 가장 좋다"고 했습니다. 옛 기록들이 아니더라도 물메기국은 그야말로 해장에 최고입니다. 물고기들이 흔하던 시절에는 지금처럼 귀한 대우를 받지는 못했겠지만 물메기 또한 어류의 가계에서 제법 족보 있는 물고기였던 셈이지요.

늦가을부터 통영은 물메기국 끓이는 철이 시작됩니다. 동해안에서는 곰치, 물곰이라고도 하는 물메기. 곰치국이든 물메기국이든 해장국으로 그보다 더 시원한 음식은 드물 것입니다. 물론 대구나 복국이 있지만 시원하고 담백하기로는 물메기국을 따라가기 힘듭니다. 지방이 아주 적고 아미노산이 풍부해 감칠맛이 납니다. 통영에서 마른 메기는 잔치음식의 대표지요. 전라도 잔치상에 홍어가 빠지면 차린 것 없단 소리를 듣듯이 통영의 잔치집에서는 마른 메기찜이 빠지면 '안꼬 없는 찐빵'이라 합니다.

물메기국은 맑게 끓여야 제 맛입니다. 너무 매운 ‘땡초’(고추)도 넣지 말아야 합니다. 팔팔 끓는 물에 무를 어하게 썰어 넣고 소금 간을 한 뒤 무가 익을 즈음에 손질해둔 메기를 넣고 익힙니다. 살이 무른 생선이니 너무 끓이지 않고 살이 익을 정도로만 끓입니다. 다진 마늘을 넣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국을 낼 때 대파를 얹습니다. 그래야 맑고 시원한 메기국이 됩니다. 양파 등 다른 채소를 넣지 않는 것도 물메기 본연의 맛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통영에서는 세파에 시달려 지친 사람들의 속을 물메기국이 달래줍니다. 술병도 곧잘 고쳐주는 물메기국의 유혹을 누군들 피해 갈 수 있으리오.

▲통영 미륵도 박경리 선생 묘소 아래 자리 잡은 박경리기념관 Ⓒ이상희

윤이상 : 유럽 5대 작곡가, 사상 최고의 음악가 44인

윤이상 선생은 1917년 9월 17일 경남 산청군 덕산면에서 부친 윤기현과 모친 김순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920년 가족들과 함께 통영으로 이주해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통영은 윤이상의 선조들이 통제영이 시작될 때부터 대대로 살았던 땅입니다. 윤이상 의 선조는 세병관을 세우는데 공헌한 사람 중 한 분이었고 증조부까지 선조들은 대부분 수군 장교로 통제영에 복무했었다 합니다. 출생지는 산청이지만 삶의 자양분을 얻고 그를 키운 고향은 통영이었습니다. 윤이상은 그의 자서전격인 루이제 린저와의 대화 <상처 입은 용>에서 고향 통영에 돌아가 노년을 보내다 그곳에 묻히고 싶다고 소망했습니다.

"어느 날 은퇴해 고향으로 돌아가 그저 조용한 바닷가에 앉아 물고기를 낚고 마음속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위대한 고요함 속에 내 몸을 뉘였으면 합니다. 또 나는 그 땅에 묻히고 싶습니다. 내 고향 땅의 온기 속에 말입니다."

하지만 그의 소박한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도천테마파크에는 윤이상의 동상이 있고 2층 전시실에는 윤이상의 흉상이 있습니다. 살아생전 그토록 고향에 오고 싶어 했으나 조국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는 회한을 품고 이승을 하직했겠지요. 그 대신 그의 동상이 고향 통영으로 왔습니다. 2층 전시실의 흉상은 평양 윤이상연구소에 있는 흉상을 만수대창작사에서 복제해 준 것입니다. 윤이상평화재단의 의뢰로 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흉상 또한 2009년 6월 인천항으로 반입됐으나 북한의 핵실험 후 정부의 반입보류 조치로 오랫동안 인천세관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가 통영예총의 탄원으로 어렵사리 통영으로 왔습니다.

윤이상의 흉상 또한 생전의 윤이상처럼 고초를 겪었으니 그는 분단의 비극을 사후에까지 온몸으로 체현하고 있는 셈입니다. 윤이상은 생존 당시 현존하는 유럽 5대 작곡가에 선정됐고 뉴욕 브루클린 음악원의 교수들에 의해 사상 최고의 음악가 44명 중 한 명으로 뽑혀 이름이 동판에 새겨지기도 했습니다. 20세기 작곡가로는 윤이상과 스트라빈스키 등 네 명뿐입니다.

