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출판계의 한 경향이 있다면 '보건'이다. 2017년 하반기에 고려대 교수 김승섭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동아시아 펴냄)을 시작으로 세계의사협회장을 지낸 런던대 교수 마이클 마멋의 <건강 격차>(김승진 옮김, 동녘 펴냄), 몬트리올 퀘벡대 교수 출신으로 여성 노동자의 산업보건 문제를 다룬 캐런 메싱의 <보이지 않는 고통>(김인아·김규연·김세은·이현석·최민 옮김, 동녘 펴냄)까지 인구집단의 건강은 하나의 화두가 되었다. 이런 현상의 의미는 여러 모로 해석될 수 있지만, 하나의 해석을 더하자면 세월호라는 파국을 겪으며 안전과 생명의 문제가 사회구조와 직결되어 있음을 재인식한 우리의 의식 변화와 관련 있지 않을까? 즉, 이런 경향은 건강불평등과 산업보건의 문제와 같은 사회구조가 다른 무엇이 아닌 '자신의 몸'에 직접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이제 적잖은 사람들이 각인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앞서 언급한 세 권의 책은 모두 훌륭하지만 소위 전문가에 의해 쓰였다는 점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김승섭과 마이클 마멋은 의사 출신이며, 캐런 메싱은 생물학자 출신으로 모두 하버드와 UC버클리 등 유수의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한 학자들이다. 전문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단단한 근거에 입각한 그들의 주장을 통해 건강불평등의 거시적 문제점을 인식하는 일 역시 절대 가볍지 않다.
그런데 산업 현장이라는 특정 장소가 있고, 그곳에서 아파하는 이들이 있을 때, 어떤 사람을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까? 대학교수? 의사? 노무사? 변호사? 반대로 어떤 사람을 '전문가가 아니다'라고 할 수 있을까? 뼈 마디마디마다 고통을 새기고 살아온 이들을 전문가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네 조각의 각기 다른, 하지만 또렷한 공통점을 보이는 답변을 제시하는 책이 여기 있다. 그 답변인 <결국 사람을 위하여>(정진주·김향수·박정희·정영훈·진현주 지음, 사회건강연구소 펴냄)는 단순한 대답이 아닌, 김신범, 박세민, 이은주, 이훈구 등 네 명의 노동안전보건 분야 노동·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몸으로 써내려간 기록이다. 그들은 모두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다 어쩌다, 우연히, 안전보건운동에 참여했다. 그들 각자 그 자리를 지켜야 하는 이유가 있었고, 그들 모두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노동 건강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노동운동이 시대의 과업이었던 시절, 노동자의 건강문제는 부차적이었다. 인간의 조건을 두고 목숨이 오가는 장에서 '건강'은 사치스러운 이슈였다. 그럼에도 노동자와 함께 하는, 그들 중 다수는 자신이 노동자이기도 했던 이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에 직면했다. "노동자에게는 왜 똑같은 건강 문제가 반복되는가? 왜 노동자는 이런 처지에 처했는가? 왜 이런 처지에 있는데도 저항하지 못하나? 이렇게 억울하게 아픈 사람들이 있는데 왜 우리는 회사를 바꾸지 못하나?" 그리고 각자의 현장에서 비참을 경험하며 무엇이 답인지 끊임없이 자문하고 있다.
어쩌면 이 책에 등장하는 네 명 모두에게 강렬한 영향을 끼쳤을 하나의 사건을 살펴보자. 자살이 산재로 인정받게 된 최초의 사례인 이상관 사건은 다음과 같다.
학창 시절 축구선수를 할 만큼 건강한 아들 이상관은 대우자동차 입사 1년 만에 산재 환자가 됐다. 그해(1999년) 2월 20일 공장에서 짐을 옮기다 차에 치여 고향 사천 성모병원에 입원했다. 아버지는 다리를 절고 염좌 증상이 심해져 걷지도 못하는 아들의 증상과, 입원해야 한다는 주치의 소견을 전하러 근로복지공단에 갔다. 근로복지공단은 "25세 이후 찾아오는 노화 때문"이라며 연기신청을 거부했다. 6월 22일 아들은 "도저히 예전같이 회복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는 유서를 남기고 직접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근로복지공단이 산하 지사에 내린 IMF 고통분담 지침은 "재요양 심사 강도를 높여 20% 이상 재요양을 억제하여 114억 원을 절약하며, 입원환자의 10%를 통원치료로 전환 조치하여 52억 원을 절약하라"고 되어 있었다. 이 지침은 주치의 소견을 무시하고 치료가 필요한 산재 환자를 요양 종결 대상으로 분류하라는 할당치를 강제했다.