서호시장 뒤편, 도천동 윤이상 생가 터에 윤이상기념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밖에서는 윤이상기념관이란 사실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건물 외부에는 기념관 간판이 없기 때문입니다. 공원 입구 표지석에는 도천테마파크란 이름만 눈에 띌 뿐이지요. 도천테마파크는 원래 윤이상기념공원으로 계획되었었는데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일부 사람들의 반대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윤이상은 동백림사건으로 간첩 누명을 쓰고 투옥생활을 했지만 후일 고문에 의해 조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져 누명을 벗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껏 근거 없는 주장으로 선생을 비난하고 욕되게 하는 이들이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윤이상기념관은 유품 전시실과 실내 공연장과 실외 공연장인 경사광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공원에는 윤이상이 살던 독일의 집 정원에서 가져온 가문비나무가 기념 식수되어 있습니다. 전시관은 2층입니다. 전시관 안에는 윤이상의 어머니가 쓰던 함지박과 호리병, 독일유학 시절 쓰던 바이올린, 친필 악보, 그가 입던 옷들과 중절모, 그가 어린 시절 썼던 요강까지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중섭의 몸 안에는 드넓은 초지가 생겼고 소떼가 풀을 뜯었다. Ⓒ이중섭

이중섭, 통영에서 황소를 그리다

이중섭이 그의 자화상 같은 <흰소>와 <황소> 등 소 연작을 그린 장소는 통영입니다. 통영에 살던 시절, 이중섭은 또 다른 대표작 <달과 까마귀> <부부> <도원> <가족>은 물론 <통영 풍경> <통영 유원지> <충렬사 풍경> 등 통영을 배경으로 한 다수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통영에는 이중섭이 머물며 그림을 그렸던 건물이 아직도 건재합니다. 이중섭은 한국전쟁 피난시절인 1952년 봄에 통영으로 와서 1954년 봄에 떠났으니 만 2년을 통영에서 살았습니다. 소련의 비평가들에게 마티스나 피카소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원산미술가동맹 위원장까지 지냈던 이중섭은 1.4후퇴 때 가족들과 원산에서 부산으로 남하 한 뒤 해군경비정을 얻어 타고 제주 서귀포에 들어가 7개월을 살았지요.

그는 1952년 다시 부산으로 나와 생계가 어려워지자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보낸 뒤 부두노동자로 전전했습니다. 그때 이중섭을 통영으로 이끈 이가 유강렬이었습니다. 후일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장을 지낸 유강렬은 당시 통영에 있던 경남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이하 양성소) 주임강사였습니다. 통영에서 이중섭의 근거지가 됐던 양성소는 통영시 항남동 241-1번지, 현재 항남목욕탕 부근입니다.

통영 시절 이중섭은 3번의 전시회를 열었는데 1952년 녹음(호심)다방에서 전혁림, 유강렬, 장윤성과 함께 <서양화 4인전>을 가졌고, 1953년 12월에는 성림다방에서 40여 점의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녹음다방 건물은 더 이상 다방이 아니지만 여전히 유치환이 이영도에게 5천 통의 연서를 보냈던 바로 그 중앙우체국 건너편에 옷가게로 변신해 존재합니다. 복자네집이나 새미집 등이 단골 술집이었는데 이중섭은 새미집 다다미방 바닥에 잉크를 부어 손으로 그림을 그리다 주인할머니의 타박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합니다.

경남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는 본래 2층짜리 청루 건물이었는데 이를 학교로 바꾼 것입니다. 청루는 기생이 있는 요정입니다. 양성소 부근이 일제 때는 청루 골목이었습니다. 이중섭은 양성소 강사가 아니었으나 늘 이 건물에 살다시피 했고 항상 스케치북을 들고 와 스케치를 했다합니다. <소> 연작과 대표작들도 이 건물에서 구상되고 그려졌을 것입니다. 통영 시절 이중섭의 작품 활동 근거지였던 양성소 건물은 1930년대 초에 지어졌지만 별 훼손 없이 원형을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1층은 식당 영업 중이고 2층은 DVD 게임랜드였다가 카페로 바뀌었으나 이내 문을 닫고 지금은 비어 있습니다. 2층의 일부는 살림집으로 이용 중입니다. 최근 주인이 매물로 내놨다는데 통영시 문화관광과에 문의해 보니 시에서는 매입해 보존할 계획이 없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이중섭(1916∼1956)이 통영 시절 완성한 <흰소> <황소> 등 소 연작은 이중섭 작업의 백미로 꼽힙니다. 이중섭은 젊은 시절부터 소에 대한 애착이 깊었습니다. 한번은 원산의 송도원 들판에서 끊임없이 소들을 관찰하다가 소도둑으로 오인 받았을 정도입니다. 아마도 이중섭이 들판에서 소를 관찰하는 동안 소들은 하나 둘씩 이중섭의 몸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했던 것이 아닐까요. 소들이 살면서 이중섭의 몸 안에는 드넓은 초지가 생겼고 날마다 소떼가 풀을 뜯었습니다. 한국전쟁 동안 피난민으로 떠도는 와중에도 이중섭은 소들을 키웠습니다. 자신은 굶어도 소들은 풀을 먹였습니다.

오랜 세월 키우던 소떼와 함께 이중섭은 통영으로 왔습니다. 통영에서 이중섭은 문득 깨달았습니다. 제 안에 기르기엔 소들이 너무 커버렸다는 사실을. 이중섭은 마침내 기르던 소들을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풀려난 소들이 이중섭의 손끝을 타고 화폭으로 마구 쏟아졌습니다. 이중섭의 화폭 위에서 흰소도, 황소도, 포효하는 소도 마구 뛰어다녔습니다. 이중섭의 소들은 여전히 살아서 펄펄 뛰고 있습니다. 이중섭이 소들을 화폭에 가두지 않고 풀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이중섭이 기르던 소떼를 대중들에게 처음 선보인 것도 통영이었습니다. 이중섭은 통영으로 왔던 1952년 통영의 녹음다방에서 전혁림, 유강렬, 장윤성과 함께 4인전을 했는데 전혁림은 그날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그날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 생생합니다.

“장윤성이하고, 유강렬하고, 나하고, 중섭이가 모여서 그림 팔려고 한 거 아닙니까? 팔렸어! 나 그림은 서울 사는 부인이 다방으로 들어오더마는 현장에서 돈을 주고 사가고 그란께 딴 사람들이, 중섭이가 혀를 헤 내밀더만. 중섭이 <소>는 딴 사람이 샀어요. 그때 돈으로 8만원이라고 하드나.” (구술집 <전혁림 다도해의 물빛 화가> 중에서)

▲통영의 대표적 달동네에서 통영의 랜드마크가 된 동피랑마을 Ⓒ이상희

마을공동체의 ‘오래된 미래’, 동피랑 벽화마을

벽화마을로 유명한 동피랑. 동피랑이 지금은 통영의 랜드마크가 됐지만 동피랑은 오랫동안 통영의 대표적 달동네였습니다. 2007년 통영시에서도 동피랑 재개발 계획을 세웠습니다. 동피랑 꼭대기에는 옛날 통영성의 세 망루 중 하나였던 동포루 터가 있습니다. 시에서는 동피랑 마을을 전부 철거한 뒤 동포루를 복원하고 그 일대는 공원으로 만들 계획이었지요.

그때 오래된 마을과 골목, 삶의 흔적들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지방의제 추진기구 '푸른통영21'에서 재개발 대신 보존을 제안했습니다. 마을을 무작정 철거하기보다는 “지역의 역사와 서민들의 삶이 녹아있는 독특한 골목 문화로 재조명 해보자”고 시를 설득했지요. 오래 되고 낡은 마을과 골목길 또한 소중히 보존해야 할 문화재라 판단한 것입니다. 사실 이런 오래된 마을이야말로 진정 살아 있는 문화재가 아닌가요. 대부분 고령인 동피랑 주민들도 마을을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정든 마을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었지요.