그랬던 이상관의 아버지는 2002년 다시 이은주가 있는 마산창원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을 찾았다. 대우조선에 다니던 이상관의 형도 산재 치료 중 자살했기 때문이다. 이은주는 다시 아들을 잃은 아버지 옆에 섰다. 자신이 한 일은 아버지 옆에 있는 일뿐이었다. 회사가 알아서 가족이 동의할 수 있는 선에서 안을 가져와 합의를 했다. 당시 형제의 아버지 곁을 함께 했던 이은주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장례를 치르는데, 발인하고 고인이 살던 집에서 제를 지내잖아요. 아버지랑 저랑 제사 지내는 걸 보는데, 아버지가 담배 한 대를 태우는데, 아버지 담배 피우는 그 모습 뒤로 만장이 있고, '은주야, 내가 산 인생이 내 아들 둘이 살다 간 인생보다 더 길다.' 이 말씀을 하시는데, 아, 그 장면이 내 머리 속에 찍혀 버려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어요."
다른 세 명 역시 이런 죽음의 장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상황을 거치며 활동가들은 지식의 문제보다, 몸으로 부딪치는 기술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김신범 원진노동환경건강연구소 부소장은 "노동자들은 자신이 지금 몇 ppm의 유해물질에 노출되어 있는지를 몰라서 못 싸우는 게 아니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못 싸우는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가 택한 방식은 싸우는 방법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더 많은 노동자가 싸우는 방법을 깨달아 자신을 지키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그는 여전히 이 일을 하고 있다.
몰라서 못 싸우는 게 아니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몰랐다는 김신범의 말은 전략의 함의만 가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아닌 것에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주체성을 포괄하는 것이고, 이때 전략이란 활동가가 노동자와 연대할 수 있는 방법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훈구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는 소속 단체의 설립 취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데 노동자가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안전보건활동이라는 맥락과 궤를 같이 한다.
"소위 전문가라는 외부 사람들이 일하는 노동자보다 더 전문가인 것처럼 인식되어서 노동자 당사자의 문제를 '대리'하거나 '대행'하는 구도가 보편화 되어 있었다. 한노보연은 대행 구도를 반대했다. 한노보연은 보건의료인과 학자의 역할을 존중하되, 노동안전보건운동의 중심세력은 현장노동자이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안전보건운동이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좌절의 기록에 가깝다. 민주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 박세민 노동안전보건실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작업 중지를 시키고 안전조치를 해야 하는데, 물량팀에게는 이렇게 지시할 수가 없어요. 예를 들면, 그라인더를 하고 있는데 가서 환기조치 안하고 있다고 작업 중지 시키면 그라인더 그냥 집어 던져 버려요. '느그들이 우리 새끼들 먹여 살릴 거냐?' 그러면서 난리치거든요."
이해의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죄책감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 가령 공장에는 공장 나름의 규율과 정치가 있다. 신속한 생산으로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공장의 규율이다. 규율은 그 안에서 훈련된 사람들의 이데올로기가 된다. 때문에 '내가 사고를 당해 생산에 악영향을 끼친다면, 나는 이 공장에서 불필요하거나 분란을 일으키는 존재가 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노동자가 죄책감을 가지도록 만든다.
활동가들 역시 지친다. 사고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일단 이거부터 해결하자"는 다짐을 매일 새로운 사건을 대하며 되풀이해야 하는 악순환이 생긴다. 하지만 산업재해는 노동 강도와 노동 조건 전반에서 누적된 위험이 드러난 결과다. 근본적으로 개선해야할 부분을 건드리지 못하고 매번 다른 이슈에 뛰어들어야 하는 그들의 고단함도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곳에 있다. 좀 더 힘이 없는 사람에게 오늘도 달려가는 그들이 여기 있다. 그리고 그들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일하다 아프면서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노동자의 삶으로 들어가게 된다. 고되지만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 그 일을 기꺼이 슬프고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은주의 다음과 같은 구술은 노동자도, 전문가도, 활동가도 아닌 일개 참관인에 불과한 나조차도 감화 받게 만든다.
"제가 아프다는 걸 인식하지 않고 산 거 같아요. 그때 생긴 버릇이 화장실 입구에서, 세숫대야에 발을 담구고 주무르며 그날 퉁명스레 말한 일을 생각해보며 '참 그럴 만했네, 힘들었으니 그랬네.' 하고 저를 다독여준 거죠. 좀 여유가 생기면 '아 그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말해 내가 상처 입었구나. 저 사람은 이거 때문에 그렇게 말했겠구나.' 이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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