다행히 주민들과 시민단체, 통영시가 한마음이 됐습니다. 재개발 계획을 중단하고 마을을 보존하기로 합의한 것입니다. 낡은 마을을 새롭게 변신시키기 위해 낡고 갈라진 벽에다 그림을 그리기로 했습니다. 온 마을에 벽화가 그려지자 죽어가던 마을이 살아나기 시작했지요. 낡은 건물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은 자본이 아니다. 사람들의 손길입니다. 전국에서 몰려온 화가와 자원봉사들의 힘으로 벽화가 완성되자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사람들이 벽화와 골목길, 동피랑 언덕 아래 통영 바다 풍경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지요. 단지 채색의 옷만 갈아 입혔을 뿐인데, 그림만 그렸을 뿐인데 동피랑은 새롭게 태어났고 어느새 통영의 아이콘이 됐고 랜드마크가 돼버린 것이지요. 용역들에 의해 철거될 뻔했던 낡은 집과 오래된 골목에 벽화가 그려지면서 관광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동피랑 마을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동피랑. 통영말로 ‘피랑’은 벼랑 혹은 비탈을 뜻합니다. 동쪽 벼랑이 곧 동피랑입니다. 동피랑은 오랜 세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온 동네입니다. 지금이라고 다를까요. 동피랑의 집들은 대부분 10평 내외의 작은 주택들입니다. 골목의 어떤 집에서는 아직도 저녁마다 군불을 지펴 난방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피랑은 이제 더 이상 달동네가 아닙니다. 누구나 오르고 싶어하는 꿈의 언덕입니다. 파괴를 통한 개발이 아니라 낡고 오래된 것의 보존을 통해 이루어낸 작은 기적입니다.

▲국보 305호 세병관. 통제영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이상희

은하수 물을 끌어와 병장기를 씻다, 세병관

국보 제305호 세병관은 통영의 상징입니다. 세병관은 통제영의 객사였습니다. 객사란 본래 고려, 조선시대 관아의 중심 건물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객사의 형태가 표준화되었으며 전국에 360여 개의 객사가 설치됐었지요. 현재는 그중 10여 곳만이 남아 있습니다.

지방관청에서 수령이 집무를 보는 동헌이 높은 건물인 줄 알지만 실상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은 객사였습니다. 국왕을 상징하는 건물이기 때문이지요. 동헌은 객사 동쪽에 있다 해서 동헌입니다. 객사에는 국왕의 전패를 모셨습니다. 그래서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관리들은 가장 먼저 객사를 찾아 예를 올려야 했습니다.

세병관 현판은 36대 통제사 서유대의 글씨입니다. 세병관의 세병은 두보의 시 <세병마행(洗兵馬行)>의 ‘만하세병’이란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만하세병은 ‘은하수를 끌어와 병장기를 씻는다’는 뜻입니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安得壯士挽天河(안득장사만천하) 淨洗兵甲長不用(정세병갑장불용)
“어떻게 하면 힘센 장사를 얻어 하늘의 은하수를 끌어다가, 병기를 씻어내어 길이 사용하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

두보는 안녹산의 난(755∼763) 때 포로가 되는 등 숱한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겪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평화에 대한 바람이 그토록 간절했던 것이지요. 은하수 물로 무기를 씻는 뜻은 전쟁을 준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전쟁을 영원히 끝내기 위함입니다. 임진왜란이란 참혹한 전쟁을 겪었던 이 땅의 평화를 바라는 열망이 이 건물의 현판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달아전망대 일몰의 시간, 통영으로 귀항하는 어선들 Ⓒ이상희

내내 청보석의 바다를 보며 걷는 해안길

평지가 드문 통영에서 삼칭이 해안길은 더없이 걷기 좋은 평탄한 길입니다. 해안 침식을 막기 위해 쌓은 제방에 길을 낸 것이 통영 최고의 해변길이 됐습니다. 마리나리조트에서 영운리까지 4km를 내내 바다만 보며 편안히 걸을 수 있습니다. 흙길이 아닌 자전거길이라 조금 아쉽지만 시리도록 푸른 청보석의 바다는 그런 아쉬움쯤 잊게 해주기에 충분합니다. 무엇보다 자동차가 다니지 않으니 안전하게 걸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삼칭이란 이름은 삼천진에서 유래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이 길의 끝자락 마을인 영운리에 삼도수군통제영 수군의 주둔지인 삼천진이 있었습니다. 삼천진은 본래 삼천포에 있었으나 1619년 (광해군 11년) 영운리로 옮겨오며 삼천진이란 이름도 함께 가져왔습니다. 과거에는 진이 옮겨가면 이름도 옮겨갔습니다. 삼천포란 이름은 고려시대 개경에서 뱃길로 삼천리 거리라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삼칭이길 중간 공설해수욕장이 있는 마을은 수륙리입니다. 삼도수군통제영 시대 죽은 군인들의 원혼을 달래는 수륙제를 행하던 장소라 해서 수륙리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 바다는 얼마나 많은 영혼들의 거처인가요. 임진왜란으로 죽은 수천, 수만, 적과 아의 영혼들, 무고한 백성들의 영혼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훈련 중 많은 수군이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전복 따위 해산물 공납을 관청에 바치기 위해 물질하다 숨을 거둔 원혼 또한 부지기수겠지요. 억울하거나 죽어 마땅하거나 무관하게 아무튼 원귀가 된 영혼들을 위로하고 천도하던 곳, 수륙리. 그 원혼들의 바다가 오늘은 더없이 평화롭고 무심하고 푸르기만 합니다.

삼칭이길은 종현산(188m)이라는 아주 나지막한 산 둘레를 돌아갑니다. 바다에서 바라보면 거대한 종(鐘)을 하늘에 매달아 놓은 것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산 이름. 길가 산 밑자락 동백나무에는 동백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동백은 나무에도 피었고 땅에도 피었습니다. 동백은 두 번 핍니다. 살아서 한 번 죽어서 한번. 절정의 순간 목을 던지고 통으로 떨어지는 동백은 떨어진 뒤에도 삼사일 동안은 변함없이 붉습니다.

해안 동굴이 있는 길을 돌아서면 작은 바위섬 세 개가 명승의 풍경을 연출합니다. 둘은 바다에 있고 하나는 도로가 나면서 뭍으로 편입되어 버렸습니다. 이 바위들이 삼칭이 마을의 복바위입니다. 바위에는 애절한 전설이 깃들어 있습니다. 옥황상제의 근위병 셋이 선녀 셋과 지상에 내려와 몰래 사랑을 나누다 들켰습니다. 성난 옥황상제는 불벼락을 내려 그들을 바위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천상천하 온 우주의 주인 옥황상제마저도 눈이 멀어 사리분별을 잃게 하는 것이 질투심일까요. 오늘 나그네는 삼칭이 해안 길 끝자락에서 하염없습니다. 하늘도 하염없고 바다도 하염없고 마침내 사랑도 하염없습니다.

▲‘섬마을의 원형’ 곤리도, 들판의 주인은 염소들이다.Ⓒ섬학교

곤리도, 자동차 없는 섬

걷기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이동수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더 이상 걷기가 이동수단이 아닙니다. 취미이거나 운동이 된지 오래입니다. 몇 백 미터 거리도 걷기 싫어 자동차를 타는 사람들이 런닝머신 위에서는 몇 시간을 걷고 부러 트레일을 찾아가 수 십 킬로미터를 걷기도 합니다. 그 또한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동수단으로서의 걷기야말로 걷기의 본 모습입니다. 그런 면에서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섬의 길은 걷기의 본성을 되찾기 좋은 최적의 공간입니다. 자동차가 없는 섬, 통영의 곤리도는 그래서 걷기 위해 가야 할 섬입니다.

연륙이 된 미륵도 삼덕항에서 불과 10분 거리. 섬에 내리자 선착장 옛날 막걸리집 빈 건물 앞에 앉아 바다를 보고 있던 노인 두 분이 대뜸 “뭐 볼 거 있어 왔나, 볼 거 하나도 없다”고 말을 건넵니다. 노인들 말씀처럼 이 섬에는 특별히 빼어난 풍경이 없는 걸까요. 특별하지 않으면 어떻겠습니까. 때로는 특별하지 않음이 좋을 수도 있지요. 특별했다면 이 섬 또한 난개발의 광풍을 비껴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호젓하고 편안하고 한가롭고 평범한 섬. 섬은 원형을 잃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런 섬들이야말로 진짜 힐링의 섬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아무 볼 거 없다면서도 노인들은 자부심 가득 찬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참 잘 생긴 섬입니다.”

참 잘 생긴 섬, 오래된 시간의 길목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마을 언덕 위의 빈집 앞에서 걸음을 멈춥니다. 대문 없는 빈집의 안방 문이 살짝 열려있습니다. 방안에는 장롱이 있고 밥상도 펴진 채 놓여있고 파란 전화기도 있습니다. 저 전화기는 아직도 통화가 되는 걸까. 근래까지 사람이 살다가 어디 먼 곳을 다니러 간 것은 혹시 아닐까. 아니면 잠깐 나갔다 와야지 하는 마음으로 집을 떠났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한 것은 또 아닐까. 작은 방에는 이불까지 그대로 깔려있습니다. 부엌의 냉장고도 새것처럼 멀쩡하고 장독도 윤기가 납니다.

주인은 아파서 병원이라도 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한 노인이었지 싶습니다. 섬에서는 종종 그런 일이 있습니다. 피붙이도 남기지 않고 노인은 떠나간 것일까요. 그도 아니면 양식장을 하다 부도가 나서 야반도주라도 한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큰 바람에 지붕의 일부는 날아가 버리고 마당에는 풀들만 무성합니다. 주인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집은 저처럼 조금씩 낡아가다 마침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테지요. 삶의 흔적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대체 무엇이 있어 생생하게 살았던 우리네 삶을 증거 해 줄까요.

▲정다운 오솔길의 길의 끝은 바다, 바다, 바다Ⓒ섬학교

김덕수보다 풍물을 잘 치던 상쇠 경신이 영감

해안가 양지녘 옛 보건소 담벼락 밑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추운 계절. 몇 안 되는 섬의 남자 노인들이 다 모이셨습니다. 나그네가 지나가니 좀 앉아서 쉬다 가라 권하십니다. 이제는 제 한 몸 지탱하기도 어려워 지팡이에 의지해 앉아계신 노인들. 한때는 세상 전부를 짊어지고도 남을 만큼 힘이 넘치던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노인들에게 섬의 옛날을 여쭈니 신이 나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습니다.

곤리도의 수호신은 석조입니다. 돌로 만든 새. 돌오리 한 마리가 우물가 시멘트 기둥으로 된 솟대 위에 앉아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습니다. 솟대에는 오신장군(鰲神將軍)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자라 신을 모시기라도 하는 것일까요. 솟대의 역사는 마을의 역사와 동일하다고 합니다. 섬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솟대는 섬사람들을 지켜왔습니다. 임진왜란 직후부터 섬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으니 400여 년을 같은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나무로 깍은 기둥 위에 돌 새를 앉혔지만 한동안 박정희 정권 시대 미신타파 정책으로 솟대가 뿌리 뽑혀 버려지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 후 마을에 안 좋은 일들이 자꾸 생기자 주민들이 시멘트로 기둥을 만들어 솟대를 다시 세웠다 합니다.

솟대는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혀서 세운 상징물입니다. 대체로 마을 어귀에 세워지는데 삼한시대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성지(聖地)인 소도(蘇塗)의 유풍입니다. 솟대 위에 오리를 만들어 숭배하는 풍습은 고대부터 이어진 북방 유목민들의 신앙이었다고 합니다. 신조(神鳥)숭배에서 비롯된 풍습이지요. 몽고제국의 왕궁에도 솟대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세우는 목적에 따라 이 땅의 솟대는 보통 세 종류로 분류됩니다. 마을의 액막이와 풍농·풍어 등을 기원하여 세우는 솟대와 풍수지리상으로 행주형(行舟形)인 마을에 비보(裨補)로서 세운 솟대, 과거 급제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솟대가 그것이지요. 대체로 마을의 신앙물로 세우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곤리도의 솟대 또한 그러합니다.

옛날 곤리도 사람들은 해마다 음력 3월 초 이틀이면 솟대 아래서 별신제를 올렸습니다. 집집마다 각자의 상을 내와서 우물(서지새미)가 제포구 나무 아래 제물을 차렸습니다. 우물가의 포구 나무(팽나무)를 제포구 나무라 하는 것은 이 나무가 제를 받는 당산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본래는 할매, 할배 두 포구 나무가 있었지만 어느 해 태풍에 한 그루는 쓰러져 버렸고 지금은 한 그루만 남았습니다.

제가 끝나면 사람들은 제물들은 배로 싣고 나가 바다에 뿌렸습니다. 그렇게 풍어와 무사 안녕을 기원했습니다. 보통 3-4일씩 이어진 별신제 기간에는 엿장수 같은 장사꾼들도 많이 왔고 인근 섬이나 통영에서 구경꾼들까지 몰려와 섬은 축제 마당이 됐습니다. 별신굿은 다른 마을 무당을 불러다 했는데 특히 욕지도 출신의 ‘덕순이’란 무당이 굿판을 참 잘 이끌었다는군요. ‘덕순이’는 상쇠며, 장구, 북을 치는 풍물패 대여섯 명을 데리고 들어와 굿판을 흥겹게 이끌었습니다.

“덕순이가 인물도 좋고, 청도 좋고 참 잘했어. 같이 온 상쇠도 참 잘 쳤지. 경신이 영감이라고 흰 두루마기 입고 쇠를 쳤지. 김덕수보다 훨씬 잘했어.”

노인들은 저마다 영화롭던 섬의 옛 시절을 회상하며 모처럼 들뜬듯 합니다. 곤리도는 고니섬, 고내섬, 곤이도(昆伊島), 곤하도(昆何島) 등 당양한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곤리도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섬의 모양이 하늘을 날아가는 고니[白鳥]처럼 생겼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하고 섬에 겨울 철새인 고니가 많이 찾아들곤 했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진위야 어떻든 섬이 고니와 연관이 깊은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웃 섬 학림도 또한 학이 많이 날아들어서 학림도라 했다는 것을 보면 이 근방 섬들이 한때는 철새 도래지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까닭에 두 섬을 같은 새섬이라는 의미에서 곤리도를 윗섬, 학림도를 아랫섬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지난 세월 바다에서 돌아오면 막걸리 한 잔에 고단함을 잊던 노인들. 세월은 또 하염없다.Ⓒ섬학교

동물이 식물로 전이되어가는 불가해한 시간

곤리도에는 할머니 혼자 사는 독거 가구가 대부분입니다. 부부간에 사는 집은 드물지요. 할머니들 다 돌아가시고 나면 모두 빈 집이, 빈 섬이 될 터입니다. 젊은 축으로 보이는 노인 한 분이 말씀 하십니다.
“나가 지금 환갑 진갑 다 지났는데 요 섬에서는 젤로 어립니다.”

예전에는 곤리도 앞바다가 황금어장이었습니다. 온통 물고기 밭이었습니다. '채낚기'로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새우조망'을 처음 시작한 곳도 곤리도였습니다. 새우 조망은 그물 입구에 붙인 파이프가 모래바닥이나 진흙바닥을 탁탁 칠 때 바닥에서 튀어 오르는 새우를 잡는 어법입니다. 어업이 융성할 때는 180가구까지 산 적도 있습니다. 초등학생만 180명이었으니 면적 1.2㎢의 이 작은 섬에 물경 1000명 가까운 사람이 복작거렸었다는 뜻이지요. 논도 제법 많았었지만 이제는 다 묵혀져 풀밭이 되었습니다.

어로활동이 활발하고 미역 같은 해초도 많이 났으니 ‘돈 섬’이란 이름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다니다 보면 통영 지방 섬들치고 돈 섬이 아니었던 섬이 없습니다. 어느 섬엘 가나 돈 섬이었다고 합니다. 한 시절 섬들이 바다 것들로 넘치게 풍요를 누리던 시절이 있었던 까닭입니다. 하지만 물고기의 씨를 마르게 하고 해초를 자라지 못하게 한 것은 사람들입니다. 어업 기술의 발달이 오히려 재앙이 되었습니다. 대량으로 잡아들이고 마구잡이로 채취하고 폐그물 따위를 함부로 버린 까닭에 바다 밭은 황폐화 되었습니다.

이제 바다가 거저 주는 것은 드뭅니다. 물고기고 해초고 기르는 노고를 더해야 합니다. 하지만 노인들은 양식을 할 기력도 없어 그저 양지녘에 나와 볕이나 쬘 뿐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도 식물이 되어갑니다. 나무나 풀들처럼 태양으로부터 직접 에너지를 얻으려는 듯 자주 볕에 나와 광합성을 합니다. 동물이 식물로 전이되어 가는 불가해의 시간. 섬의 양지녘은 풀 수 없는 생명의 암호를 간직한 비밀의 정원입니다.

철마가 곤리도로 간 까닭은?

곤리도 당산 정상에는 독집이 있습니다. 곤리도의 당집입니다. 이 당집은 철마신앙과 관련이 깊습니다. 곤리도 당산에는 철마가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옛날 곤리도와 마주보고 있는 미륵도 삼덕리 원항마을 당산인 장군봉 신당에는 마을의 수호신인 철마가 모셔져 있었다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철마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어느 밤 곤리도 마을 청년들이 장군봉의 철마를 훔쳐 곤리도 당산에 묻어서 숨겨버렸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곤리도 청년들은 원항마을 장군봉의 철마를 훔쳤던 것일까요.

옛날 곤리도는 늘 식량이 부족해 살기 어려웠습니다. 주민들도 단명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뛰어난 인재가 태어나도 아주 일찍 죽곤 했습니다. 어느 해 곤리도 주민 한 사람이 삼덕항에서 어떤 도인을 만났습니다. 도인은 곤리도가 가난하고 인재가 나지 않는 것은 장군봉 산세와 정기가 곤리도를 누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비방을 알려줬습니다. 장군봉 당집에 모셔다 있는 철마를 훔쳐다 곤리도 당산에 독집(당집)을 짓고 당신으로 모시고 제를 올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액운이 사라지고 섬이 살기 좋아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주민이 청년들을 모아 거사를 감행했던 것입니다. 철마를 모시고 당제를 지내면서 곤리도는 마을이 번창하고 인재도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지만 실제로 철마신앙의 역사는 유구하고 광범위합니다. 철마신앙이 곤리도에 들어오게 된 이야기가 신화적으로 포장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철마신앙은 전라도, 경상도, 경기도 등 전국적으로 유포된 민간 신앙이었습니다. 지역에 따라 쇠물, 쇠말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철마는 5-10cm 크기의 쇠로 만들어진 모형 말입니다. 철마는 마을 당제에서 주신으로 모셔지기도 하고 마을신이 타고 다니는 동물신으로 모셔지기도 합니다. 더러 마을신에게 바쳐지는 제물이 되기도 하지요. 간혹 토마(土馬)와 돌로 만든 석마(石馬)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신들의 숲, 김해김씨 선산

마을의 서쪽 폐교를 지나 언덕을 넘어갑니다. 옛날에 고래가 떠밀려 왔다는 고래개 부근 바다는 이제 수상가옥들로 꽉 들어차 있습니다. 어류 양식장입니다. 언덕은 초지입니다. 한때는 다랭이 논과 밭들이었지만 지금은 묵혀져 초원을 이루었습니다. 10여 분 걸었을까. 잘 보존된 상록수 군락이 나타납니다. 마을의 노인들이 “대한민국에 그런 숲 없다”고 자랑하시던 잣밤나무 숲입니다. 숲은 잣밤나무뿐만 아니라 생달나무, 동백나무 고목들로 가득합니다. 생달나무 곁을 지나니 나무 냄새가 향기롭습니다. 생달나무 잎은 향이 좋아 방향제로도 쓰이는 까닭입니다. 숲 주변 역시 온통 초원입니다. 고라니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꿩들도 먹이를 찾아 풀밭을 종종거립니다. 논밭이 묵혀지면서 새로운 생태계가 형성됐습니다.

인간의 간섭이 미치지 않으면 자연은 놀랍도록 빠른 회복력으로 야생의 생태계를 복원합니다. 이 숲과 초원이 마침내는 곤리도의 가장 큰 자원이 될 것이란 예감이 밀려듭니다. 이 부근에는 묘지들이 유난히 많습니다. 마을의 공동묘지였던 셈이지요. 상록수 숲은 김해김씨의 선산 숲입니다. 어느 왕릉 못지않게 잘 가꾸어진 숲. 거목들이 수호 신장처럼 묘지들을 보호하고 서있습니다. 신들의 숲입니다. 새벽에 눈뜨자 문득 곤리도로 가고 싶었습니다. 이 숲이 불렀던 것일까요. 이토록 잘 보존된 잣밤나무, 생달나무 숲은 남해안의 섬들에서도 희귀합니다. 보호림으로 지정해 보호해야 마땅하지 싶습니다. 온통 소나무들이 점령해버린 곤리도의 산에서 유일하게 남은 상록수 숲. 이 숲이야말로 곤리도의 진짜 보물입니다.

2018년 1월의 섬학교 제67강 <통영>과 <곤리도>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월 6일(토)
07:00 서울 출발(아침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 지하철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67강 여는 모임
-통영 도착
-점심식사(남도밥상)
-삼덕항 출항
-곤리도 걷기
선착장→솟대→마을안길→고래개→김해김씨선산숲→고래개→선착장(3km)
-곤리도 출항
-박경리기념관 탐방
-달아전망대 일몰
-해저터널 건너기
-숙소도착(하와이호텔, 다인실)
-저녁식사 겸 뒤풀이(통영 최고의 다찌집에서 해산물의 향연)
-자유시간 및 취침

1월 7일(일)
06: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물메기국)
-삼칭이 해안길 걷기(4km)
-동피랑 마을, 세병관 탐방
-점심식사(통영한정식)
-중앙시장 장보기
14:30 서울 향발. 제67강 마무리모임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1월의 섬학교 <통영>과 <곤리도> 답사지도 Ⓒ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모자, 선글라스, 장갑,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섬학교'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이며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2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故)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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